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주제

 

주제 - 10점
강유원 지음/뿌리와이파리

1. 책과 교양
교양이란 무엇인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진정한 교양을 위해 해야 할 일/ <신곡>을 읽는 방법

2. 역사
역사책들에 대하여/ 역사철학의 주제들/ 역사서술의 객관성과 당파성/ 역사를 보는 두 관점
우파 역사가의 거대서사/ 역사와 당대의 현실

3. 근대
개인주의/ 아동의 탄생/ 근대사의 주제들/ 자연과학이란 무엇인가/ 칼 마르크스
정념과 오성: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가 계급과 지식인: 공병호의 경우/ 안토니오 그람시
벤야민과 파사젠베르크/ 도시와 근대성/ 자본주의 시대의 사랑과 상품
칸트와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

4. 파시즘
파시즘의 정의/ 파시즘의 근본원리/ 파시즘에 있어서 '대중의 국민화'/ 스타일과 파시즘
상징의 정치화, 정치의 심미화/ 계몽주의와 '민족정신'/ 나치 시대의 지식인/ 현대의 인종주의
시민공동체와 파시스트적 잔재의 청산/ 공화주의에 대하여

5. 전쟁
전쟁, "잔인한 교사"/ 총력전의 뒤끝/ 전선기자에 대하여

6. 한국과 동아시아
조선 유학의 한계/ 조선 사회의 유교적 변환/ 주희의 커리큘럼과 조선의 관학官學
<논어>를 둘러싼 계면쩍은 장면/ 매천 황현이 파악한 구한말/ 구한말 유자儒者가 파악한 세계
식민지 조선과 세계/ 한국 현대사의 공포/ 해방공간의 시대정신


 

서문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 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책은 '자기'를 찾는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찾아낸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주어야 하며, 이러한 보여줌과 드러냄의 주체는 그러한 행위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된 자기여야 하고, 이 모든 것을 완결된 서술 구조 속에서 제시하여야만 하거니와, 이러한 것이 책이라면, 몇몇 다른 것들은 그것들에 대한 주석이거나 해설이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베낀 것일 따름이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

일반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책읽기는 대개 손에 잡히는 것에서 시작하여 옆으로 넓어지거나 아래로 깊어지거나 한다. 넓어지고 깊어지면 일정한 주제로 꿰어서 읽는다고 하는 자부가 생기는 것이 상례인데, 이 글 묶음은 그러한 알량한 자부의 산물이다. 먼저 책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이는 손에 책을 쥐는 순간이면 항상 답해야 할 물음이다. '책과 교양'에 담긴 게 그것이다. '역사'와 '근대'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이다.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은 '파시즘' 과 '전쟁' 이다. 나는 독재자 박정희의 유사-파시스트 권위주의 시대에 유아기와 청소년 시절을, 살인자 전두환 정권 시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다. 그곳을 떠나면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무의미할 것이다.

'서평'에 대한 생각은 몇 해 전 출간한 『책』에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기에 묶인 글들의 초고가 나의 웹사이트에 이미 올라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들이 일종의 쉐어웨어라면, 이 글 묶음은 완결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묶인 글들 중에는 어떤 매체에 기고함으로써 원고료를 받은 것이 몇 개 있다. 이런 식의 재탕은 몹시 혐오스러운 짓거리임을 알고 있으나 묶음의 구성을 위해 불가피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2005년 12월
강유원 적음



 

