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2023.07.29 문학 고전 강의 — 39 제15강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5강
“희랍의 비극은 이와는 달리 생각하는 듯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오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겪음을 계속 해나가고 그 겪음을 반성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일 것입니다... 인간은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갈 뿐이며, 그때의 결단이 그때의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인과관계의 사슬에 들어가 있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모든 인간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이 이 세계에 최초로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실존주의자입니다.”(p. 167)
그동안 《문학 고전 강의》 제14강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 말했다. 굳이 욥기를 읽으면서 다루지 않아도 될 만한 이야기들을 잔뜩 했다. 처음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 녹음을 시작하면서 책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도 해보겠다고 말했는데 책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문학 작품들이 읽는데 필요한 것들이었어야만 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는 요즘 이렇게 조금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떠들어 댄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보는 것이 작품을 읽는 데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어서 그것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요약 정리해서 얼마나 잘 읽었는지 시험 보고 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공부라고 하는 것이 대개 다 성취를 측정하는 일과 거의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문학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읽을 때도 지나치게 독서의 어떤 성취도를 의식하면서 읽지 않나 한다. 그러다 보니까 독서 일기, 독서 노트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지난번에 7월 19일에 제주도 불기도서관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고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에 대한 특강을 할 때도 거기에 제 강의를 처음 듣는 분들이 있었고, 초등학생 중학생 자녀를 둔 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자녀들이 책을 읽은 다음에 독서 노트를 쓰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다 라고 말하니까 깜짝 놀라는 그런 표정을 짓는 분들도 있었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해도 어떤 책을 하나 읽었을 때 그걸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를 증명해내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다. 열심히 읽었다는 잣대 자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필요한 부분을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이를테면 피터 퍼튜의 《중국의 서진》을 읽었는데 이게 책이 꽤 두껍다. 800페이지쯤 되는 책인데 이런 책을 어떻게 꼼꼼하게 다 읽겠는가. 지금 내가 어떤 관심사가 있는데 그 관심사에 필요한 또는 그것에 대답을 줄 만한 그런 것들을 찾아서 읽거나 아니면 선행하는 다른 독서들이 있을 때, 피터 퍼튜가 중앙아시아 역사에 관한 책들을 거론하면서 각각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접근법들을 비교해서 설명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 부분만 골라서 읽을 수도 있다. 우리가 중앙아시아 역사를 알아서 뭐 하겠나 라고 하는 그런 굉장히 단순 무식한 질문을 하면서, 그냥 이런 중앙아시아처럼 도대체 국가가 형성될 것 같지 않은 그런 나라들에서도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근대적인 의미에서 그런 국가가 성립하려면 어떤 요소들이 최소한 필요한가, 청나라나 러시아 같이 정말 국가다운 국가를 성립시켰던 나라들과, 몽골 제국도 국가를 성립했으니까 중국에 와서 원나라로 통치를 했겠다. 준가르 제국이라든가 이런 여러 유목 국가들이 있는데, 그런 국가들은 그냥 계속 시종일관 말타고 약탈이나 하다가 끝났는가. 그건 아닐 테니까 그런 나라들도 적어도 정주 국가들로부터 어떤 그런 것을 가져다가 쓰지 않았는가. 그리고 자연환경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해내기에는 기술도 많이 모자란 상태이고 그러니까 정치 체제라고 하는 게 철저하게 자연환경의 지배를 받았을 뿐인가. 그게 아니라 그들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제도 또는 주민들의 조직 이런 걸 통해서 자신들이 처해 있던 물리적 환경을 그래도 어디까지는 인위적으로 개조해내고 그것을 가용한 자원으로 삼아냈는가. 그런 것을 다루는 게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라는 그런 학문 분야도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만 찾아서 읽어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책을 하나 읽을 때는 과연 우리가 어떤 책을 잘 읽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을 객관적인 기준을 놓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독서 일기를 써라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시키는 사람의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되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또 시키는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은 검사하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이 뭔지 금방 알아차리는데, 그것을 맞추려고 하다 보면 결국엔 서로 원하지 않는,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기는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겠다.
