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죄와 벌(하)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10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제4부
009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조심스럽고 미심쩍은 눈으로 뜻 밖의 손님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씨라고? 이게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마침내 그는 당황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외침을 듣고도 손님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두 가지 일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첫째로는 오래전부터 당신에 대해, 매우 흥미로울 뿐 아니라 좋은 소문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직접 만나고 싶었고, 둘째로는 당신의 누이 동생,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한 가지 계획을 어쩌면 당신이 도와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만일 내가 아무런 소개도 없이 혼자서 댁의 동생을 찾아간다면, 동생은 선입견때문에 나를 마당으로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도와준다면 일이 잘될 수도 있다는 들어서·····.」
「잘못 생각하셨군요.」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말을 잘랐다.
「한가지 묻겠소이다만, 두 분은 어제 도착하셨지요?」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였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겨우 사흘 전에 도착했지요. 그런데 그 사건에 관해서라면, 로디온 로마노비치, 변명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점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실 그 사건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내가 뭐 그렇게 큰 죄를 범했다는겁니까? 편견 없이 공정하게 판단했을 때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그를 찬찬히 보고만 있었다.
「자기 집에 있는 의지할데 없는 아가씨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추잡한 제안으로 그 아가씨를 모욕했다〉는 건가요? (그래요, 내가 먼저 자진해서 그 얘기를 하지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도 인간이므로 et nihil humanum(뭔가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도 반할 수 있고, 사랑에도 빠질 수 있다 그 말입니다(물론 이건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만사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내가 악당이냐, 아니면 희생자이냐 그 점에 있겠지요. 어떻게 희생자일 수 있냐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국이나 스위스로 도망가자고 제안했을 때는, 어쩌면 나도 고귀한 감정을 품었을 수도 있고, 서로 간에 행복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성이란 정열의 노예니까 말이에요.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망쳤단 말이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는 그게 아니지요.」 라스콜니코프는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난 당신이 싫소. 당신이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무조건 싫습니다. 당신과는 전혀 알고 지내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나가시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도 만만찮구려 !」그는 아주 솔직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좀 속여 보자고 생각했는데, 아니 당신은 정말 정곡을 찔렀어요!」
「그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당신은 계속 사람을 속이려 드는군요.」

 


제5부
161 두냐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상대로 운명을 좌우하는 담판을 짓고 난 다음 날 아침,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마치 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그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 사건으로 여겼고, 이미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던 그 일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이 검은 뱀처럼 그의 심장을 밤새도록 빨아 댔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라도 밤사이에 담즙이 얼굴 전체에 퍼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흔적은보이지 않았다. 최근 들어 살이 조금 오른 뽀얗고 곱상한 자기 얼굴을 본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어쩌면 다른장소에서 보다 더 나은 색싯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어서, 잠시 위안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옆에다 침을 거칠게 내뱉고 말았다. 그의 행동은 한방에서 지내고 있는 젊은 친구, 안드레이 세묘노비치 레베자트니코프의 얼굴에서 무언의 조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것을 눈치챈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 미소를 나중에 젊은 친구와의 관계를 청산할 날을 위해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최근에 그는 이미 많은 점들을 그런 식으로 계산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만남의 결과를 안드레이 세묘노비치에게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자, 그의 증오심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화가 나면 지나칠 정도로 폭발해 버리고 마는 성질 때문에 그가 홧김에 저지른 두 번째 실수였다······. 그 결과 이날 아침에는 마치 계획된 것처럼 불쾌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법원에서도 그가 심혈을 기울이던 재판 업무의 실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화나게 했던 사람은 그가 머지않아 결혼할 것을 대비하여 세를 얻어 자기 돈으로 직접 수리를 하고 있는 아파트의 주인이었다.

