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41 ‘신정론’에 관하여(2)

 

2023.08.05 문학 고전 강의 — 41 ‘신정론’에 관하여(2)

마크 래리모어, ⟪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4. 신정론과 욥기
- 밀턴John Milton, ⟪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 1667).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리라.”(1.20-24)

-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인간에 관한 시론⟫(An Essay on Man, 1734).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방식을 옹호”(1.16)하겠다.

- 칸트Immanuel Kant,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1793).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은 도덕적 요구의 검증에 도움이 되지만, 개인이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해야 하는 것이 먼저다; “신정론에 관한 모든 철학적 시도의 실패에 관하여”(Über das Mißlingen aller philosophischen Versuche in der Theodizee, 1791). “진정한 신정론”(authentischen Theodizee) “우리는 신정론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다. 신성한 지혜에 대한 모든 반박을 기각하는 것도 신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기각이 신의 명령, 또는 (이 경우에는 같은 결론으로 귀결되지만) 이성의 표명일 때, 즉 필연적이고 모든 경험에 앞서 우리가 도덕적이고 지혜로운 존재인 신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도록 이끄는 이성을 통해 이루어질 때 그러하다.”(31) 

 

 

지난 시간에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이 세 사람의 헬라스 비극 작품들에 들어가기 전에 욥기를 읽은 김에 욥기에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 중에 하나가 신정론이고, 신은 얼마나 올바른가 하는 것, 그 주제를 《욥기와 만나다》에서 해당 부분을 전부는 아니지만 꼭 읽고 지나갔으면 하는 부분을 한번 정리를 했다. 오늘은 칸트가 정리한 내용을 맥을 짚어보면서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 화요일부터는 헬라스 비극을 읽는데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도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꼭 봐두는 게 좋다. 


신정론과 욥기는 지난번에 말하기를, theodicy, 신은 올바른가 하는 것은 악과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진술한다고 했다.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 묻기보다는 하느님에 대해서 물어봤다.  인간은 일단 신보다 미약한 존재이고 미약하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인간은 하찮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하찮다고 해도 신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서 인간의 하찮음이 극복될 수도 있다.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신의 전지전능함은 여기서 묻지 않고 일단 그런 전지전능한 신이 있는데 그 전지전능한 신이 과연 어디까지,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모든 사건에 신이 개입한다 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지만 과연 내가 일상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행하는 모든 것들에도 다 신이 개입하는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가 그 부분이고 두 번째로는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경전에 나와 있으니까 그 경전에 근거해서 신의 뜻을 알아내고 해석해낸 다음에 그것에 합당하도록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걸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의 존재라든가 또는 그 존재하는 신의 전지전능함이라든가 이런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일체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이다. 결코 묻지 않는다.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어. 절대자이다. 그런데 근대 사상가들은 이제 물어보는 것이다. 신이 세계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진짜 활동하는 지를 묻는 것이다. 이건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활동하기나 해 그냥 법칙에 불과한 거 아닐까라고 말하면 이신론이다. 이신론이라고 하는 건 사실 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 하는데 신의 존재를 법칙으로 환원시켜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종교적인 포교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적은 이런 사람이다. 그래서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를 물었는데 진정으로 진짜로 하는 건지 그냥 법칙으로서만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지 이렇게 말해버리면 벌써 의문을 제기하고 회의주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우리가 날마다 신경 써야 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인지 물어버리면 어렵기 된다. 그러니까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난문이라고 하는 건 아포리아aporia인데 정말 모르겠다, 신이 분명히 이 세계를 전지전능하게 세계를 주재하는 주권자이고 주재자인 것도 알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지 계속 의문이 나는 것이다. 그게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인데 근대는 무신론에 입각한 방식, 이신론도 사실은 무신론의 다른 형태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다.

