야콥 부르크하르트: 세계 역사의 관찰 ━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


세계 역사의 관찰 - 10점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휴머니스트



옮긴이의 말


제1부 역사의 관찰-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

01 우리의 과제

02 역사 연구를 위한 19세기의 자격


제2부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국가.종교.문화

03 국가

04 종교

05 문화

06 시문학에 대한 역사적 관찰


제3부 세 잠재력의 상호작용-여섯 가지 제약받음의 관찰

07 국가의 제약을 받는 문화

08 종교의 제약을 받는 문화

09 종교의 제약을 받는 국가

10 문화의 제약을 받는 국가

11 국가의 제약을 받는 종교

12 문화의 제약을 받는 종교


제4부 역사상의 위기들-전쟁과 혁명

13 역사적 위기들

14 오늘날의 위기의 기원과 특성에 대해 덧붙임, 19세기


제5부 위대한 개인들-개체성과 보편성

15 위대한 개인들, 역사적 위대성이란 무엇인가


제6부 세계사의 행운과 불운에 대하여

16 역사 관찰에서의 의도와 인식


원주(原註)

찾아보기




+2021년 강유원 선생님의 "부르크하르트, 세계사적 고찰 읽기" 강의 일정에 맞추어 책을 읽을 예정이다. 




01 우리의 과제

이 책에서 우리의 과제는 역사 관찰과 역사 탐구 일부를 절반쯤 우연에 속하는 사유 과정과 결합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유 과정과의 결합은 다음으로 다루기로 한다.

맨 먼저 여기서 다루어지는 영역에 대한 관점을 전반적으로 서술하고, 뒤이어 세 잠재력인 국가, 종교, 문화를 다루기로 한다. 그 다음 이들의 지속적이고 점차적인 상호작용을 관찰한다. 특히 움직이는 것(문화)이 고정된 두 잠재력〔국가와 종교〕에 미치는 작용을 관찰한다. 이어서 세계 변화의 과정을 갑작스럽게 빨라지게 하는 움직임으로 넘어간다. 곧 위기와 혁명의 이론이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다른 움직임들을 모조리 빨아들여 삶의 나머지 영역도 함께 들끓게 하는 단절과 그에 대한 반동을 다루는 것으로서, '폭풍론'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어서 위대한 개인들에게서 세계사가 농축되는 것, 곧 변혁의 집중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앞으로 나타날 것이 이런 개인들 안에서 합쳐지면서, 이들 개인들은 일시적으로 그 윈인 제공자, 또는 그것의 핵심 표현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사에 나타나는 행운과 불운에 대한 장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을 역사로 바꾸어 버리는 일에 맞서 우리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독자를 학문적 의미에서의 역사 탐구로 안내하지 않고, 정신적 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역사적인 것=역사성〕을 탐구하도록 자극하고자 한다. 나아가 체계를 모조리 포기한다. 우리는 '세계사적인 이념들'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지각하는 것에 만족하며,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역사를 통한 가로 단면〔=횡단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특히 역사철학을 제시하지 않는다.


역사철학이란 말은 '켄타우루스' 같은 합성 괴물이다. 곧 명사와 수식어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말이다. 역사란 대등한 것들의 통합〔대등한 인자들을 적절히 배치함.〕이기에 철학이 아니며, 철학이란 종속적 통합〔중요한 이념에 나머지를 종속시킴〕이므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을 먼저 살펴보자. 철학이 크고도 보편적인 삶의 수수께끼를 직접 다룬다고 보면 철학은 역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역사는 최상의 경우라도 결함을 지닌 채 간접적으로만 이런 목적을 따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자기만의 수단으로 작업하는 진짜 철학 곧 무조건적인 철학이어야 한다. 이 수수께끼를 종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특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의 특별한 내적 능력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철학은 역사를 뒤따라가면서 그 길이 단면〔=종단면〕을 제시하는 특성을 보였다. 곧 연대기 방식이었다. 역사철학은 이런 방법으로 세계 발전의 보편적 과정을 꿰뚫어보려 했다. 대부분은 극히 낙관적 의미에서였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바로 그렇다 그는 철학이 〔다른 것과 힘을 합쳐〕 가져오는 생각이란 오직 이성의 생각뿐이며,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당연히 세계 역사도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세계 역사의 결과를 세계정신의 이성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증해야만 한다. 그는 '영원한 지혜가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관찰이 부정적인 것(흔히 쓰이는 말로는 '악')을 종속시키고 극복하여 사라지게 한 긍정의 인식이므로 변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세계 역사란 정신이 본래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 의식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유를 향한 발전 과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곧 오리엔트에서는 한사람만 자유로웠고, 고대 민족들은 일부 사람만 자유로웠지만 새 시대에는 모두가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도입된 완성 능력의 이론, 이른바 진보의 이론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헤겔처럼〕 영원한 지혜의 목적을 전수받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세계 계획에 대한 이런 대담한 예측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여러 오류들에 도달하게 된다.