공화주의에 대하여

'자유'는 우선 외부로부터의 속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행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이른바 소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로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소극적 의미의 자유는 가지고 있지만, 즉 다른 사람이 부과한 규제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결정을 행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부터의 자유'를 넘어서 '~에 대한 자유'를 가질 때에야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뒤의 것은 적극적 의미의 자유이며, 이것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이고자 하는 개인의 바람"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 자유는 문자 그대로 적극적인 자기 지배이자 의사결정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유가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제약들과 관련을 가지지 않을 수 없거니와, 주관적 자유가 외부의 제약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구의 주요한 두 정치 이데올로기는 강조점을 달리하며 각각이 취하는 자유 개념 역시 구별된다. 소극적 자유 개념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천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적 소유과 권리로부터 국가의 기능을 도출하고 공적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이는 몰개인적 집단주의 논리가 지배적인 곳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최장집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반공을 위한 이념적 슬로건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했"며 "인간의 내면까지 사상검열의 대상으로 삼는 국가보안법이 냉전반공주의의 한 표징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내면적 양심의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원리와 양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가 왜곡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총연맹’, '자유시민연대'와 같은 단체들이 한결같이 '자유'를 참칭하고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되며, 이러한 상황을 최장집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 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 세력에 의해 버려진 것이 되고 말았다"고 규정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시장지유를 절대시하고, 국가의 시장개입은 부당하다고 믿으며, 조세에 의한 재분배 방법을 부정하는 것을 자유주의라고 생각"하는것 역시 "오해"라고 본다. "그러한 독트린은 자유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유주의의 한 극단적 형태인 시장자유주의 내지는 국가의 시장불개입주의를 의미하는 시장지상주의libertarianism거나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이처럼 철저한 왜곡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한탄처럼 한국에서 진정한 리버럴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렇지만 여건이 잘 갖추어진 곳이라 해서 자유주의가 만발할 수 있거나 인간의 자유를 올바로 실현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개념규정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자유의 소극적 측면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정치적 적실성에 문제가 있으며, 소극적 자유가 근거하는 '개인'의 개념 자체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적극적 의미의 자유가 요구되며 이때의 개인은 독일관념론, 특히 헤겔이 파악하는 도야된Bildung 개인, 즉 자기 이익 중심의 시민Bourgeois이 아닌 공민citoyen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공동체는 정치적 제도를 통한 이들 개인의 자유의 실현으로까지 그 임무의 범위를 넓혀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거니와, 그때에 대두되는 이념은 공화주의이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수행한 뒤,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을 찾고 있는 최장집은 공화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공화주의는 민주주의가 일련의 절차적 ·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제대로 작동하고 발전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그 의미가 발생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한 사회의 시민의 성격 시민의 질적 내용, 민주주의와 사회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태도와 깊이 관련된다… 공화주의는 공공선에 대한 헌신, 공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모든 시민이 권리와 혜택을 누리는 시민권의 원리, 시민적 덕에 대한 강조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 즉 그것은 적극적 시민으로서 정치에 대한 참여와 선출된 공직자의 시민에 대한 사회적·도덕적 책임성의 윤리를 함축한다."
 
공화주의는 사실 한국의 공식적인 국가 정체성이다.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공화주의라는 말의 서구적 함축, 즉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 로마공화정, 피렌체 공화국의 이상 등이 전혀 떠올려지지 않은 채 간과되어 왔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자유주의보다 더 오랜 연원을 갖는 공화주의는 무엇인가?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서구에서 공화정은 고대 아테네, 로마공화정, 피렌체 공화국 등이 그 모형으로 제시된다. 우선 로마공화정을 대략 살펴보기로 하자. 로마공화정을 대표하는 인물들로는 키케로Cicero, 카토Cato가 거론되며 그에 대립되는 이는 카이사르Caesar이다. 로마를 바라보는 이들도 전자의 인물들이 지키려 했던 로마공화정을 로마의 핵심이라 보고 후자의 인물에 의해 주도된 황제 1인의 소유물res unius로서의 국가 개념에 기반한 제정을 쇠퇴로 규정짓는 쪽이 한 편이라면, 그 반대의 입장이 대립되는 쪽에 선다.
 
그렇지만 키케로와 카토가 옹호했던 공화정은 '민주 공화정'이기보다는 '귀족정'이었음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허승일은 『로마공화정』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국가란 로마 인민의 공적 소유물이기 때문에 로마 정부는 로마인민이 공적으로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이란 구체적으로 정무관들과 원로원 의원들로서 인민을 대변하는 카토 자신의 신분, 즉 세습적인 귀족 신분을 뜻하는 고로, 로마 공화국이란 로마인민을 대표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공동 소유물이고, 따라서 국가에 대해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개념도 로마인민의 그것이 아니라 로마 원로원이 관직과 국고를 자의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고대가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을 구별하되, 궁극적으로는 전자를 중심으로 그 둘을 통합하려는 이상을 가졌다면 근대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의 전도"를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진리와 지식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은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식의 확실성은 오로지 이중의 조건이 충족될 때만 도달할 수 있다. 첫째 지식은 오로지 우리가 스스로 행한 것에만 관계한다... 둘째, 지식은 보다 많은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진다."
 
정치적 영역에서 활동적 삶의 우위는 부루니가 언급했던 덕성과 결합되면서 공회주의의 이념적 뿌리가 되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아레테arete로, 로마인들은 비르투스virtus로 불렀던 탁월성은 언제나 공론 영역에서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공론 영역에서 수행되는 모든 활동은 사생활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탁월성을 획득할 수 있다. 탁월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정의상 타인의 현존이 언제나 요구된다. 그리고 이 현존은 동등한 동료에 의해 구성된 공적인 형식성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덕은 공동체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공적 영역이나 공동체의 일에 직접 참여할 때에만 인간의 참된 자아가 실현된다고 하는 공화주의의 원리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주관적 개인과 사회적 공인公人, 모두에 걸쳐 있다. 따라서 '완성된 삶'은 어느 하나도 소홀함 없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면 그 본질의 실현은 소극적 · 적극적 자유 모두가 완성될 때에만 가능할 것이며 이때 후자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공화주의에 대한 고려는 항상 대두되는 것이라 하겠거니와, 이는 헌법 제1조가 천명하고 있는 한국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에 놓인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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