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법철학 1 - 서문과 서론

 

법철학 1 - 10점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강유원 옮김/사람생각

 

1. 서문

2. 서론
1) 철학적 법학
2) 의지의 개념
3) 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의 추상적 개념
4) 자유의 추상적 이념의 전개

 

역자후기

 


 

서문

   이 강요(綱要)를 출간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나의 직책상 법철학에 대해서 행하는 강의를 위한 입문서를 나의 청강자들에게 갖게 할 필요성이다. 이 교재는 철학의 이 부분에 관한 나의 강의를 위하여 언젠가 지정한 『철학집성』(Heidelberg, 1817)에 이미 포함된 것과 동일한 근본개념에 대한 확장된, 특히 더욱 체계적인 상술이다. 그러나 이 강요가 출판되어 나오고, 그에 따라 더욱 광범한 대중 앞에 등장한다는 것은 최초에는 유사하거나 어긋나는 생각들과 확장된 귀결들 그리고 강의 중에 적절한 해명을 하게 될 것들을 간략한 언급 속에서 암시하려 했던 주해를 여기서 때때로 확장하여 서술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확장은 때로는 더욱 추상적인 교재의 내용을 명료하게 하고 분명하고도 시대에서 행해지고 있는 생각들에 대해서 더욱 광범위한 개괄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라 요강의 목적과 양식에 수반되는 것보다 더 상세한 몇몇의 주해들이 생겼다. 그러나 본래적인 요강은 학의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범위를 대상으로 가지며, 요강에게 고유한 것은 아마도 약간의 보유가 더러 있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보다도 형식이 오랫동안 형성된 규칙과 방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 가지로 오랫동안 인정되고 숙지된 내용의 본질적 계기의 편성과 정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철학이 성취하는 것이 날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페넬로페의 직물과 마찬가지로 하룻밤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하므로, 철학적 강요에 대해서는 이러한 구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 강요는 우선 강요에서 주요한 것〔지도적 원리〕을 이루는 방법을 통해서 통상적인 요강과 구별된다. 그러나 여기〔이 강요〕에서는 하나의 소재에서 다른 소재로의 진전과 학적인 증명이라고 하는 철학적 방식, 〔또는〕 다른 인식방법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이러한 사변적 인식의 방식이 전제된다. 그러한 구별의 필연성에의 통찰만이 철학이 현대에 있어서 전락해 있는 부끄러운 쇠퇴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낼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오성적 인식의 규칙을 포함하는 이전의 논리학의 형식과 규칙, 〔즉〕 정의, 구분 그리고 추론의 불충분함을 사변 논리학에 있어서 인식하며, 혹은 인식하기 보다는 느끼고 있으며, 그에 이어서 심정, 공상, 우연적 직관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이러한 〔오성의〕 규칙을 다만 질곡으로서 배척한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반성과 사상(思想)의 관계가 등장해야만 하므로 우리는 무자각적으로 전혀 통상적인 귀결과 논변이라고 하는 경멸적인 방식에서 처리하고 있다. 나는 사변적 지(知)의 본성을 나의 『논리학』에서 상세하게 전개했으며, 그런 까닭에 이 강요에서는 다만 때때로 진행과 방법에 관한 해명만 덧붙이게 된다. 구체적이고 그 자체 매우 다양한 대상의 성질에 있어서는 모든 그리고 각각의 개별태에 있어서 논리적인 연속을 지시하고 강조하는 것은 물론 등한시한다. 한편으로 학적 방법과의 전제된 숙지에 있어서는 이것이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 이 저작의 전체와 그 부분의 구성도 논리적 정신에 의거한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나는 또한 특히 이러한 특면으로부터 이 논술이 파악되고 평가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논술에서 문제삼는 것은 학이며, 학에 있어서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형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가장 심원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로부터 형식은 외면적인 어떤 것이고, 사상(事象)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며, 후자〔사상〕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는 저술가, 특히 철학적 저술가의 과제는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와 올바른 개념을 전파하는 데 놓여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과제—그것이 쓸데없는 호사와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해도 확실히 사람들의 교양과 각성에 대해서는 공적이 되는 과제━가 현실적으로 행해지곤 하는가를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동일한 오래된 양배추가 여러 번 데워지고 여기저기로 나누어지는 것을 본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를 가졌으니, 그들에게 듣게 하라." 우리는 특히 거기에서 알게 되는 어조와 자부에 대해서 놀라눈 빈번한 기회를 가지거니와, 다시 말해서 〔이는〕 마치 세계에는 다만 아직 진리의 이러한 열정적 보급자가 결여되었다는 듯한, 그리고 다시 데워진 요리가 새롭고도 들어보지 못한, 특히 언제나 "오늘날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하는 듯한 진리를 가져오는 듯한 어조와 자부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진리들 중에서 한 쪽에 제공되는 것이 다른 쪽에 대해 베풀어지는 바로 그러한 진리들에 의해서 떠밀리고 씻기워지는 것을 본다. 이제 이러한 진리들의 혼잡 속에서 낡은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영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볼품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이러한 고찰들 중에서 어떻게 이것을 꺼내야 하는가, 어떻게 학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 이것이 구별되고 참임이 확증될 것인가?

[...]

세계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의 교훈에 대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그것〔교훈〕에 대해서 철학은 애당초 언제나 너무 늦다. 세계의 사상으로서 철학은 현실이 자신의 형성과정을 완성하고 그 자신을 완성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에로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을 필연적으로 마찬가지로 역사도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것은 바로〕 현실성의 성숙 가운데에 비로소 관념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대립해서 현상하고, 전자는 후자의 세계를 그 세계의 실재에 있어서 포착하고, 하나의 지적인 왕국의 형태에 세운다는 것이다.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 

   어쨌든 이 서문을 마쳐야 할 때이다. 서문으로서는 애당초 그것이 전제하는 저술의 입장에 대해서 외면적이고 주관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다. 어떤 내용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언급해야 한다면 그 내용은 다만 학적 객관적 취급만을 견디어 내며, 또한 분명히 저자에게 사상 자체의 학적인 논구와는 다른 종류의 반론은 다만 주관적인 후기와 자의적인 단언으로 간주되며, 저자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1820년 6월 25일 베를린




역자 후기

   이 책은 헤겔의 『법철학』의 「서문」과 「서론」을 번역하고 약간의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대본은 일러두기에 적은 바와 같다. 번역에 있어서는 영역본과 일역본을 참고하였으나 섣부른 의역은 피하고 가급적 원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헤겔은 『법철학』이 "논리적 정신에 의거"하여 "파악되고 평가"되기를 기대하였으나, 과연 그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저작은, 그 동안 어떤 정치적 처지가 근거하고 있었다 해도, 고전임에 틀림없으며 그런 까닭에 여전히 읽기를 통해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석윤 선생님께서 이해의 핵심을 덧붙여, 한자한자 짚어가며 『법철학』을 읽히신 건 꽤 오래 전 일이었다. 아둔한 머리로 제대로 읽지 못했던 탓에 다시 읽는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앞으로 1부, 2부, 3부에 대해서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며, 비판과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1999년 9월
강 유 원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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