연대기적으로 정리된 역사철학의 위험은 가장 훌륭할 경우라도 세계문화사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다. (역사철학이라는 표현을 얼마나 남용하는 것인가.) 하지만 보통은 세계의 계획을 추적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은 '아무런 전제도 없음'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철학자 자신이 서너 살부터 습득한 이념들로 물들이는 작업을 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오류는 철학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가 모든 시대의 완섭이라고, 또는 거의 완성에 가깝다고 여기고, 과거에 존재한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배려해서 관찰하는 까닭에 생기는 오류다. 실은 우리를 포함하여 존재했던 것은 모두 그 자체로서, 또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것과의 관계에서, 또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종교적 역사 관찰만은 특별한 권한을 갖는다. 그 위대한 모범으로는 변신론의 최고봉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시》를 꼽을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여기서 우리가 관찰할 영역이 아니다. 다른 잠재력들도 역사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들은 민족의 역사를 이용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는 가능한 중심점, 곧 견디고 투쟁하고 행동하는 인간,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찰은 어느정도는 병리적인 성격을 갖는다.〔=인간이 병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되콜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

역사철학자들은 과거를 현재의 발전된 우리에 대한 대립이나 전(前)단계로 여긴다. 그에 비해 이책에서는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 우리 속에도 있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본다.


역사철학자들은 〔역사의〕 시작에 대한 사변에 붙잡혀 있고,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시작의 이론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따라서 종말의 이론에 대한 요구도 없다. 그래도 이 켄타우루스〔=역사철학〕를 매우 고맙게 여기고, 역사 연구라는 숲의 가장자리 여기저기서 이 괴물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할 수는 있다. 그 원칙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숲을 통과하는 대단한 전망 몇 가지를 만들어내고, 역사에 소금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헤르더를 생각해보라.


그 밖에도 어떤 방법이라도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고, 그 무엇도 모든 것에 대해 타당하지는 않다. 관찰하는 개인은 누구나 자신만의 길을 걷게 마련이며, 이것은 자신의 정신적 삶의 길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자신만의 길을 통해 위대한 주제에 접근하는 데, 그런 다음 자신의 길에 맞추어 자신의 방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제한

우리의 사유 과정이 〔역사철학처럼〕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과제가 온건한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스로 제한을 둘 수 있다.(만세!) 우리는 오로지 짐작으로만 알 수 있는 태고의 상태, 곧 역사의 시작을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할 필요가 없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명료한 문화적 상(像)들을 그 역사에서 찾아 낼 수 있는, 현재 살아 있는 종족들과 민족들에 〔관찰을) 한정할 수 있다. 풍토와 기후의 작용, 동쪽에서 서쪽으로 세계 역사가 이동한 것 등의 문제들은 역사철학자들의 문제일 뿐 우리의 문제가 아니므로 다루지 않고 그냥 넘어가도 전혀 상관이 없다. 또한 정말로 거대한 것들, 곧 종족의 이론, 옛날 세계를 세 부분으로 나눈 지리학 등의 이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수많은 학문 연구가 근원이라는 부분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역사만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대부분 만들어진 구조로서, 앞으로 특히 국가를 다루는 부분에서 보게 되겠지만, 우리 자신의 반영일 뿐이다. 민족이나 종족 단위로 이루어진 추론들은 타당성이 매우 허약하다. 우리가 첫 시작임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어차피 아주 뒷날의 단계다. 예를 들어 이집트 메네스 왕도 아주 길고 엄청난 그 이전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족이 수상가옥을 만들었나?' 따위의 질문에도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와 동시대 사람들, 가장 가까운 이웃들도 〔추론하기가〕 얼마나 힘들며, 다른 종족 등등의 질문은 얼마나 더 어려운가.


