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5 제14강(2) 구약 성서 〈욥기〉

 

2023.07.15 문학 고전 강의 — 35 제14강(2)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4강(2)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3.26)

 

문학 고전강의 〈욥기〉 14강이다. 이제 세 친구들과의 대화 를 읽는다. 지난번에 목차 말했듯이 3장이 욥의 저주와 한탄이고, 욥이 혼자서 하는 말, 그다음에 4장, 5장이 엘리바즈의 일반적인 논의 그리고 6장, 7장이 욥의 저주와 한탄이 심화되고 급기아 자기 파괴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고, 8장에서는 인과응보에 대한 빌닷의 얘기가 있고, 그런 얘기 다 들어도 욥은 계속해서 자신을 저주하고 그리고 한탄하면서 신에게 미움받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11장이 신의 불가지성에 대한 소바르의 논의이다. 그런데 욥의 자기 한탄는 3장에서 11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그건 그렇다 치고, 인과응보에 대한 엘리바즈의 일반적인 논의가 있고 그다음에 빌닷의 논의가 있고 그다음에 신의 불가지성에 대한 소바르의 논의가 있는데,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쭉 이어붙이면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두 번 하고 신을 알 수 없다는 얘기를 한 번 한다. 엘리바즈와 빌닷이 인과응보를 두 번 얘기하고 그다음에 소바르가 신의 불가지성, 이렇게 보면 인과응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고통에 처해 있을 때 또는 이건 좀 도저히 아닌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 때 인과응보를 이야기하는데,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사람이 생각하는 것 아닌가. 전 우주의 이치가 인과 응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파스칼이 얘기하는 것처럼 세상에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그냥 있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봐도 그렇고 팡세에서도 우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거 아닐까. 우주의 이치가 어디있는가. 그냥 우주는 물질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물질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인간은 물질들이 좀 기묘하게 작용하면서 온갖 망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 온갖 망상 중에 하나가 인과응보라고 하는 그 생각일테고 그 인과응보를 시행하는 주체가 있어야 되겠다 라는 망상을 거기에 덧붙여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그러다 보면은 신이라는 걸 알 수 없다 라고 얘기하는데, 신을 알 수 없다고 얘기하는 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라고 말해버리면 세상의 인과응보라는 것을 시행하는 주체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 그런 얘기하고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과응보 얘기를 끝까지 밀고 가버리면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이 이 우주에서 실현되고 있는데 그것을 시행하는 또는 그것을 관철시키는 그 주체에 관한 그런 얘기가 아닐까 한다. 그렇게 미리 짐작을 해두고 욥의 저주와 한 탄을 한 번 좀 보겠다.  욥의 저주와 한탄은 3장, 그리고 6장, 7장에 있다.  

 

"마침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부르짖었다." 1절과 2절은 도입부의 산문이고 그다음에 3절부터 운문이 시작된다. 3장 3절부터 10절까지 운문과 산문을 구분하는 것, 번역문으로만 보면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데 그렇다 해도 구분은 해야 한다. 문학이라고 하는 게 그냥 제멋대로 쓰여진 게 아니라 형식을 갖춰둔 문학이니까 그렇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버려라. 그 날이여, 어둠에 뒤덮여 위에서 하느님이 찾지도 않고 아예 동트지도 마라. 칠흑 같은 어둠이 그 날을 차지하여 구름으로 덮고 해는 그 빛을 잃게 하여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라. 그 밤은 흑암에 빠져 한 해의 나날에 끼이지도 말고 다달의 계수에도 들지 마라. 아, 아무도 잉태할 수 없어 환성을 잃은 밤이 되어라. 날을 저주하는 자들아, 레비아단을 깨울 수 있는 자들아, 그 밤을 저주하여라. 그 밤엔 새벽 별들도 빛을 잃고 기다리는 빛도 나타나지 말고 새벽 햇살도 아예 퍼지지 마라. 나의 모태가 그 문을 닫지 않아 내 눈이 마침내 고난을 보게 되었구나."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이 사람이 아직 덜 고통스러운가 그런 느낌이 든다. 이렇게 고급스럽게 자기 저주를 하는 것은 아직 좀 제정신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렇게 차곡차곡 자기 저주를 하지 그냥 제정신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 고통스러운 사람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실존적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일반적 반응"이라고 여기 책에는 써놨는데 일반적 반응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고통에 처하면 이런 식으로 차곡차곡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넓은 범위로까지 또는 일반적 보편적 원리로까지, 이렇게 점증법이라고 하겠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이런 논변을 할 수 없다. 굉장히 고통스러울 때는 이러지 않는다. 처음에는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그다음에는 자기가 잉태된 나를 저주한다. 그다음에는 그 잉태된 날을 저주하는 방식이 "칠흑 같은 어둠이 그 날을 차지하여 구름으로 덮고 해는 그 빛을 잃게 하여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라."  6절부터 9절까지는 이제 밤이다. 공감이 안된다. 여기 책에다 쓰기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써놨는데 공감이 안 된다. 왜 안 되는가.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이 이렇게 차곡차곡 하지도 않는다.  