《욥기와 만나다》 182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 중세 섭리에 관한 논쟁과 근대 신정론에 관한 논쟁이 지닌 차이를 식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중세는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 근대는 '무신론에 입각한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리스본 대지진이 벌어진 다음에 벌어졌다. 1667년에 잃어버린 낙원(《실낙원Paradise Lost》을 보면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게 《실낙원》의 도입부에 나온다.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예전에는 근대 이전에는 17세기 이전에는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뭘 증명하는가 당연한 건데. 그런데 이제 여기서 증명하겠다고 나서는 건 있기는 한 거야 라는 의문이 많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증명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이치를 가지고 얘기하면, 예전에는 종합대학이라고 하면 철학과, 사학과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그게 왜 있어야 하지, 대학에서 꼭 철학을 배워야 해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생기면 이제 그다음에 바로 나오는 무엇이겠는가. 철학, 역사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대학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학문의 중요성을 증명해서 대학에 계속 존치해야 된다는 걸 밝히리라 이렇게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밝히고 나대봤자 아무도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존 밀턴의 Paradise Lost가 1667년에 나온 것이다. 1667년에 나온 것이니까 사실상 변신론apologia, 신의 영원한 섭리라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그 섭리를 증명하고자 하고 그것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려는 이런 시도로는 아마 밀턴의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그러니까 《욥기와 만나다》 186페이지에 보면 "이로부터 70년 뒤", 이제 18세기이다, "알렉산드 포프가 밀턴의 저 말을 상기하며 「인간에 관한 시론」An Essay on Man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방식을 옹호"(I.16)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미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밀턴의 정당화가 성공했는지는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70년 후에 알렉산더 포프가 1734년에, 18세기 중반에 「인간에 관한 시론」을 썼다. 밀턴은 철저하게 성서의 서사를 인용해서 쓰는데 알렉산더 포프는 루크레티우스의 서사를 더 많이 차용했다.  그러니까 밀턴과 포프는 70년 차이가 나는데 이미 정당화하는 방식 자체가 알렉산더 포프에서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는 와중에 1755년에 리스본 대진이 발생하면서 이제 철학적 낙관주의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18세기 말, 1700년대 말에 이르게 되면 철학적 낙관주의라고 하는, 그래도 밀턴 정도까지만 해도 철학적 낙관주의라고 우리가 분류해 놓을 수 있다. 그런데 1775년에 리스본 대지진을 거치고, 그러니까 밀턴의 Paradise Lost가 있고 알렉산더 포프의 An Essay on Man이 있고 그다음에 1775년에 리스본 대진이 있은 다음에 나오는 얘기들은 이제 철학적 낙관론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이제 칸트이다. 

