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바티스타 비코: 비코 자서전 ━ 지성사의 숨은 거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11. 8.
비코 자서전 -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교유서가 |
옮긴이 서문
I. 유소년기(1668~1686)
II. 바톨라 시기의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1686~1695)
III. 나폴리로 귀환: 초기 비코 철학의 형성(1695~1707)
IV. 비코 철학의 두번째 형성(1707~1716)
V. 비코 철학의 결정적인 형태와 1723년의 공채(1717~1723)
VI. 『새로운 학문』 초판본(1723~1724)
VII. 부차적 저술들(1702~1727)
VIII. “반론”과 『새로운 학문』 재판본(1728~1731)
부록 I. 비코의 말년: 빌라로사 후작이 1818년에 계속하여 쓰다
부록 II. 시 「절망한 자의 사랑」
부록 III. 시 「절망한 자의 사랑」 원문
15 잠바티스타 비코 Giambattista Vico는 1670년 나폴리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던 선량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쾌활했고 어머니는 우울한 편이었는데, 두 기질을 모두 물려 받았다. 실로 그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는 대단히 활력 넘치는 아이였다. 그러다 일곱 살 때,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꼭대기에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거의 다섯 시간 동안이나 실신한 적이 있었다. 두개골 오른쪽에 금이 갔는데 살갗이 찢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개골 골절로 큰 혹이 생겼고, 깊은 내상으로 여러 부위에 걸쳐 다량의 뇌출혈이 있었다. 골절된 두개골을 검사한 의사는 그가 꽤 장시간 기절해 있던 사실을 감안하여, 이 아이는 죽거나 또는 회생하더라도 바보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렇지만 신의 가호로 그 어느 쪽도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고의 후유증은 다르게 나타났다. 상처가 아물면서 그는 점점 우울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천재성과 심오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합한 성격임은 분명하다. 천재성은 예민함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이며, 심오함은 말장난이나 그릇됨을 즐기지 않는 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크리시포스의 논리학과 같은 학문을 받아들이기엔 그의 지성이 아직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방향을 잃게 되었고,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좌절이 극심한 나머지 아예 공부 자체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니 젊은이들이 자신의 연배를 넘어서는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는 공부를 멀리한 채 1년 반가량을 허송세월했다. 여기서 우리는 르네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과 수학만을 숭상하면서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학문을 손쉽게 비하했던 태도를 취하는 시늉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
81 이 시기까지 비코는 모든 지식인들 중에서 단 두 명에게만 찬사를 보냈는데, 그들은 플라톤과 타키투스였다. 왜냐하면 견줄 바 없는 형이상학적 정신으로 타키투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플라톤은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관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이 보편적인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아는 인간을 구성하는 덕성의 모든 부분을 널리 알렸듯, 타키투스는 행운과 악운의 무한히 불규칙적인 사건들 속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인간이 줄 수 있는 혜택을 조언을 하러 내려왔다고 보았다. 이 두 명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비코의 찬사는 그가 훗날 공들여 만들 계획의 전조였다. 그 계획이란 모든 시간에 걸친 보편적 역사가 밟아가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사의 영원한 속성에 따라서 모든 민족이 흥기하고 정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명한 사람이란 플라톤처럼 숨겨진 지식도 알아야 하고, 타키투스처럼 범속한 지식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99 우리가 논한 최초의 연설 시기부터 마지막 연설에 이르기까지 내내 비코의 정신을 끓어오르게 한 것은 인간적이고 신성한 모든 지식을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기 위한 새롭고도 원대한 주제였다. 그러나 그가 펼쳐온 논지로는 그것을 아우르는 데 턱없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문필 공화국은 너무도 많은 책의 무게에 눌려 있었고, 정말 중요한 발견과 쓸모 있는 창작이 아니라면 더 이상 책이 필요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자신의 연설이 출판되지 않은 걸 차라리 다행스러워했다.