〈욥기〉 3.1-2
마침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 부르짖었다.


그다음에 11절에서 19절까지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에, 어쨌든 태어나긴 태어났는데,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이제 그렇게 간다. 저주를 퍼붓고 한탄한다.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나를 받을 무릎이 있었고 어찌하여 내가 빨 젖이 있었던가?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저 허물어진 성터에 궁궐을 세웠던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나란히!" 여기까지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 그냥 죽어버렸을텐데 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냥 그냥 넘어갈 텐데 말이다. 이 사람은 "저 허물어진 성터에 궁궐을 세웠던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나란히! 황금을 자랑하고 은으로 집을 채웠던 성주들과 나란히! 나는 어찌하여 낙태되어 묻힌 핏덩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빛도 보지 못한 벌거숭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그 곳은 악당들이 설치지 못하고 삶에 지친 자들도 쉴 수 있는 곳, 포로들도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노예를 부리는 자들의 욕설도 들리지 않는 곳,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들이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곳." 지하 세계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 성주들, 한때는 화려한 삶을 누린다고 했던 이른바 셀렙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나 노예나 포로나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는 곳, 그렇게 지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를 하는데,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 정도면 이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게 지금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17절, 18절에 보면 고난에 대한 좀 더 보편적인 원리가 나온다. 악당들이 설치지 못하고 삶에 지친 자들도 쉴 수 있는 곳은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곳이 아니고,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들이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곳, 지하 세계로 가면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천국이 아니라 지하 세계에서 비로소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삶이 고된 것이다.  저는 천국이 있다 없다 이런 것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우리가 천국에 간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악과 부조리로 가득 차 있어서 그 큰 악과 그 부조리를 이겨내려면 자기 자신도 아주 조그마한 악이라도 행해야 한다. 악한 짓을 하는 게 그런 데로 봐줄 만한 어떤 논변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맥베스》를 강의할 때면 그 얘기를 꼭 한다. 맥베스가 나쁜 놈이다 악인이다, 이아고도 오셀로도 나쁜 놈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사회심리학 책을 이렇게 보면 "악은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타인에게 고의로 고통, 파괴, 위해를 가하는 행위", 이제 대표적인 경우가 간계를,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반사회적인 무자비함과 냉담함 그리고 잔혹한 행위를 통한 즐거움의 추구 그리고 자아도취와 자만에 따른 극단적인 자기애, 뒤쪽으로 갈수록 강한 악이다. 그런데 자아도취와 자만에 따른 극단적인 자기에는 드물고, 의외로 또 그런 사람을 우리가 많이 만나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 잔혹한 행위를 통한 즐거움의 추구, 이게 의외로 좀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살인사건, 연쇄 살인범 이런 범죄가 있고, 그다음에 반사회적인 무자비함과 냉담함, 이건 누구나 다 숨기고 있다. 일상적으로 간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게 남을 속이는 것이다. 살짝살짝 속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솔직하고 담백하게, 우리가 인생 전체를 이렇게 돌이켜 볼 때 어떤 상황에서나 솔직하고 담백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또는 내가 지금 이 자리 이 상황에서 솔직하고 담백하게 하면 상대가 곤란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상대의 그런 핑계를 대면서 조금씩 거짓을 행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것도 악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마저도 하나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 거기 가서 자신이 그런 간계, 조금의 거짓이라도 행하지 않을 정도로 타인이 없는, 자신에게 그런 악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야만 자신도 악을 행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순전한 선을 애초에 행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러니 세계는 어떤 단계로든 또는 어떤 의미로 우리가 그 악을 규정하든 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이 악한 세상에서 살려면 악을 선으로써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욥기〉의 메시지인데,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다, 빛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모두 악인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본 값으로는 지하 세계가 정해져 있고, 그 지하 세계는 우리 모두 가는 곳이라고 생각을 일단 해야 하고 그다음에 살아 생전에 악한 자를 조금이라도 만나지 않고, 만났는데 그것도 아주 짧게 만나서 남은 인생은 그냥 봉쇄 수도원 같은 데 가서 선한 행위만 하다가 죽은 자들 그런 자들만이 천국을 간다고 생각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만에 하나 어찌 잘못되어서 제가 천국을 간다고 하면 굉장히 괴로울 것 같다. 저런 사람들이나 오는 데를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이렇게, 지하 세계에 가면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저 사람한테 비하면 나는 그래도 좀 이런 식으로, 그래도 상대적인 위안을 얻겠다. 난 그래도 좀 착한 편이네. 우리가 나날을 살면서 그러지 않는가. 저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안 그러는데 저만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또 그런다고 생각하는 건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아 뭐 이런 식의 안식을 얻으면서 위로를 하면서 사니까 사실은 우리가 지하 세계에서야 비로소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사실은 살아가면서도 그런 지하 세계에서야 얻을 수 있는 평안과 안식을 살아서도 조금씩이라도 얻지 않으면 삶 자체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얼핏 그렇게 생각이 든다.  

