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45) #Steiner 66쪽

 

2022.06.10 가르침과 배움(45) #Steiner

66 기호의 경이, 표시하고 전달하는 그 능력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요한복음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로고스━으로 이어진다.
44 The wonder of signs, of their capacity to signify and transmit, relates immediately to the living Word, to the Logos that is the Johannine Christ. 

66 우리는 문법과 그라마톨로지로부터 철학적 신학으로 나아갔다.
44 From grammar and grammatology, we have proceeded to philosophic theology. 
♧ grammar 문법, grammatology 문법론, 문법에 관한 이론
♧ 문법, 문법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언어/기호를 분석했는데, 철학적 신학으로 나아가려면 언어 자체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뭔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언어를 단순하 기호가 아니라 그 언어가 신의 기호다 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철학적 신학이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사려깊은'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고, 신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언어를 만들어주었다는 뜻이다.

67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는 '몸짓 언어sign language'라고 해도 무방하다.
44 It is fair to say that for Augustine language is indeed "sign language."
♧ 단순히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차용한/가져온 기호에 불과하다면 '기호 언어'라고 해도 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어 자체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단순한 기호라도 하면 유명론이다. 단순히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을 그 언어가 대상의 실체를 담고 있다고 하면 신학이 된다. 그래서 '실체를 담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품고 있다.

67 비트겐슈타인은 나중에 아우구스티누스에 근거해서 지시적 정의의 모델을 제시한다.
44 Wittgenstein will have recourse to Augustine when he puts forward his model of ostensible definition.
♧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지시적 정의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모형에 근거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sign language는 타당하지 않다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sign language 모형을 자기 사유의 재료로 삼은 것은 맞다. 

67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지시self-reference', 해석의 무한 순환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가리키는 기호quae tamen cum etiam ipsa signum sit의 역설을 잘 알았다.
♧ 자기지시 self-reference, 신라고 하는 존재가 언어의 궁극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언어의 원천을 따져서 올라가면 신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모든 언어가 자기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결국 언어의 뜻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을 봐라,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표상하는 기호를 봐라, 그러면 대상과 언어 사이의 일치점이라고 하는 것, 또는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버리는데, 그러면 외부에서 그 언어와 대상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다. 결국 대상이 어떤 자신의 실체성을 그대로 언어로 표상했다고 말해버리면 그 언어를 규정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부분은 자기지시 self-reference 해석에 대한 진전된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두면 되겠다.
♧ quae tamen cum etiam ipsa signum sit, "그것은 또한 기호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뜻.

67 말을 통해서는 말밖에 배우지 못한다. 
♧ 어떤 특정 단어가 실체를 가리킨다고 하면 단어만 외우면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아니다. 그냥 약속 삼아서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단어는 일단 제쳐두고 그 단어가 지칭하는 실체를 관찰하고 해부도 해봐야 그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이름일 뿐이다.

67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앙 없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다.
44 Deconstructionists and postmodernists are faithless Augustinians.
♧ 여기서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해석의 무한 순환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가리키는 기호의 역설을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지시의 역설을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과 같은 역설에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 보증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 자기역설이라고 하는 것은 극복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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