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25) #Steiner 46쪽

 

2022.03.14 가르침과 배움(25) #Steiner

46 무지의 고백을 통해 가르치는 것, 현실적 지혜(칸트의 실천이성 praktischer Vernunft)를 전달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궤변인가?
28 Is there a fundamental sophistry in a profession of ignorance generating the teaching, the imparting of practical wisdom(Kant's praktischer Vernunft)? 
♧ 지난 번에 이은 칸트의 실천이성에 대한 설명. 칸트의 실천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는 선악의 구별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선악의 구별을 추구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 칸트의 실천이성이 나온 것이 "선악의 구별을 끈질기게 추구한다."과 연결시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칸트의 실천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선한 일을 한다, 도덕적 행위를 한다 하는 것은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따져 물어서 그것들을 바탕으로 '아 이게 착한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구나', '착한 일은 이러이러하게 해야하는구나' 계산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런 저런 것을 따지지 않고 앞뒤 돌아볼 것 없이 그냥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정언명령이다, 조건 달 것 없이 명령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조건을 달지 않고 도덕적 행위를 할 것을 명령하는 것 그게 바로 실천이성이라고 했다. 설천이성이라는 것은 이성이라는 것이 붙어있지만 순수이론이성과 다르다. 순수이론이성의 영역을 그것의 기능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론비판》인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순수이론이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고, 실천이성은 순수실천이성이다.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게 말하자면 선악의 구별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실 실천이성은 끈질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추구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실천이다. 그러니 그것을 전수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냥 한번에 보고 배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46 지식의 부인은 현명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29 A negation of knowledge can be interpreted as sagacity. 
♠ (합리적인 계산이 가능한 /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한) 지식을 부정하는 것은 단박에 깨우치는 지적인 직관, 직관적 현명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여기서 지식은 앞뒤를 재보는 것을 말한다. 그 앞에 실천적 지혜 phronēsis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실천적 지혜를 phronēsis라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지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를 앞뒤를 따져보고 궁극적인 목적과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행위 또는 수단 이런 것을 궁리하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실천적 지혜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phronēsis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 sagacity: 단박에 깨우친 지혜를 가리킨다. 

46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회의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절대적 상대주의도 아니다.
♧ 절대선, 그 어떤 것도 상대할 수 없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영역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다.

46 그는 선악의 구별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 완벽하게 잘 아는 것.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것. 

46 소크라테스는 특정 소피스트 궤변가들과 달리, 자신이 완벽하게 잘 아는 것eu oida을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29 Socrates, unlike certain Sophist acrobats, refuses to put forward what he perfectly well knows━eu oida━to be evil. 
♠ 그는 아주 잘안다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 문장의 의미.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특정 소피스트 궤변가들은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완벽하게 잘안다.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을 알고 있다.

47 영혼의 평정eudaimonia이라는 이상 자체가 도덕적 엄정함, 타인과 자신에 대한 공정함이라는 강력한 직관에 토대하고 있다.
29 The whole ideal of the soul's equilibrium, eudaimonia, is founded on a compelling intuition of moral rectitude, of justice towards others and oneself. 
♠ 정신의 균형(영혼의 좋음)이라는 이상 자체가 도덕적 엄정함, 타인과 자신에 대한 올바름이라는 압박하는 직관에 토대하고 있다.
♧ eudaimonia: 스타이너가 soul's equilibrium로 쓴 것은 문제가 있다.  eu가 '좋은', daimonia는 '혼'. soul 보다는 spirit이다. soul은 육체와 붙어있는/관련되어 있는 것. spirit은 soul and body와 관련있으면서도 전체를 통괄하는, '정신'이라고 옮기는 것. 소크라테스에서 daimonia는 헬라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혼과는 의미가 다르다. 굉장히 추상화되고도, 인간에 내재해있으면서도 초월적인, 일종의 신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신. 대개 영어로 옮길 때 psychē를 soul로 옮기고, daimonia는 영어로 옮기기 어려운 단어. '영혼의 평정'이라기보다는 '정신의 균형'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겠다.
♧ justice: 올바름. 공정함이라는 것은 도덕적/윤리적인 태도와 관련이 없다. 사람이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서로가 불만이 없게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행위가 공정함이라고 할 수 있다.

47 플라톤의 미덕 전문가 옹호는 소크라테스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Plato's advocacy of experts in virtue is not, I conjecture, Socratic. 
♠ 연마를 통해서 도덕적 탁월함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옹호는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아니다.
♧ experts in virtue: experts는 기술을 연마해서 수준급에 오른 것을 가리킨다. 선에 대한 것은 기술을 연마해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관적으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돈오점수라고 할 때의 頓悟. 덕/도덕에 있어서, 연마를 통해서 도덕적 탁월함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 플라톤의 옹호. 플라톤은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47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가르침은 모범을 통한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모범적이다.
29 For Socrates, true teaching is by example. It is literally, exemplary. 

47 정의하기 매우 곤란하지만, 소크라테스와 변증법적 대화를 나누는 일, 그를 경험하는 일(불분명한 표현이다)은 성찰하는, 그래서 올바른 삶을 실행하는 것이다.
29 In ways very difficult to define, a dialectical exchange with Socrates, an experiencing of him(an opaque phrasing) enacts the examined, hence just life. 
♠ 정의하기 매우 곤란하지만, 소크라테스와 변증법적으로 교류하는 일, 그를 경험함으로써 캐묻는 그에 따라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 a dialectical exchange: 변증법적 교류. 소크라테스와 말을 주고받는 것 가지고는 안된다. 소크라테스에게 배우려면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보고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 그게 exchange 안에 포함된다.
♧ 《변론》: 캐묻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unexamined life is no life. ekstasis는 unexamined로 번역된다.

47 소크라테스적인 도덕적 유도는 '앞을 가리켜 보이는' 행위다.
29 A Socratic moral elicitation is an act of "pointing towards." 
♠ 소크라테스적인 도덕적 유도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알려주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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