《욥기와 만나다》 186 이로부터 70년 뒤 알렉산드 포프가 밀턴의 저 말을 상기하며 「인간에 관한 시론」An Essay on Man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방식을 옹호"(I.16)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미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욥기와 만나다》 187 밀턴의 정당화가 성공했는지는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욥기와 만나다》 190페이지 맨 밑줄 보면 "18세기 말에 이르자 철학적 낙관주의에 바탕을 둔 신정론은 사라졌다. 하지만 악이라는 문제와의 대결은 엄밀히 말해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 근대의식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철학으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이제 "이 시기 신에 대한 믿음은 세계를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를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이해가 안 된다. 사실 이해가 된다고 하면 일관성 있는 설명을 하는 가톨릭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이제는 철학적 낙관주의에 바탕을 둔 신정론이 사라지고 철학적 신학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종교를 어떻게 하면 새로운 토대 위에 정리할 것인가 아니 아예 우리가 지금까지는 종교적인 덕목이라고 알려졌던 것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칸트는 굉장히 인간에 대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다, 종교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다. 칸트는 무신론자라고까지 말해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칸트는 개인이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해야 된다.  이제 종교로부터 도덕 법칙을 이끌어내서 그걸 따라가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792년부터 1793년에, 18세기가 끝나가고 19세기인 1800년대가 들어갈 무렵에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가 나온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말은 제목 그대로 읽어보면 딱 이 내용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종교인데 순전한 이성이다. 순전한이라고 대개 번역을 하지만 bloßen Vernunft이니까 영어로 말하면 simple이다. 단순한 이성, 그러면 단순한 이성이 있고 복잡한 이성이 있는가가 아니라 순전하고 철저한 이성, 이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의 그 이전에 책이 《순수 (이론)이성 비판》, 《(순수)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순수 이성 비판의 내용을 보면 순수 이론 이성 비판이고 그 다음에 실천 이성 비판이라고 되어 있는 건 순수 실천이성 비판이다.  순수한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이론 이성이 있고 순수한 실천 이성이 있다. 순수한 이론 이성은 앎에 대해서 뭔가를 해나가는 이성이고, 순수한 실천 이성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이성인데 바로 그 순수 실천 이성 즉 도덕적 행위를 하는 이성이 인간의 자율성을 세우는 이성이다. 그래서 여기 "개인이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해야 한다"고 할 때 스스로 도덕법칙을 입법하는 이성이 순수 실천 이성이다. 그러니까 여기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것은 순수 실천 이성으로 세우는 종교라는 말이 된다. 순수 실천 이성으로써 우리 인간은 도덕 법칙을 입법할 수 있고 그렇게 순수 실천이성으로써 입법한 도덕 법칙의 한계 안에서 종교니까 이미 이건 종교가 아니라 그냥 경건주의, 도덕철학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신이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할 얘기가 없다. 이것을 1792년에서 1793년 사이에 썼는데 그 이전에 1791년에 칸트는 《신정론에 관한 모든 철학적 시도의 실패에 관하여》라고 하는 논문을 쓴 바 있다.  모든 철학적 시도의 실패. 신정론은 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교조적 신정론은 불가능하다 라고 기존의 신정론들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신정론을, 진정한 신정론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게 바로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고 하는 것에 집약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도덕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덕 법칙을 사람들한테 이건 도덕 법칙이니까 지켜야 돼 라고 말하면 그건 너의 도덕이지 나의 도덕은 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이제 진정한 신정론이라고 하는 게 나와서 옛 신정론은 불가능하다고 입장을 표하고 그다음에 욥기 이런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신이 있다고 전제를 하고 마음속에 어떤 그런 조화가 있다는 것, 세계에는 신적인 조화가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똑바로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제 진정한 신정론이다. 신이 있다고 얘기하지 않고 그걸 가정하고 내가 도덕적으로 올바로 산다.  그것이 바로 이제 《순전한 이성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욥기와 만나다》 190 18세기 말에 이르자 철학적 낙관주의에 바탕을 둔 신정론은 사라졌다. 하지만 악이라는 문제와의 대결은 엄밀히 말해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 근대의식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 신에 대한 믿음은 세계를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를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을 했다.  

《욥기와 만나다》 191 칸트는 개인이 스스로 도덕 법칙을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인간에게는 불순한 마음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그건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악인데, 지난 시간에 얘기한 것처럼 그게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신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 인간이 도덕 법칙을 입법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전제하고 그렇게 도덕 법칙을 입법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가정한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법칙을 전제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지켜나가려면 일단 환상처럼 보이긴 하지만 신의 존재를 그냥 가정하는 것이, 상정하다고 그러다, 신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칸트가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고 하는 텍스트 안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오히려 이제 우리가 다음에 읽게 될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나 이런 사람들은 신이 정해준 운명에 철저하게 따라가는 사람들인데 어쩌면 그게 좀 더 편할지 모른다. 칸트의 책을 읽고 있다 보면 굉장히 옳은 얘기이긴 한데 칸트처럼 그냥 안정된 직업이 있고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산책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그런 사람이면 이게 가능할 텐데 우리같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세상사에 사는 사람은 이게 여간 따라가기 어려운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신정론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거나 그런 것을 제가 요청하는 건 아니고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해서 이야기했다. 다음 주부터는 아이스킬로스로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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