그러니 특히 문학 고전으로 알려진 텍스트들을 읽을 때는 그런 점들은 접어두고 그냥 내가 느껴지는 대로 그 정도면 충분해 라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저런 것을 떠올리다 보면 정말 말그대로 상상력, 근거 없는 상상력, 망상에 가까운 어떤 그런 것들까지도 쭉 집어넣는 것, 그런 것이 좀 괜찮지 않겠나 한다. 예를 들어서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을 읽는데 갑자기 제목에 꽂혀서 서쪽, 해가 지는 서쪽 이렇게 해 나가는 것, 사회과학 책이나 역사학 책을 읽을 때는 그렇게까지 가는 건 곤란하지만 그래도 욥기는 문학 작품이니까 올바르게 산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고 신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뭐야,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도 틀린 것 같지 않은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15강을 보면 야훼가 친구들을 벌주고 욥이 친구들의 용서를 대신 비니까 소유를 회복해 주고 그런다. 그러면 애초에 욥이 잘못한 게 없는 거 아닌가. 처음부터 야훼와 사탄의 대화에 이미 나왔다. 야훼와 사탄을 대화해 보면 욥이 잘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걸 읽고 뭘 얻으라는 것인지 무슨 교훈을 얻겠다는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교훈, 그런 교훈은 좀 어렵겠다. 우리가 다음에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읽는데 거기에 보면 더 황당무계하다. 그러면서도 이 등장 인물들은 신의 뜻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한다. 차라리 맥베스나 오셀로는 분명하게 자기들이 난리 죽이다가 그렇게 고통받게 된다. 그런데 《팡세》를 보면 더 황당하다. 말이 되는 것 같은 얘기를 해야지 라는 부분이 있다. 사실 강의를 하기 위해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태도로 《팡세》를 읽어서 그나마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전에는 파스칼의 《팡세》를 읽을 때는 목불인견目不忍見, 정말 파스칼은 왜 이렇게 징징거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궁리하고 있는 것이어서 미리 말하는데 에우리피데스를 읽을 때 부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를 한번 곁들여서 설명을 하려고 한다. 부르노 스넬은 에우리피데스가 헬라스 비극의 완성품이다 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포클레스의 탁월함을 찬양하는 바람에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평가가 저평가되었는데 부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를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진다.
오늘은 욥기 15강을 마무리를 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욥기를 붙들고서 지나치게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욥기 38장에 야훼와 욥의 대화가 있다. 야훼는 자신이 그 누구도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자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세계는 야훼의 뜻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임을 이렇게 야훼가 천명한다. 아주 딱 잘라서 말한다. 그러니까 욥이 40장 1절부터 5절까지 보면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제 그쯤 했으면 됐는데 야훼가 내가 얼마나 힘이 센 지 알아 이렇게 하면서 얘기한다. 베헤못과 레비아단을 말하는 부분인데 후대에 많은 이들이 이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베헤못과 레비아단 선한 동물이냐 악한 동물이냐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냥 센 짐승이다 라고 얘기를 할 뿐이다. 그러니까 "보아라 저 베헤못을, 황소처럼 풀을 뜯는 저 모습을, 내가 너를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 레비아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제가 판단하기로는 토마스 홉스의 저작에 이제 레비아단과 베헤못이 등장하는데 베헤못이 등장하는 부분은 《Behemoth or The Long Parliament》이고, 레비아단은 일반적으로 《리바이어던》이라고 일려진 국가에 관한 논의에 등장하는데, 앞에 나오는 레비아단은 선한 동물, 악한 동물의 의미가 없고 그냥 강력함이다. 그리고 베헤못은 홉스가 아주 명백하게 장기의회가 가지고 있는 못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 베헤못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후대의 저자들이 어떤 식으로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썼는가는 후대의 저작들에서 보면 된다. 애초에 성서에서는 악한 동물, 선한 동물로 규정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후대의 제자들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상징화하는가는 그 후대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판단해봐야 되는 그런 부분이다.
〈욥기〉 40.3-5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 한 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욥기〉 40.15-25
보아라 저 베헤못을, 황소처럼 풀을 뜯는 저 모습을, 내가 너를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 / 저 억센 허리를 보아라. 뱃가죽에서 뻗치는 저 힘을 보아라. / 송백처럼 뻗은 저 꼬리, 힘줄이 얽혀 터질 듯하는 저 굵은 다리를 보아라. / 청동관 같은 뼈대, 무쇠 빗장 같은 저 갈비뼈를 보아라. / 맨 처음에 하느님이 보인 솜씨다. 다른 짐승들을 거느리라고 만든 것이다. / 산의 소출을 가져다 바치니 들짐승들이 모두 와서 함께 즐긴다. / 푸성한 연꽃잎 밑에 의젓하게 엎드리고 갈대 우거진 수렁에 몸을 숨기니 / 연꽃잎이 그늘을 드리우고 강가의 버드나무가 그를 둘러싸 준다. / 강물이 덮쳐 씌워도 꿈쩍하지 아니하고 요르단 강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가도 태연한데 / 누가 저 베헤못을 눈으로 홀리며 저 코에 낚시를 걸 수 있느냐? /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그 혀를 끈으로 맬 수 있느냐?
