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15)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과 그 특징

 

2022.09.20 몽유병자들(15)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과 그 특징

오늘은 《몽유병자들》 제10장 최후통첩을 읽는다. 최후통첩이라고 하는 챕터 제목은 말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통첩을 보냈고 그것에 대해서 세르비아가 전쟁을 하겠다고 해서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섹션 제목을 보면 "'국지전'이 시작되다"이다. 이때만 해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전쟁으로까지 전개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한 편이 되는 다섯 개의 자율적 행위자, 그리고 이탈리아까지 치면 6개국의 다자간 상호작용, 지금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가 벌어졌는데 왜 세르비아는 자율적 행위자가 아닌가. 세르비아는 지금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하고 거절을 했던 것이고, 또 프랑스도 세르비아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터이다. 1914년 6월 28일에 페르디난트 프란츠 대공이 암살을 당하고,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한 달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지금 챕터 10에서 드디어 마무리된다.

제10장 720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트이슐에 있는 황실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타조 깃펜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들을 말하고자 한다. 우선 최후통첩을 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벌어진 회의의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다. "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이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이게 항상 문제가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도 좋은데 보내기 전에 전쟁은 전쟁이더라도 빠져나갈 출구전략을 세워놓고 나가야 한다. 사태가 임박해서 뭔가 시작이 되었다. 그럴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첫째가 당연히 출구전략이다. 그리고 695페이지를 보면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에는 피상적인 관심밖에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출구전략이 없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태를 폭넓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콘라트는 군사적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한 계획 R이 아니라 발칸에 국한된 군사적 시나리오 계획 B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갈리치아는 오늘날에는 폴란드에 있다. Plan R은 러시아, Plan B는 발칸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면 당연히 Plan R까지 세웠다면 출구전략이 있는 것인데 Plan R이 없는 것을 보면 당장 발칸에 국한된 군사적 시나리오만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이러했는지, 어떤 사태에 대해서, 전쟁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그것이 뒤에 붙어서 딸려 올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출구전략도 나오지 않고 결국에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 보면 "각료 중 아무도 러시아가 실제로 개입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또는 병력 배치 시나리오를 얼마나 쉽게 변경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지 콘라트에게 캐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프랑스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항의조치에 어떻게 대응할지 협의했음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게 바로 이들이 간과했을까를 의심할 정도로, 글쎄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이 문제를 간과했을까, 혹시 간과한 척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Plan R이나 출구전략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제 "발칸 반도에만 국한된 국지전만을 하고 이기면 사태가 마무리되겠지"라는 판타스틱한 계획만 가지고 밀고 들어가게 된 것이 전쟁을 무시무시한 국면으로 끌고가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10장 694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이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10장 695 7월 7일 회의에서처럼 7월 19일 회의에서도 각료들은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에는 피상적인 관심밖에 기울이지 않았다. 콘라트는 군사적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한 계획 R이 아니라 발칸에 국한된 군사적 시나리오 계획 B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럼에도 각료 중 아무도 러시아가 실제로 개입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또는 병력 배치 시나리오를 얼마나 쉽게 변경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지 콘라트에게 캐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프랑스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항의조치에 어떻게 대응할지 협의했음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다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르비아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데 그 최후통첩이 10개의 요구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최후통첩이 굉장히 무뢰하다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처칠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사실은 저자는 오스트트리아의 최후통첩 요구는 별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분명히 빈에서는 세르비아가 수용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고 최후통첩을 작성했고 비타협적인 성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게 예전의 나토가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에 전달한 최후통첩보다 훨씬 더 온건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최후통첩의 수위가 온건하냐 강경하냐는 중요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최후통첩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지점이 된다.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어쨌든 벌어졌다. 그런데 그 최후통첩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에서 출구전략이 없었다는 것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고, 러시아나 프랑스가 전쟁을 하게 되면 개입할 것이라는 아주 명백했는데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10장 701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이를테면 나토가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에 전달한 최후통첩보다 훨씬 더 관대했다.

10장 702 이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최후통첩의 요구는 별것 아니었다.

10장 702 이 최후통첩은 두 인접국 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시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알리는 비타협적인 성명이었다.

 


그 다음에 세르비아의 정치 지도부는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견해에 거의 만장일치로 도달했다. 그런데 세르비아는 독립적인 행위자가 아니다. 세르비아가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견해에 거의 즉각 만장일치로 도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러시아가 프랑스가 자신의 뒤를 봐줄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르비아에서 그렇게 확고하게 믿을 정도로 러시아의 지원 보장이 있다는 것을 오스트리아에서 몰랐겠는가,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의 등을 꼿꼿이 세워준 것은 러시아의 지원 보장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스트리아쪽에서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심각한 판단 착오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의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렸다. 그런데 사실 러시아가 여기서 세르비아의 뒤를 봐준다라고 하는 것을 확고하게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당장 전쟁을 치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사자는 러시아가 아니고 세르비아이다. 그러면 러시아는 무책임한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세르비아는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답변서를 보냈다. 그 안에는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는 답변서라고 하는 것이 "세르비아의 적이 아닌 친구들을 위해 작성한 문서였다." 그러니까 세르비아가 이렇게 답변서를 작성하게 된 것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겨냥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10장 707 이 모든 발언은 세르비아 정치지도부가 세르비아는 저항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견해에 거의 즉각 만장일치로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10장 709 세르비아 정부의 등을 꼿꼿이 세워준 것은 러시아의 지원 보장이었다.

10장 711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의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10장 713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10장 713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

10장 715 이것은 세르비아의 적이 아닌 친구들을 위해 작성한 문서였다.

 


분쟁은 어차피 벌어지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때부는 이런 정도의 외교분쟁이라든가 국제분쟁이 생겨났을 때 사건을 다루는 국제법학이나 국제기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그 이후에 가져다준 가장 큰 교훈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최후통첩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르비아 입장에서 도 그렇고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그렇고 이렇게 문서를 보내면서도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그런 마음들이 한구석에는 다들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과연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겠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지금 상태에서는 그랬는지 몰라도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람들을 전쟁의 흥분으로 밀고 들어가는 그런 분위기라는 것이 만들어 진다. 예를 들면 722페이지에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흥분하다니 미친 놈 같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 프로이트가 평화주의자가 아님은 물론이고 조건적 반전주의도 아닌 아주 호전광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이 부분은 "프로이트의 호전성" 카드를 만들어서 적었다. 이런 것들이 이제 이른바 지성인인데 이런 자들이 전쟁을 재촉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조국을 지키자, 기회를 주자고 부추기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강철왕국 프로이센》(원제 :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을 썼다. 그렇게 장기적인 역사를 쓰기도 했고 아주 짧은 기간에 벌어진 사건도 썼다. 정말 대가가 아닌가 한다. 

10장 716 이런 유형의 사건을 다루는 국제 법학도, 구속력 있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할 권한을 가진 국제기구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장 722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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