〈욥기〉 3.3-19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버려라. / 그 날이여, 어둠에 뒤덮여 위에서 하느님이 찾지도 않고 아예 동트지도 마라. / 칠흑 같은 어둠이 그 날을 차지하여 구름으로 덮고 해는 그 빛을 잃게 하여 그 날을 공포 속에 몰아넣어라. / 그 밤은 흑암에 빠져 한 해의 나날에 끼이지도 말고 다달의 계수에도 들지 마라. / 아, 아무도 잉태할 수 없어 환성을 잃은 밤이 되어라. / 날을 저주하는 자들아, 레비아단을 깨울 수 있는 자들아, 그 밤을 저주하여라.  / 그 밤엔 새벽 별들도 빛을 잃고 기다리는 빛도 나타나지 말고 새벽 햇살도 아예 퍼지지 마라. / 나의 모태가 그 문을 닫지 않아 내 눈이 마침내 고난을 보게 되었구나. /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 어찌하여 나를 받을 무릎이 있었고 어찌하여 내가 빨 젖이 있었던가? /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 저 허물어진 성터에 궁궐을 세웠던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나란히! / 황금을 자랑하고 은으로 집을 채웠던 성주들과 나란히! / 나는 어찌하여 낙태되어 묻힌 핏덩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빛도 보지 못한 벌거숭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 그 곳은 악당들이 설치지 못하고 삶에 지친 자들도 쉴 수 있는 곳, / 포로들도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노예를 부리는 자들의 욕설도 들리지 않는 곳, /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들이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곳. 


그다음에 이제 3장 1절부터 19절까지가 그러하고, 처음에는 욥 개인의 고난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했다가 고난에 처한 인간의 일반적인 반응으로까지 정리가 되고, 그다음에 20절에서 26절까지는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추상화, 이런 부분들이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어 보물을 찾듯 파헤치다가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어 보물을 찾듯 파헤치다가 묘지에 돌만 보여도 반갑고 무덤이라도 만나면 기뻐 소리친다." 이런 것들이겠다. 죽고 싶을 때 죽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아 조금 더 살아야 되는데 그런 순간이 있다. 삶에 대한 어떤 약간의 미련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삶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생각을 해보니까 조금 더 살아서, 나에게 한 6개월 정도만 더 시간을 주면 좋겠는데 그런 때가 있다. 저도 살면서 딱 1년 6개월 정도를 내가 살 수 있으면 이거는 마무리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목숨 자체를 내가 굉장히 집착해서 앞으로 한 10년은 20년은 더 살고 싶은데 그런 게 아니라, 지금 1년 6개월 정도만 내가 하고, 다른 계획과 그 이상의 것은 이번 생에는 못하겠지, 그렇더라도 이건 좀 하고 해야겠지 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이런 것이겠다. 본능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안타깝지만 지금 내 나의 처지에서 보건데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최소한 1년 6개월 정도만 나에게 좀 삶이 좀 멀쩡한, 그런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멀쩡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1년 6개월 정도만 주어진다면 좋지 않겠나, 그럴 때는 한숨과 흐느낌이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딱 그것만 생각하는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때를 지나서 1년 6개월보다 더 살고 있는데 그때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 그렇게 그것만 생각하고 다른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그런 과거의 저를 기특하다고 생각을 하는 때가 가끔 있다. 그래서 이건 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지금 나는 1년 6개월 이상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냥 이것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해야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겠다.  

〈욥기〉 3.21-22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어 보물을 찾듯 파헤치다가 / 묘지의 돌만 보여도 반갑고 무덤이라도 만나면 기뻐 소리친다!


여기에 보면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이렇게 돼 있다.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그다음에 보면 26절에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평화, 평안, 안식의 반대말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고통보다도 더 한 게 두려움이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게 아마 두려움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차근차근 차곡차곡 읽어보면 우리의 내면의 감정 상태들을 가능한 한 잘게 쪼개서 이렇게 쭉 설명을 하니까, 엘리바즈는 인과응보에 대해 생각해보라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생각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평화와 안식과 평안를 원하는데 그것의 반대가 뭘까, 두려움이구나, 그러면 고통에 처해 있을 때는 무엇을 이겨내야 되는가.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게 두려움이다.   

〈욥기〉 3.25-26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제가 최근에 한두 달 사이에 타인의 죽음들 가까운 이들의 그것을 이렇게 겪으면서 두려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엘리바즈는 도덕적 인과응보을 얘기한다.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도덕적 응보의 원천이 신이다 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기라는 것이다.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엘리바즈 얘기, 그래 고맙울 수 있다. 그 먼 데에서 친구라고 와서 지금 온몸에 부스럼이 막 나 있는 친구한테 와서 이렇게 온건한 도덕적 인과 응보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마운 것도 고마운 거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갈 틈이 없다. 그냥 나는 고난이 굉장히 강하고 추상적으로 도덕적 인과응보론까지 생각할 틈이 없다. 오늘 이렇게 문학 고전 강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가장 와닿는 구절이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이 구절이 아닌가 한다. 3장 26절 이 구절을 한 번 깊이 생각해본다. 두려움이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데 죽음 자체보다도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다.

〈욥기〉 4.8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욥기〉 5.8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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