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희: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 10점
김선희 지음/모시는사람들

1장 서학과 중국 그리고 조선
2장 예수회의 중국 진출과 서학의 형성
3장 서학의 조선 유입과 조선 지식장의 변용
4장 서학을 향한 성호의 지적 도전
5장 서학과 성호학파의 분기
6장 서학의 내파: 이벽과 정약용의 서학 연구
7장 서학과 새로운 격물의 지향
8장 척사의 시대: 서학에서 천주학으로
9장 박학의 시대: 서양의 체험과 지식의 변화
10장 다시 조선, 유학 그리고 서학

 


10장 다시 조선, 유학 그리고 서학

273 조선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지적 분화와 함께 들어온 수많은 서학서들은 18-19세기 조선 지식장을 입체화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서학은 조선 후기의 지적 상황을 조망하는 하나의 창이자, 내부의 변화를 촉발시킨 하나의 변수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지만 마테오 리치는 유럽의 학문적 우수성을 보여주고 신의 질서가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지도, 천문학, 수학 등의 지적 자원과 자명종, 대포, 악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배운 모든 지적 체계를 동원한다. 이에 대한 중국과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종교적, 이론적 관심을 넘어서 이들이 보유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통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과 같은 중국인 입교자들뿐 아니라 이벽, 정약용, 정약종 등 조선 유학자들 역시 유학자로서의 신념을 훼손하지 않고도 서학을 주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까닭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들에게는 원죄를 가진 영혼의 죄의식이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 이들이 보여준 서학에 대한 관심은 근원적인 죄의식이나 종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시대의 교착을 뚫을 새로운 도덕적 지도 이념과 사회 경영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자기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는 강력한 신앙의 그림자를 발견하려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들은 왜 외래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받아들였으며, 사회에 소통시키고자 하였는가? 어떻게 전통과의 대결이나 내면적 손상없이 외래의 사유를 수용하는가?

이에 대한 가능한 답변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종교로서의 기독교 혹은 르네상스 자연학이 아니라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하나의 지적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변용하거나 내면화한 것은 서양의 종교와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회에 의해 중국의 사유와 개념으로 걸러진, 다시 말해 유학적 용어와 개념을 통해 절충되고 변용된 '서학(西學)'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학, 즉 동아시아에서 서양을 통해 촉발된 근대 지식은 독단적이고 독립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거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유학·성리학 등 고유한 체계와 가치와 이념이 이미 작동하고 있던 지식장에 들어온 외래 사유는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기존의 맥락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력과 가치를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서학의 스펙트럼은 본래의 경로를 벗어나 중국과 조선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물론 조선에 파장을 일으킨 동아시아를 향한 예수회의 지적 도전이 몇 세기에 걸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파장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를 단순히 '발전된 서양 지식'이라고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세 유럽의 신학, 철학 혹은 르네상스 자연학 그 자체가 아니라 동아시아 고유의 개념으로 변용된 지식과 정보를 자신들의 이론 체계 위에 세부적으로 수용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발전시켜 오던 형이상학과 인간론,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체계 위에,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로 서양의 지식을 보강하고자 했다. 따라서 서양 지식의 유입은 타자로부터의 일방적 계도나 주입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의 형질 변화에 가깝다. 중국과 조선인들은 외래의 지적 자원을 통한 자극을 자신들의 전통에 다면적으로 적용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자기 이론의 틀을 돌파하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논리의 혼란을 겪으며 변화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단순히 서양 학술을 학습한 학습자나 모방자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전제가 있다. 서학이 동아시아에 유입되고 조선 지식인들 이후부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과 정통을 파괴할 위험성을 경험하던 시기에 조선 사회가 나름의 독자적 발전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이러한 인식은 '근대성'이라는 말에 막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우리가 서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특정한 '근대성'을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세운다면 조선 후기에 이루어지고 있던 독자적 발전의 경로는 그저 폐쇄와 정체로 보이기 쉬울 것이다. '근대성'을 검사의 지표로 사용하는 한 조선은 언제나 실패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서구 근대를 '진보된 것', '발전된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조선은 영원히 '정체된 것', '낡은 것'으로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에 서학이 등장한 시기는 청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와 극복과 동시에 조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중의 과업이 주어진 시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에 하나의 변수로 등장한 서학을 통해 조선인들은 중국과 대등한 강력한 문명이자, 중국을 능가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보유한 위협적인 타자에 대한 경험을 촉발시켰다. 이 낯선 경험 속에서 어떤 이들은 중국을 상대화하며 조선의 가능성을 최대로 확장한 반면, 어떤 이들은 중국의 그늘아래서 온건한 방식으로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을 택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전통적 세계관에 서학의 지식 체계들을 겹쳐 읽어 현실에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전환해 인간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했던 월경자들이며 생산적 지식인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도전을 서양 지식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했는가, 혹은 서구적 근대성에 얼마나 가까운가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좁은 관점일 것이다.

[…]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회의 중국 전교는 사실 관계의 추적과 평가가 거의 끝난 영역에 속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학문적, 사상적 논점들은 여전히 문제가 생산되고 있는 문제적 영역이다. 이는 두 세계의 충돌과 교류, 영향 관계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세계의 사상적 조우 안에 내재하는 철학적 문제의식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세계의 조우와 갈등, 조화의 노력은 언제나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개방적 사상 공간을 형성한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지적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어렵고 벗어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언어와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한 결코 완전히 새로운 이식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문으로 저작된 서학서들 역시 결코 예수회들이 기대한만큼의 이론적 투명성을 지닐 수 없다. 이런 관점은 전달과 수용이라는 단순한 구분법을 넘어서 유학이라는 지적 전통 안에서 외래의 인자를 수용하고 변용할 근거와 토대를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사유의 내용은 낯설지라도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기 언어와 개념, 자기 경전의 구절들을 통해 낯선 사유들을 접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론적 타당성을 규명하거나 이들의 선언에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

동양과 서양이 만났던 시대가 그려 내는 그림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형상을 띤다. 어차피 각각의 문화적 자연적 조건이 만들고 성장시켜 온 세계관의 산물들을 상대에게 이해시킨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일종의 관념적인 전쟁일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서양의 만남을 학문적 엄밀성이나 정합성의 차원이 아니라 심층적 의식과 학문적 신념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강렬한 신념과 동기는 정오 판단, 시비 판단, 결과론적 평가에 담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서학을 만난 조선 지식인들의 신념과 동기에 접근하는 하나의 조망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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