욥은 어쨌든 신이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면 이건 결국 신에게 굴종하는 태도인 것이고, 이 굴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이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조금 더 해석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다음에 엘리바즈, 빌닷, 소바르에게 얘기를 하고 나서 "나의 종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런 부분들에 걸린다. 그냥 엘리바즈나 빌닷, 소바르 모두 함부로 나불댄 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그것을 지금 솔직하지 못하였다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 주셨다.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주셨다." 그러니까 165페이지에서 말한 것처럼 이게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했는데, 친구들을 용서한 다음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주고 재산과 자녀도 회복시켜주고 그랬다. 그래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서로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두 개만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프롤로그에서는 욥의 불행과 고난이 욥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사탄과 야훼가 일종의 내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욥은 자신이 그걸 알지 못한다.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건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그런 영역이 있다 라는 걸 한 번 생각하고 그냥 견딘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신이 보상을 해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중간에 그러면 악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신이 뭐 알아서 하겠지 라고 굉장히 소극적으로 판단을 해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지금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다음에 이제 세상은 결국 모두 다 신에 의해서 신에 의해서 정해진다 라고 하는 굉장히 무기력한 결론으로 이르게 된다. 신이라고 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징벌을 주고 다스릴 때까지 즉 징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실망스럽다. 그런데 실망스럽다 하더라도 한 번은 생각해 본 다음에 실망하는 것과 애초부터 실망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똑같은 대답에 이른다 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최선의 것이다,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 라이프니츠가 근대에서 신정론 문제를 아주 주제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얘기이다.
〈욥기〉 42.10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 주셨다.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주셨다.
결국 욥이라고 하는 사람의 결론도 그렇고 《팡세》의 주장도 그러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건 태도의 문제이다. 신념 체계가 하나 있고 삶의 방식이 있는데 삶의 방식에 문제가 되겠다. 따지고 보면 위대한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도 그 논증은 엉망일 수도 있는데, 논리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검토를 해봤을 때 굉장히 엉망인 논쟁이 있을 수 있는데, 왜 그걸 도대체 했을까를 곰곰이 따져보면 그들이 설득해내고자 하는, 텍스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논증적 구조는 참으로 불합리하고 적절하지 않은데, 그들이 그 텍스트를 통해서 세상에게,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또 다른 뭔가가 하나 있는 것이다. 다른 맥락으로 또 우리가 다른 perspective에서 봐야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용서를 해줄 수 있는, 텍스트 그 자체를 매달리지 말고 그런 점에서, 167페이지를 보면 얘기한 것이 있다. 이제 그다음에 희랍 비극들을 읽어야 하는데 욥과는 다른 부분에 있는 것이다. 가령 욥기를 헬라스적으로 본다면 마지막에 신의 전지전능함을 믿고 그냥 막 견뎌내버리고 끝내버리는 게 아니라 한 번 끝까지 쭉 갈 때까지 가보는 게 욥의 헬라스적인 해결책이겠다.
자기가 검토하고 다시 한번 돌이켜보고 또 자기가 자기를 서술하는 것이 자기 성찰적 자아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식이다.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그냥 눈앞에 닥쳐있는 것들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해라고 하는 것을 흔히 실존이라고 말한다. 저는 그쪽은 도대체 가지 못하겠다.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오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겪음을 계속 해나가고 그 겪음을 반성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게 희랍 비극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겪음을 계속 해 나간다. 아킬레우스처럼 겪음에 막 매달린다 라고 하면 그건 실존적인 것 같은데 분명히 거기에는 그것을 노래하는 시인이라고 하는 분열되어 있는 서술자가 있다. 이렇게 지켜보는 서술자가 있다. 두 가지가 다 있는 것이다. 앞뒤 안 보고 이것저것 안 가리고 앞으로 밀고 가는 실존적인 아킬레우스 같은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그걸 이렇게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시인도 있다. 희랍의 서사이나 비극에는 두 가지가 다 있다. "이 또한 헛소리이고 우리의 겪음이라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니 인간은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갈 뿐이며, 그때의 결단이 그때의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밀고 가는 게 실존주의이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인과관계의 사슬에 들어가 있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모든 인간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이 이 세계에 최초로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실존주의자입니다.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헛된 망상이라 여기고 인간의 이성을 갈고닦음으로써 세계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이성 신봉자, 계몽주의자일 것입니다." 18세기 서구 계몽주의만 국한해서 말하자면 계몽주의의 기본적인 특징은 반종교주의이다. 계몽주의는 무엇이냐 할 때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적극적인 주장이고, 계몽주의는 일단 신을 까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가면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반성이고 돌이켜 보는 것이고 이성 따위는 없어 라고 말하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라고 하는 실존주의의 모토가 나온다.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놓여 있는 Existenz가 본질이라고 말해버리면 본질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바로 실존주의이다. "이들은 철저한 반종교주의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태도들이 서구의 문학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고대 헬라스의 비극은 둘 다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격음도 있고, 167페이지의 이 부분은 실존주의와 반성하는 초월론적 태도, 이런 것들을 비교해서 쓴 것이니까 한 번쯤은 여러분들도 곰곰이 읽어봤으면 한다.
제15강 167 희랍의 비극은 이와는 달리 생각하는 듯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오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겪음을 계속 해나가고 그 겪음을 반성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선택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또한 헛소리이고 우리의 겪음이라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니 인간은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갈 뿐이며, 그때의 결단이 그때의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인과관계의 사슬에 들어가 있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모든 인간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이 이 세계에 최초로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실존주의자입니다.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헛된 망상이라 여기고 인간의 이성을 갈고닦음으로써 세계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이성 신봉자, 계몽주의자일 것입니다. 이들은 철저한 반종교주의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태도들이 서구의 문학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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