147 1725년 말엽 나폴리의 펠리체 모스카 출판사에서 단 12매의 12절판 [288쪽]으로 이루어진 책이 『여러 민족의 자연법의 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여러 민족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학문의 여러 원리』라는 제목을 달고 간결한 활자체로 출판되었는데, "유럽의 대학교에게"라는 제사가 달려 있었다. 이 저작에서 마침내 비코는 이전의 저작에서 혼란된 형태로 불분명하게 이해했던 원리를 충실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 학문 최초의 기원을 신성한 역사의 출발점에서 찾아야 할 불가피하고도 인간적인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1 이러한 관념의 원리와 언어의 원리, 즉 인류의 철학과 문헌학과 함께 그는 섭리의 관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상적인 영원할 역사를 전개시킨다. 그에 따라서 민족들의 자연법이 제정되었음을 비코는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한다. 이런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에 따라 시간 속에서 출현하고 발전하고 성숙하고 쇠퇴하다가 종말을 맞는 과정을 특정한 민족들의 역사마다 밟아간다. 이렇듯 비코는 그리스인들을 고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며 조롱했던 이집트인들로부터 고대의 중요한 파편 두 조각을 받아들여 활용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전의 시간 전체를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집트인들이 이전에 말했던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번째는 신성한 언어로서 상형문자 또는 신성문자를 통한 묵음의 언어이다. 두번째는 영웅의 언어로서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한다. 세번째는 서간체 언어로서 일상적인 삶의 용도를 위해 사용한다.
비코는 첫번째 시대와 첫번째의 언어가 가족[국가]의 시대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확실히 그 시대는 민족들 사이에서 도시가 발생한 것보다 앞섰으며, 모두가 인정하듯 그 바탕 위에서 도시가 나타났다. 이 가족에서는 신의 정부 아래 가부장들 절대군주로 지배하면서 신의 전조에 따라 모든 인간사에 명령을 내린다. 비코는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연결시켜 그 역사를 자연스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여기에서 그는 오리엔트의 신들에 대해 고찰하는데 칼데아인들에 의해 별들의 위치로 격상되었던 그들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그리스로 전파되었다. 비코는 그것이 호메로스의 시대 이후에 일어났음을 증명했다. 그 오리엔트의 신들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물려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홋날 그들이 라티움으로 전파되었을 때는 그곳 신들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비코는 이와 동일한 추이가 라티움과 그리스와 아시아에서 연이어 일어났음을 입증했다.
218 비코는 자신의 강의를 함에 있어서 언제나 젊은이들의 향상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환멸에 빠지거나 그릇된 학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현학가들의 적대감을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지혜를 따르지 않는 웅변이라는 것에 대해 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웅변이란 곧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그의 강좌란 정신을 인도하여 그것을 보편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비코는 전체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것을 위해 부분들은 서로 간에 일치하면서 전체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야 했다. 그는 어떤 특정한 소재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웅변에 의해 단 한숨에 관련된 학문들로부터 생명력을 얻게 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이 그 자신의 저서 『우리 시대의 연구 방법에 관하여』에 기술했던 것의 의미였다. 가장 현저한 예를 들자면 고대인들 중에서도 플라톤과 같은 인물은 오늘날의 대학교 전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체계 속에 모든 것을 조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코는 마치 해외에서 유명한 문인이 찾아와 그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우아하고 깊이 있게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매일같이 강의했다.
219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을 했지만 실수를 저지르면 공개적으로 그것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과 경쟁을 벌이던 학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자비로운 기독교도나 참된 철학자라면 간과하거나 동정했어야 할 사상이나 학문의 과오나 잘못된 행실에도 심하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 자신이나 그의 업적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해 신랄했던 것만큼 그와 그의 저작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린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고마워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 도시[나폴리]에서 가장 선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설익고 헛배운 자들 중에서도 더 타락한 자들은 그를 바보라고 부르거나 더 공손할 경우에는 모호하거나 독특하거나 허황된 관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20 그는 이 모든 역경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에 들어간 것처럼 자신의 책상 앞으로 물러나서 스스로가 "방해자들에 대한 고귀한 복수의 행위"라고 부르곤 했던 그 밖의 저작들에 대해 명상하고 집필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새로운 학문』의 발견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가 생명과 자유와 명예를 누리면서 그 저작을 완성했을 때, 그는 파이드로스가 다음의 훌륭한 구절을 지어주었던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명예를 얻기 위해 그의 죽음을 피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재가 되어버린다 해도 오명을 감수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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