여기서 우리가 당연히 다루어야 할 역사의 총체적 과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핵심현상―역사권력이 계속 나타났다가 몰락해 사라진다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 모두 변할 수 있고,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외적인 삶과 정신적 삶의 겉치장을 이루는 형식들도 함께 변하는 것이므로, 역사라는 주제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두 가지 기본 방향을 보이고, 또 그런 방향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어떤 영역에서 지각되는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정신적인 것은 역사적 측면을 갖는다. 여기서 정신적인 것은 변하는 것 제약을 받는 것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이 거대한 전체 안에 받아들여진 일시적인 계기 등으로 나타난다. 둘째로 모든 사건은 정신적 측면을 갖는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사건은 스러지지 않는 영원성에 동참한다.


정신은 변할 수는 있지만 스러지는〔=허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가능성과 나란히 다양성도 나타난다. 곧 서로 대립하거나 보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민족과 문화가 나란히 나타난다. 측량할 길 없이 거대한 인종학의 바탕 위에 물질적·정신적인 것이 한데 얽혀 있고, 온갖 인종, 민족, 관습, 종교가 정확한 맥락을 이루도록 표현된 거대한 정신적 토양의 지도를 상상해보라. 물론 뒷날 파생된 시대에도 인류가 겉으로 또는 진짜로 공통의 맥박을 치는 듯이 보이는 시대가 이따금 있기는 했다. 예를 들면 기원전 6 세기에 중국에서부터 이오니아의 지역에까지 이르는 종교적 운동과 루터의 시대에 도이칠란트와 인도에서 있었던 종교적 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물론 역사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거대한 핵심현상이 있다. 언제나 그 순간의 최고 정통성을 지닌 역사적 권력이 나타나곤 한다. 온갖 종류의 지상의 생명 형태들 곧 (헌)법, 특권계층, 시간성 전체와 깊이 뒤얽힌 종교, 대소유계층, 완전한 사회적 관습, 특수한 법의 개념 등이 그 권력에서 발전되어 나오거나 거기 의존하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만이 이 권력을 뒷받침하고, 또 그 시대의 도덕적 힘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오로지 정신만은 깊이 생각하고 들이파는 활동을 계속한다. 물론 〔앞에 말한〕 모든 생명 형태들은 변화에 저항하지만, 결국은 혁명을 통해서나 서서히 부패함으로써 마침내 단절이 나타난다. 도덕과 종교의 붕괴, 이른바 몰락, 그야말로 세계의 몰락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벌써 정신은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데 이 새로운 건물도 시간이 흐르면서 동일한 운명을 겪는다.


한 시대를 사는 개인은 이런 역사적 권력들에 마주서게 되면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은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당파나 저항하는 당파에 귀속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과정 바깥에서 자신을 위해 아르키메데스의 〔지레를 박을〕 점을 찾아내 이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상은 그리 크지 않고, 비가의 느낌을 막을 길이 없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어느 한당파에 소속되어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뒷날에야 정신은 자유롭게 이런 과거를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가능한 온갖 가면을 쓴 채 천 가지 모습으로 복잡하게, 자유롭고도 부자유스럽게 흔들리는 그대로의 역사적 생명이 바로 이런 핵심 현상의 작용이다. 그것은 때로는 대중을 통해 때로는 개인들을 통해 말을 하고, 때로는 낙관적으로, 때로는 비관적인 기분으로 국가와 종교, 문화 등을 건설하고 또 파괴하는, 때로는 자신에게도 막연한 수수께끼여서 성찰의 안내보다는 상상력을 매개로 한 미지의 감정의 안내를 받는, 때로는 순수한 성찰을 동반했다가도 다시 훨씬 뒷날에야 실현되는 것들에 대한 예감을 수반하는 생명이다.


