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46 / 제30강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1. 12. 29.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30강
“19세기에 만개한 근대화는 수많은 찬양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이윤 추구가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다스리는 처방전이 되리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훌륭한’ 정신인 것이다. 이 자신감은 20세기에 이르도록, 아니 지금까지도 소멸되지 않는다.”
2021.12.28 역사 고전 강의 — 46
오늘은 제30강을 읽는다. 30강에 있는 내용은 《책 읽기의 끝과 시작》에서 '온화한 상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서평의 내용이다. 일반 발문을 읽어보면 "19세기에 만개한 근대화는 수많은 찬양자를 거느리고 있다." 목적론적 근대라고 한다. 이것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윤 추구가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다스리는 처방전이 되리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그게 바로 '온화한 상업'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훌륭한’ 정신인 것이다. 이 자신감은 20세기에 이르도록, 아니 지금까지도 소멸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탐욕에 의해서 그 정신이 훌륭한 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가는 왜 사악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사악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사악한 짓을 하면 못하게 막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게 제도주의적인 접근이다.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써놓았는데 사실 제도적인 접근을 더 선호하는 편이어서 그들의 내면세계가 궁금하지 않다. 사악한 짓을 하면 교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국가가 마련하는 것, 그게 본인이 가진 생각이다. 《앨버트 허시먼》 평전을 북리스트에서 소개했다.
지난번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저자특강에서 "오늘날에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무의미하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나 이런 것들의 구분도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현재는 이념적 공백상태이다"라고 했던 얘기에 대해서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는 질문이 있었다. 문의한 분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은 사회주의적인 상상력, 사실 상상력이라는 표현보다도 사회주의적 처방, 또는 지향점을 실천하는 일이 훨씬 더 정확하지 않나 한다. 상상력이라는 말은 '좌파적 상상력' 이런 말들을 많이 쓰니까 그렇게 쓴 것으로 짐작되는데 상상력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이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뭔가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들어가버리는 은연 중에 내비칠 수 있다. 그래서 상상력이라는 말을 그렇게,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변증법적 상상력》이 있다. 변증법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프랑크푸르트학파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 벌써 dialectical imagination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상상력은 풍부했는데 현실적으로 사회비판이론이고 사회현실을 변혁하려는 이론인데 이뤄 놓은 것은 없다는 것을 의연 중에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왜 우리 사회의 건강보험 이런 것들은 다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인데 상상력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않다. 어쨌든 용어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각설하고 그분의 질문이 있었다. 좌파와 우파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사회주의적 처방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념의 공백상태라고 생각하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면, 제30강에 있는 내용과 관련이 되어 있다. 30강의 내용은 간단하게 집약해보면 금전을 추구하는 이윤 추구 행위들이 사람들에게 있었던 폭력적인 성향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없애는데 도움이 된다. 이거는 자본자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임금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임금노동자나 자본가나 인간은 모두 금전욕이나 권력욕이나 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3대죄악 중 하나인 색욕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없애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인데 지금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존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데이비드 흄의 《정치적 담론》에 실린 <상업에 대하여>, 데이비드 흄의 《정치적 담론Political Discourses》는 굉장히 좋은 글들의 묶음인데, 그 다음에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이런 책들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폭력적 성향은 이윤 추구를 통하여 순화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있다. 이런 생각의 가장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이 자유주의이다. 그렇게 해서 개개인을 순화시키면 그 순화된 개개인이 모여있는 사회는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반대해서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이다. 거기까지는 틀린 얘기가 아니다.
제30강 353 19세기에 만개한 근대화는 수많은 찬양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이윤 추구가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다스리는 처방전이 되리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훌륭한’ 정신인 것이다. 이 자신감은 20세기에 이르도록, 아니 지금까지도 소멸되지 않는다.
