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41 / 제24강(1)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24강(1)

❧ 콩도르세
“낙관적 진보를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망에 들뜬 콩도르세는 역사 속에서 실현할 ‘완전한 인간’에 관한 계획서를 작성한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

 

 

2021.12.11 역사 고전 강의 — 41

⟪역사 고전 강의⟫ 제24강, 콩도르세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에 관한 설명을 읽겠다. 콩도르세의 이 책은 물론 고전텍스트이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책들은 꼼꼼하지 읽지 않는 것 같다. 예전에 강의할 때는 어떤 의도로 집어넣었는지 지금은 희미하지만 적어도 진보와 계몽 이런 것에 관해 다룰 때는 콩도르세 이 책정도는 꼭 짚고 넘어가야봐야 할 책이다. 책도 얇고 그리고 근대의 텍스트들은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굉장히 난해한 독일 철학자들의 책이 아니면 쓱쓱 읽을 수 있다. 《역사 고전 강의》에서 설명한 부분들만 익히고, 그리고 제 설명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글쓰는 것과 같은 스타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중요한 개념들만 익히면 원전을 읽어나가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다. 꼭 읽어보기를 권유한다. 이를테면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고대의 표상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내가 이런 것을 읽어서 뭘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콩도르세의 책, 베이컨의 《신기관》 이런 책만 해도 읽기가 어렵지 않다. 미셸 푸코라는 학자가 16,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전과 그 이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인식론적 단절이 개입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원이 근대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때부터 나온 책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읽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콩도르세의 이 책은 꼭 한 번 정도는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으니 그냥 현대의 여러가지 과학기술이나 이런 것을 다룬 책들을 읽겠다, 그게 더 낫지 않느냐, 흔히 하는 말로 독서의 가성비를 추구하는데 그게 더 낫지 않느냐, 독서에는 가성비가 없다. 옛날 책이든 오늘날의 책이든 독서는 고통스러운 것인지 쉽게 읽을 수 있을 수 있다해서 오늘날의 책이 더 잘된 것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남들이 좋은 책이다 하는 것은 읽어야 한다.

발문의 세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낙관적 진보를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낙관적 진보라는 것이 막연하다면 그것을 계몽철학자philosophe들은 인간의 완전가능성이라고 하는 말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인간이 장기이식을 한다. 장기이식을 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다.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건강한 사람들이야 이 육신을 갖고 오래 살고 싶다고 하겠지만 건강과 같은 추상적인 그런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실현되어야 진짜로 건강인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저기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영원히 알 수도 없고 무엇이 건강인지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럼 점에서 보면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말하는 들은 꽤나 환상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쓴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2~3세기 사막에 들어가서 은둔하면서 수도하는 사람들, 은수사, 운둔수도사라고 불리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꿈꾸었다. 신과 자신이 하나과 되면. 그런데 그 사람들의 생각에는 인간이 완전해지는 방법은 딱 하나다. 사막에 가서 모든 주변의 것을 물리치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을 영위하면서 탑 같은데 올라가서 도를 닦고 그랬다고 한다. 그 사람들도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콩도르세와 같이 계몽시대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할 때 그들은 계몽주의자들이니까 반종교주의이다. 신적인 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완전가능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었다. 즉 고대의 이상으로 여겼던 것들이 이 시대에 오면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아도 헛소리로 치부되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은둔수도사들과 다르게 현실 세계 속에서 이것을 실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게 된다. 그게 바로 "역사 속에서 실현할 ‘완전한 인간’에 관한 계획서"가 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실현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건과 수단들을 통해서이다. 그런 수단들이 무엇이겠는가. 과학의 발전과 의학의 발전이겠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 더 좋게 만들고 또는 그 사회 속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을 발전시키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철이 없는 게 아니다. 이 사람들이 오히려 철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오랜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뿐만 아니라 문명의 전재 속에서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한 사람의 어떤 완전한 인간이 되려고 한다고 하면 글쎄 깊은 산 중에 들어가서 뭐를 해서 되겠는가. 사회를 떠나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자연, 사막에 홀로 가려고 해도 그 사막에 있는 나라에 입국하려면 여권을 가지고 가야 한다. 사회를 떠나 뭔가를 할 수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회를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인가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실현할 완전한 인간에 관한 계획서를 작성해야지 사회 기생충처럼 붙어 살면서 자기네 뭔가를 따로 해보겠다 하는 것은 계몽주의자들 보다도 철이 없는 것이다. 콩도르세가 1743년에서 1794년, 18세기에 살았던 인간보다도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황당한 것이다. 온갖 문명의 이기는 다 이용하면서 문명을 거부하는 것. 인간은 역사 속에 사는 역사적 인간이다. 그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사회를 잘 만들어서 완전가능성까지는 아니어도 완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은 내가 사는 사회와 문명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는데 힘을 쏟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24강 292 낙관적 진보를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갈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망에 들뜬 콩도르세는 역사 속에서 실현할 ‘완전한 인간’에 관한 계획서를 작성한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집약한 역사철학책입니다." 시대정신을 집약했으니 중요하다.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얇지만 딱 한마디로 되어 있는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제목부터 그러하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정신을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키는데 그것을 신학적 개요도 초역사적 개요도 아닌 역사적 개요이다. 역사 안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개요니까 계획서이다. 이것만큼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잘 집약한 책이 없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소재가 무엇인가. 자연이다. 계몽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293페이지의 인용문에 나온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 조건이 딱 붙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이때만 해도 170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무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진보를 실현하는 또는 실현해서 인간이 완전해질 것이다라는 계몽주의 기획의 출발점은, 이들에게 숨겨진 제일전제는, 이들이 안심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그 출발점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 즉 지구라고 하는 이 자원이 그냥 지구가 있는 한은 지구라는 자원은 우리에게 아무런 한계도 없이 자원을 제공할 것이다 라는 것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이 때만 해도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졌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히 18세기 계몽주의의 후예들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뭐가 잘못되었을까.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것이 잘못되었을까, 또는 프랑스에서 나온 것이 잘못되었을까. 온갖 추측과 추론을 펼쳐보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라는 이 말이 잘못된 것이다. 10년 전에 역사고전강의를 할 때는 이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 해설녹음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읽어보니까 그때 이것을 몰랐구나, 이것이 가지고 있는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2011년에 이것을 강의해서 책을 냈으니까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기후가 심각한 위기구나, 이렇게 지구온난화 이런 것들이 심각한 문제구나 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면 불과 10년 만에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얼마나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지금 굉장히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다.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1700년대의 콩도르세가 오늘날 다시 살아돌아온다면 뭐라고 말할까. 당신이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전제했던 자연의 무한정, 지구의 무한계 이것이 지금 위협받고 있다. 당신은 진보에 관한 어떤 개요를 다시 쓸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볼 수 있겠다. 바로 이렇게 물어보기 위해서, 이게 역사적 사유이다. 18세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는 이렇구나. 그러면 우리가 사유하는 맥락, 즉 사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달라졌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적 사유이다. 연대를 외우는 것이 역사적 사유가 아니라 과거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어떻게 생각을 펼쳐보였는가를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오늘날에 비추어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1743년이면 지금으로부터 불과 250년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250년 후에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어떻게 간주될 것인가. 문명의 이기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우리의 삶을 아주 처절하게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제24강 292 이제부터 읽을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1743~1794)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1795)는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집약한 역사철학책입니다.

제24강 293 자연이 우리에게 준 이 지구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을 것이다. _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