누구나 피할 길 없이 수동적으로 공헌하는 이런 전체적인 본질에 대해서도 특수한 시대의 인간인 우리는 관찰을 통해 비판적으로 마주서야 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의무

그리고 우리는 정신적 연속체인 과거에 대한 우리의 거대한 의무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연속체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정신적 재산이다. 이것을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이라도 모두 극히 긴장하고 몹시 수고하여 수집해야 한다. 과거에 존재한 정신의 지평선들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래야 한다. 이 유산에 대한 각 세기의 관계는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인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도 다음 세대에는 다시 역사가 되고, 극복되면서 유산에 덧붙여진다.


자기들의 문화적 껍질을 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여겨 절대로 망가뜨리지 않는 사람들만이 이런 이점을 포기한다. 그들의 야만성이란 곧 그들에게 역사성이 없음이요, 역사성 없음이 곧 그들의 야만성이다. 그들은 적에 대한 대립 의심과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갖는다. 곧 역사적·종족적인 시작들을 갖는다. 다만 그 행동만은 종족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에 대한지식 만이 상징들을 통한 관습 등등의 속박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비역사적 교양인인 미국인도 역사성을 포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구세계의 역사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고물처럼 부자유스럽게 매달려 있다. 뉴욕 부자들의 문장들, 가장 부조리한 형태의 칼뱅 기독교〔=청교도], 유령 출몰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극히 다채로운 이민에서 나온 〔유럽 역사의 유물인〕 이런 고물 위에, 미국식의 살아 있는 교양이 의심스런 방식과 지속성으로 덧붙여진다.


역사의가치

이런 과제를 위해 우리의 정신은 천성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무장을 갖추고 있다. 정신은 모든 시간적 것을 이념으로 파악하는 힘이다. 정신은 이념적인 것이지만, 외적인 형태로 드러난 물건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눈은 태양과 비슷하다. 그렇지 않다면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정신은 다양한 지상의 시간을 두루 체험한 기억을 자신의 소유로 변화시켜야 한다. 옛날에 환희와 탄식이었던 것이 나중에 인식으로 변해야 한다. 각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듯이.


이로써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는 명제는 더욱 높고도 동시에 더욱 겸손한 의미를 얻는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영리해지거나(다음 번을 위해) 지혜로워지려는(영원히)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회의론이라는 답변은 어디까지 타당한가? 처음과 끝이 알려져 있지 않고, 그 중간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들어 있는 세계에서라면 진짜 회의론이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종교의 측면에서 개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이따금 세상은 어차피 가짜 회의론으로 가득 찬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이따금씩 그런 회의론이 갑자기 유행에서 사라지곤 한다 그에 비해 진짜 회의론은 제대로 가져보기가 어렵다.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 관찰에서 참됨, 선함, 아름다움〔=진선미〕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참됨과 선함은 여러 가지로 시대의 색에 물들어 있고, 또한 시대의 제약을 받는다. 예를 들면 양심조차도 시대의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시대의 제약을 받는 참됨 및 선함이라도 그것을 위한 헌신, 특히 위험 및 희생과 결합된 헌신은 무조건 훌륭하다. 물론 아름다움은 시대와 그 변화를 넘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호메로스와 페이디아스는 아직도 아름답다. 그 시대의 참됨과 선함은 이미 오늘날 우리의 참됨과 선함이 아니건만.


