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상)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10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제1부
009 찌는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 질 무렵, S 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듯한 모습으로 K 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다행히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작은 방은 높은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벽장 같은 곳이었다. 여주인은 그보다 한 층 아래에 있는 독립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그는 그녀로부터 식사와 하녀를 제공받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은 거리로 나갈 때마다 항상 계단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여주인의 부엌 옆을 지나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적인 두려움을 느꼈는데, 이로 인해 부끄러워하며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방세가 밀려 있었기 때문에 여주인과 만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는 본래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의 성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긴장과 초조 상태에 있는 우울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여주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릴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가난에 찌들어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절박한 사정에 대해 괴로위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일상생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또 쓰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여주인이 그에게 어떤 나쁜 짓을 꾸민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여주인 따위는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계단에 멈춰 서서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잔소리들 귀찮게 방세를 재촉하는 위협과 불평 따위를 듣게 되면, 이쪽에서도 뭐라고 사죄하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꽁무니를 빼야 하므로…… 그러느니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고양이처럼 계단을 빠져나와 눈에 띄지 않게 슬그머니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거리로 무사히 빠져나오자, 그는 자신이 방금 여주인과의 만남에 그토록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면서, 이토록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다니!>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음…… 그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다. 다만 겁이 나서 사람들은 모든 일을 망치는 것이다…… 이건 명제와 다름없지.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자신의 새로운 말, 이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너무 중얼대는구나. 이렇게 말만 너무 많이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니까 지껄이기만 하는 거다.」 이렇게 지껄이는 버릇이 생긴 것은 최근 한 달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누워서…… 있을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걷고 있는 걸까? 정말 난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진정 그 일은 진지한 것일까? 전혀 진지한 일이 아니다. 이건 망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장난이다!〉

제2부
165 그렇게 그는 꽤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언뜻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는 벌써 밤이 깊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벌써 바깥이 대낮처럼 환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조금 전의 멍한 상태로 인해 온몸이 아직 굳어 있던 그는 소파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거리에서는 무섭도록 절망적인 비명 소리가 날아들어와 그의 고막을 찢을듯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일 밤 2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그의 창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바로 그 소리가 지금도 그를 잠에서 깨웠다. 〈아! 어느새 주정꾼들이 술집에서 나올 시간이로군.〉 그는 생각했다 〈2시가 지났어.〉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소파에서 밀쳐 내기라도한듯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벌써 2시가 지나다니!> 그는 소파 위에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모든 일이 생각났다! 갑자기 순식간에 모든 기억이 생생해졌던 것이다! 처음 얼마동안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무서운 한기가 그를 엄습했다. 이 오한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잠자고 있을 때 오르기 시작한 열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한이 지독하게 심해져,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온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집 안은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그는 깜짝놀라서 자신의 몸과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의 빗장도 지르지 않고, 옷도 벗지 않았을뿐더러 모자도 쓴 채로 소파에 쓰러져 버렸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모자는 바닥에 떨어져 베개와 나란히 뒹굴고 있었다. 〈만일 누가 들어왔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취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는 창가로 달려갔다. 방안은 충분히 밝았기 때문에, 옷에 핏자국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여긴 그는 황급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살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옷을 입은 채로는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열로 인해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옷을 죄다 벗고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다 뒤집어 보았다. 그래도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세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핏자국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진 바짓부리에 갈색으로 변한 핏자국이 엉겨 있는게 보였다. 그는 접칼을 꺼내서 그 부분을 잘라냈다. 그 밖에 더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문득 지갑과 노파의 궤에서 훔친 물건들이 아직 그의 주머니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는 지금까지도 물건들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옷을 살펴보고 있는 지금도 그 생각을 못 하다니! 이게 어찌 된 셈인가? 그는 순식간에 물건들을 꺼내서 책상위에 던져 놓기 시작했다.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 놓은 다음에도, 그는 아직 물건이 더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모조리 뒤집어 보았다. 그런 뒤 그는 물건 뭉텅이들을 방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방 안 제일 구석 아래쪽에는 벽에서 들뜬 벽지가 찢어져 있었다. 그는 즉시 벽지 뒤에 난 구멍 속으로 물건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들어갔군! 눈에 띄는 건 없어, 지갑도!〉 그는 일어서서 구석의 불룩 튀어나온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공포에 질려 온몸을 부르르 떨고야 말았다. 〈맙소사!〉 그는 절망에 빠져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정말 이게 숨긴 걸까? 이렇게 숨기는 경우도 있을까?〉 

사실 그는 물건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돈만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물건을 숨겨 둘 장소를 마련해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금 난 뭘 그렇게 기뻐한단 말인가?〉 그는 생각했다. 

 


제3부
357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라주미힌이 어머니와 동생에게 열성적으로 퍼부어 대는 두서 없는 위로의 말들을 그만두게 하려고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두냐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잠시 동안 말없이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그의 시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선에는 고뇌에 가까운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었으며, 무언가 광기 같은 것이 응집되어 있는 것 같았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새파랗게 질린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의 손은 오빠의 손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이 사람과 함께」 그는 띄엄띄엄 말하며, 라주미힌을 가리켰다. 「내일 보지요, 내일, 모두…… 오신 지는 오래되었어요?」
「저녁에 도착했단다, 로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대답하기기 시작했다.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하지만 로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을 떠나지 않으련다! 여기 네 곁에서 잘테다……」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그는 성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제가 로다. 곁에 남겠습니다!」 라주미힌이 외쳤다. 「한시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저의 집에 있는 손님들은 상관없습니다. 엄청나게 화를 내겠지만, 그러라고 하지요, 뭐! 그곳에는 삼촌께서 대표로 계시니까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다시 라주미힌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꺼내려 했지만, 라스콜니코프는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만하세요, 그만」 그는 성을 내면서 덧붙였다.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이제 됐으니까, 가세요…… 정말 참을 수가 없다니까요…,」
「가요, 엄마. 이 방에서만이라도나가요.」 놀란 두냐가 속삭였다. 「보세요, 우리가 오빠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아니, 3년 만에 만나는 건데,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단 말이냐!」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울기 시작했다.
「잠깐!」 그는 다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자꾸 내 말을 가로막으니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네요…… 루진을 보셨어요?」
「아니. 하지만 그 사람도 우리가 오늘 도착했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단다. 로댜, 그 사람이 친절하게도 오늘 너를 찾아왔었다고 하던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망설이면서 겨우 덧붙여 말했다.
「그래요…… 친절하게도 그랬죠…… 두냐, 나는 벌써 루진에게 계단으로 굴려 떨어뜨리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정말로 그를 쫓아냈다……」
「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가…… 설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놀라서 말을 하려 했으나, 두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는 뚫어지게 오빠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스타시야가 알아듣고 전할 수 있는 만큼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의혹과 기다림으로 마음 졸이다 지쳐 있었던 것이다.
「두냐」 라스콜니코프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결혼에 반대다. 그러니까 너도 만일 내일 그 사람을 만나거든,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해라. 다시는 그 상판대기를 들이밀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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