 


제6부
307 라스콜니코프에게는 이상한 시기가 도래했다. 안개가 갑자기 그의 앞에 드리워져, 빠져나갈 길 없는 음울한 고독 속에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참후에 이 시기를 생각해 보니, 그 당시 그의 의식이 혼미했으며, 간헐적이긴 했지만 결정적인 파국이 올 때까지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라스콜니코프 자신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 많은 것을, 이를테면 몇 가지 사건의 시간과 날짜를 마구 혼동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적어도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나는 일들을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을 때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정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한사건을 다른 사건과 혼동하기도 했고, 어떤 사건은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사건의 결과로 생각하기도 했다. 때로는 병적이고 고통스러운 불안감이 끔찍한 공포로 변하여 그를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의 공포와는 전혀 다른, 완전한 무력감이 그를 사로잡았던 그런 순간들과 시간들 어쩌면 그런 며칠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 무력감은 죽어 가는 사람의 병적인 무관심 상태와 흡사한 것이었다. 대체로 최근 며칠 동안 그는 자신의 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것조차 피하려고 애쓰는 듯한 눈치였다. 한시바삐 해결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다. 이런 근심들에서 해방되어 도망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볼 때, 이런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을 의미했다.

 


에필로그
487 시베리아. 광활하고 황량한 강의 기슭에 러시아의 행정 중심지 중하나인 어떤 도시가 위치해 있다. 이 도시에는 요새가 있으며, 그 요새 안에는 감옥이 있다. 그 감옥에 벌써 아홉 달째 제2급 유형수인 로디온 라스콜니코프가 갇혀 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날로부터 거의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의 사건에 대한 재판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죄인은 사태를 복잡하게 하는 일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정황을 부드럽게 바꾸거나 진실을 왜곡하는 일도 없이,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도 잊지 않고 자신의 자백을 확고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히 입증해 보였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을 마지막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밝혔으며, 죽은 노파의 손에 쥐어져 있던 〈전당품(철판을 댄 나뭇조각)〉의 비밀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죽은 노파에게서 어떻게 열쇠를 꺼냈는지도 설명했고, 그 열쇠에 대해서도 묘사했으며, 궤의 모습과 그 안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자세히 증언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물건들 중에서 몇 가지도 열거해 주었다. 리자베타를 살해하게 된 의문도 풀어주었고, 코흐가 온 다음 그 뒤에 온 대학생이 문을 두드리던 장면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도 전했다. 그리고 범인인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가, 니콜라이와 드미트리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 빈 아파트에 숨었으며, 그 뒤 집으로 돌아간 일도 묘사했고, 맨 마지막으로 보즈네센스키 대로에 있는 대문 안쪽 공터의 돌도 지시해 주었다. 그리고 그 돌 아래에서는 물건들과 지갑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건은 분명해졌다. 검사와 판사들은, 한편으로는 그가 지갑 속의 돈과 물건들을 조금도 쓰지 않고 돌 아래 숨긴 사실과, 더 나아가서는 자기 손으로 훔친 물건을 다 자세히 기억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수량에서도 착각을 일으킨다는 데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지갑을 열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 속에 얼마만큼의 돈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는 사실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515 그의 베개 밑에는 복음서가 놓여 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소냐의 것으로 그녀가 그에게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 줄 때 들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유형 생활이 시작되었을때 그는 그녀가 그를 신앙으로 괴롭힐 것이고, 복음서에 대해서 말하며 그에게 책들을 강요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한 번도 그 주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고, 그에게 복음서마저 권한 적이 없었다. 병들기 직전에 그 스스로가 이 책을 부탁했기 때문에 그녀가 말없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책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지금도 책장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이 그의 뇌리를스쳤다. 〈그녀의 신념이 이제 나의 신념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그녀의 감정, 그녀의 갈망은······.>
그녀 역시 그날 종일 마음이 설레었고, 밤에는 다시 앓아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행복해서 자신의 행복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7년, 〈겨우〉 7년! 행복이 시작되고 있던 이 무렵과 또 다른 순간들마다 두 사람은 기꺼이 이 7년을 7일로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이 거저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리라는것도, 그 삶을 사기 위해서 아직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그것을 위해서는 앞으로 위대한 행적을 쌓아 보상해야 한다는 것도 미처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이야기, 한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완결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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