제30강 358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가는 왜 사악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양의 중세사회는 귀족연합체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정체에서는 귀족들이 발급한, 발급은 아니겠지만, 나는 어디 사람 누구입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보증하는 것은 자기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또는 어떤 영주님의 농도다 이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어디서 보장하는가, 국가에서 보증한다. 그런데 그렇 경우에는 영주님이 보증해주는 것이니까 그것을 보증해주는 사람을 주권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켄트의 백작, 랭커스터의 백작도 주권체, 이런 여러 개의 주권체가 겹쳐진다. 다시말해서 잉글랜드 국왕의 신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켄트의 백자의 기사이기도 하면서 자기도 누군가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뭐 이기도 하면서 이렇게 자기를, 어떤 한 개인에게 포개져 있는 주권체가 굉장히 여러개라는 말이다. 그런 귀족 연합 정체 상태를 벗어나서 절대왕정 국가가 성립한다. 토마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 표지를 보면 왕이 있고 그 왕의 몸뚱아리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뭐냐면 왕과 각각의 개인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그런 주권체를 홉스가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면 홉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귀족들에게는 굉장히, 그 사람은 평생의 귀족의 비서 노릇으로 평생을 먹고 살았는데, 등에 칼을 꽂은 셈이다.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러니까 절대왕정 국가가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얘기가 가능하다. 그러면서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바로 명예혁명이다. 명예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사람이 존 로크이다. 그런 사람들은 귀족들도 아 이제 세상이 달라졌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그게 바로 자연권 이론이고 그런 권리는 왕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면서 그것을 자연법, 그래서 자연권, 자연법 이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연권, 자연법 이론이 존 로크라든가 잉글랜드에서 개발되고 토마스 홉스는 자연권 이론의 출발점이다. 아주 중요하다. 거기에 이제 스코틀랜드 지역의 계몽주의자들이 결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귀족도 아닌데 바로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 아담 퍼거슨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이른바 중간 계급의 이론, 그런 사람들이 전형적인 의미에서 부르주아이다. 그것이 결합하면서 성립한 것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자유주의 liberalism이다. 그런 고전적인 의미에서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각각의 개인이 의사선택의 주인이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실체적인 힘이고 그것을 억압하는 국가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들에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필요한가. 우리들의 자유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국가가 필요하다. 그게 그 사람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잘 기억해 두어야 한다. 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한사람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결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로 합리적이다. 그러니 국가가 개입하면 안된다. 그게 자유주의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부르주아이다. 자본가 계급으로 나아가면서 노동자 계급을 수탈하고 착취해도 별 문제가 없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왜 저 사람과 나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저 사람도 개인, 나도 개인, 개인 대 개인 아닌가. 그게 바로 자유주의에 근거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작동방식이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모두 다 귀족만이 아니라 또는 재산권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재산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게 바로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천부인권이다. 그게 등장하면서 이른바 민중 민주주의, 즉 대중적인 민주정, 민주정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잉글랜드 사회, 스코틀랜드 사회는 아직도 귀족정적인 요소가 많이 있고 로크가 말했던 자유주의가 아주 관철되어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강력하게 관철되었다. 그것을 다 없애버린 사람이 마가렛 대처이다. 그런데 미국 사회는 여전히 그게 있다. 국가가 나서서 하면 안된다. 그리고 지금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리버럴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국가가 나서서 뭔가를 하면 안된다고 얘기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착취와 수탈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사회주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그냥 위원회 committee에 불과하다. 그게 사회주의의 이론이다. 그런데 사실 기득권 세력 또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세력을 깨뜨리고 그들로부터 어떤 그 사악한 마음을 없애려면, 처음에 말한 것처럼 방지하고 또는 더 이상 사악함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려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 사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가 사회주의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같은 그런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서서 국가가 뭔가를 했을 때 개판을 쳐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제 현대의 사회주의적인 상상력을 가진 분들은 국가를 불신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국가는 자본가의 앞잡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이 반국가적인 생각을 한다. 나라가 뭔가를 나서서 한다고 하면 그래봤자 자본가들을 위한 것 아니냐. 그러면 어떻게 하겠나.
그러니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다 개인의 자유가 이론적으로는 극도로 중요하다. 그리고 국가는 비실체적인 힘이다 라는 이론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둘 다 근대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서 당장 우리가 지금 2021년에서 2022년으로 넘어가는 펜데믹 상화에서 국가가 나서서 건강보험 관리하고 동선추적하고 백신을 놔주고 하지 않으면 노동자도 죽고 자본가도 죽는다. 그러니까 국가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 인정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이론이 가지고 있었던 반국가적 경향성 그리고 부르주아의 위원회로서의 국가는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는 굉장히 강력해야 한다. 국가는 굉장히 강력한 리바이어던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국민들에게 충분히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게 그러니까 어중간한 모순점에 서있는 것이다. 통제를 받는 국가, 즉 족쇄를 찬 리바이어던, 이게 바로 《좁은 회랑》이라는 책에서 주장된 바이다. 이것을 생각해야 하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파건 전통적인 의미에서 우파건 간에 문제는 뭐다, 국가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선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 인민의 통제를 받은 국가는 선한 국가일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우파는 국가가 자기네들의 무한한 이윤 추구 행위를 통제하니까 경멸하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파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국가는 그냥 자본가의 앞잡이일 뿐이라고 국가를 무시하고 그러면 결국 자본가들을 타도하기 위해서 좌파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무장봉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 국가를 불신하는 상황에서는 좌파의 이념이든 우파의 이념이든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론적인 토대를 무너뜨리고 또는 폐기하고 선한 국가, 족쇄를 찬 리바이어던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궁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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