역사 인식과 관찰자의 의도

우리의 사색은 단순히 권리이자 의무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높은 욕구다. 그것은 아주 거대하고 보편적인 속박받음의 의식 및 필연성의 흐름이라는 의식 한가운데서 우리의 자유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위협하는, 인식 능력의 일반적·개인적인 결함과 그 밖에 다른 위험들도 자주 의식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식과 의도라는 양극단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역사적인 글에서도 이미 인식을 향한 열망은 전승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수많은 의도라는 장애물에 부딪친다. 그 밖에도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사람을 지향하는 의도들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인식에는 더욱 나쁜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시험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 우리 자신이 속한 세기와 우리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우리는 모든 것이 훨씬 더 흥미롭다고 여긴다. 이것은 실은 우리의 '관심이 더 커진다'는 뜻일 뿐이다. 여기에 개인들과 〔민족〕 전체의 운명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덧붙여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불확실성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우리의 예감에는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과거의 수많은 실마리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것이다.


크고도 어려운 삶의 수수께끼를 아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역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인적 ·시대적 두려움의 영역을 벗어나〔=자기와 가까운 시대와 공간을 벗어나〕 우리 눈길이 이기적으로 재빨리 흐려지지 않는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주 큰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더욱 고요한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의 처음 상황이 나타난다. 다행히도 고대 역사에서 몇 가지 예들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핵심과정에 따라, 그리고 정신적 · 정치적 · 경제적 상태들에 따라 생성기나 전성기, 소멸 등을 아주 깊이 추적해볼 수 있다. 특히 아테네의 역사가 그렇다.


특히 여러 의도들이 애국심이라는 탈을 뒤집어쓸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조국의 역사〔=국사〕에만 한정하는 일은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경쟁자가 된다. 물론 고향의 역사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는 영역들이 있고, 또한 거기 몰두하는 것은 진짜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조국의 역사 연구는 교정수단으로서 다른 거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고향의 역사가 우리의 소망 및 두려움과 대단히 깊이 결합되어 있고, 그런 연구를 할 때 우리는 계속 인식의 측면에서 의도의 측면으로 넘어가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조국의 역사는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듯이 보이지만 일부는 착시에서 오는 현상이다. 곧 우리의 열성적인 태도 때문인데, 그런 일은 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도 일어난다. 조국의 역사를 다루면서 발전한다고 믿는 애국심이란 다른 민족에 대한 오만이며, 그래서 진리의 오솔길에서 벗어나 있고, 자주 조국의 영역 안에서조차 파당 짓기의 일종일 뿐이다. 그것은 자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는 저널리즘일 뿐이다.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열렬히 확정짓고, 선한 것과 올바른 것을 열렬히 정의내리고, 이런 개념들 바깥에 있는 것들을 대역죄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평범한 속물의 삶과 직업 활동을 계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말고도 전혀 다른, 더욱 중요한 의무가 있다. 곧 스스로를 인식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 모든 정신적인 것을 가까이하고, 참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시민으로서의 참된 의무를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인식을 통해 그 의무를 깨닫는 일이다.


사유의 왕국에서 모든 차단목이 높이 올라가는 것은 옳은 일이다. 오늘날 어떤 민족이든 자기들이 충분히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최고의 것이 지상에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지는 않다. 또는 우리는 국산품을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공업 생산품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은 품질이 동일하면 관세, 운송료 등을 고려하여 더욱 값싼 물건을 고르고, 가격이 같으면 더 나은 것을 고른다. 하지만 정신의 영역에서는 무조건 더 나은 것, 최고의 것을 집어 들어야한다.


조국의 역사를 가장 참되게 연구하는 방법은 세계 역사와 그 법칙의 맥락에서 〔다른 것들과〕 대등하게 조국을 바라보고, 조국을 거대한 것과 동일한 별빛을 받는 것으로, 동일한 심연의 위협을 받고, 위대한 보편적 전승에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영원한 밤, 똑같이 계속되는 삶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인식을 향한 열망을 통해서, 세계 역사에서 행운과 불운의 개념을 아예 없애거나 제한하는 일도 꼭 필요하다. 어째서 그래야 하느냐의 서술은 이 책의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여기서는 우선 이런 결함 및 위험의 마주서 있는 우리 시대가 가진, 역사의 연구를 위한 특수한 자격을 다루기도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