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45 제17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8.22 문학 고전 강의 — 45 제17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7강(1) 
1)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
2) 새로운 사건
3) 인간이 선택한 행위
1), 2), 3)의 총합으로서의 결과. 연쇄에 따른 귀결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아가멤논, 214-216)

“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에를 목에 매니 /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바뀌어 불경하고, / 불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치욕을 꾀하는 미망迷妄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아가멤논, 218-223)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읽고 있다.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17강을 읽는다. 그간 별것 아닌 얘기들을 하면서 16강을 길게 늘려서 얘기했는데 변명을 하자면 아무래도 예전에 이걸 강의할 때와 지금은 또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속에서 겪은 게 또 있다. pathei mathos, 겪으면서 배운다. 겪어봐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도 있다. 김기영 씨는 이 부분을 "제우스께서는 인간을 사유의 길로 이끄시며 고통을 통한 배움을 유효한 법으로 정하셨노라"고 했는데 pathei mathos를 꼭 고통을 통한 배움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고통이라고 하는 말을 반드시 하지는 않아도 된다. 천병희 교수님은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은 언제나 유효하다네."라고 적으셨다. 고뇌와 고통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많다. 그리고 오히려 고뇌나 고통이나 그것도 좋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겪음을 통해서"라고 얘기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가장 넓은 범위가 격음이다. 고통보다는 저는 고뇌가 더 좋다고 생각하고 고뇌가 께름하신 분들은 그냥 겪음이라고 해도 괜찮다. 파토스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만한 것이다. 오만함이라고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세상의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연주의적 ·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오만함을 벗어나는 방법이다. 이렇게 겪어봐야 또 아는 것이다.  

사람들과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pathei mathos가 있는 것이다. 서로 함께 나눠 가지고 있는 서로 망가지지 않은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공부도 하고 대화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런 사람으로서 성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그게 pathei mathos라고 하는 것의 의미이다. 그러려면 이렇게 막 나대다가 죽는 아가멤논도 한번 보는 것이다. 김기영 씨가 번역한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뒤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아가멤논>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귀향, 계략, 복수의 유형이 기본 플롯을 구성하고 <자비로운 여신들>에선 탄원의 유형과 결합된 구원의 유형으로 전개되어 3부작이 마무리된다. 귀향이라고 하는 것,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얘기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인 아가멤논은 첫 번째가 귀향이다. 귀향이라고 하는 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고, 《일리아스》에서 보면 아킬레우스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트로이아에서 죽는다. 그런데 그것이 정해진 운명인가, 사실은 아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오래도록 사는 것보다는 불멸의 명성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가늘고 길게 살겠다 하는 오뒷세우스는 고생 끝에 집에 돌아가는데 오뒷세우스도 집에 돌아가서 패널로페와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끝날 줄 알았더니 또 떠난다. 귀향은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귀향이라는 건 정말 완결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의 어떤 것이구나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오뒷세우스는 집에 가서 페넬로페에게 환영받고 얼싸안고 울고 그런다. 그런 장면들이 굉장히 에로틱하다. 그런 장면이 로맨틱하다고 말하는 건, 로맨틱은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을 때 로맨틱하다고 하면 된다. 로만틱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되나라고 고민될 때 로맨틱이라는 말을 쓰면 된다. 냉소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로맨틱이라는 말이 원래 그런 뜻이다. 낭만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규정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에로틱한 것이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실패한 귀향이다. 귀향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 일단 집에 왔으니까 성공한 귀향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귀향이라는 건 영원히 불가능하다. 귀향이라고 하는 것은 at home이다. 집에 있다. 그런데 at home이라고 하는 게 편안하다는 뜻이다. in the house가 아니라 at home이라고 할 때는, 편안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고 항상 편안하지 않은 상태로 잠깐 편안함을 느껴본 상태 정도만 인간에게 가능하고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귀향이라고 하는 것은 at home인데 아가멤논에게도 불가능한, 그래서 주제가 귀향이긴 한데 희랍 드라마들은 가만히 보면 그런 부분들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을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여타의 것들을 그냥 완전히 생략해버리고 그 부분만이 부각이 된다.  


지난번에 제16강 맨 마지막에 보면 이런 도식이 있다.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 새로운 사건, 새로운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을 덧나게 하거나 또는 그 상황을 잠잠하게 하거나 하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 뭔가를 선택하고 그렇게 선택한 상황과 사건과 행위, 상황은 요지부동의 것이고 역사책에서 말하자면 장기 지속이라고 할 수도 있다. 행위라고 하는 것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이뤄내는 것이다. 크게 나누면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느닷없이 던져진 것으로서의 사건이 있는 것이고, 내가 깜냥껏 안간힘을 써서 뭔가를 하고 있는 행위가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이 항상 엉켜 있다. 그 세 가지의 연쇄에 의해서 귀결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결과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구 탓을 할 수가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면 이 비극 작품 읽을 때도 아가멤논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 그다음에 어떤 사건이 주어졌는가 그다음에 아가멤논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가를 봐야 한다. 그래서 제17강 181페이지에 보면 첫 문단에 그걸 집약해서 설명을 해놓았다. 

제16강 180
1)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
2) 새로운 사건
3) 인간이 선택한 행위
1), 2), 3)의 총합으로서의 결과. 연쇄에 따른 귀결


아가멤논에게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상황이 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지만 아이기스토스에게 원한을 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연결을 해보면 '상황'은 원한을 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가멤논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이다. 아이기스토스를 죽여서 없애면 원한이 사라지겠지만 그러면 아이기스토스에게 딸린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이제 트로이아 원정이라는 '사건'이 던져진다. 원정은 안가도 된다. 사건이 주어졌는데 여기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데 강풍이 불어서 배가 떠날 수 없는 상황. 원정을 가겠다고 했고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원정을 가겠다고 결정한 이상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최소한 원정을 떠나야 한다. 가서 죽을지 살지 모르지만 어쨌든 떠나기는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 여기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이 상황을 지금 코로스가 얘기한다. 코로스는 사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스트뤼몬에서 강풍이 불어와 / 사람들을 하릴없이 빈둥거리게 하고 /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주위를 배회하게 하며 / 배와 밧줄을 상하게 하니, / 이렇듯 출항이 거듭 지연되는 가운데 / 아르고스인들의 꽃은 지쳐 시들어 갔다네.  / 이에 진중의 예언자 / 이 모두가 아르테미스 탓이라고 밝히며." 아르테미스가 아가멤논에게 딸 이피게네이아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이율배반이라고 하는 상황이 탁 놓인다.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이율배반은 이걸 따르자니 저것이 안 되는 상황이다. 첫머리부터 이율배반 문제가 부각된다. 갈등의 한 축이 서약이고 여기서 아가멤논은 말한다.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져버리고 /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저 같으면 안 간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아니다. 딸을 바치지 않고 원장을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공적인 대의를 명분으로 삼아서 이것으로써 자신의 딸을 재물로 바치는 일을 정당화한다. "처녀의 피를 재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바람을 잠재워야 함대가 출발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운명의 돌풍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정당화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쇄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아가멤논> 192~199행 
코로스(좌 4) 스트뤼몬에서 강풍이 불어와 / 사람들을 하릴없이 빈둥거리게 하고 /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 주위를 배회하게 하며 / 배와 밧줄을 상하게 하니, / 이렇듯 출항이 거듭 지연되는 가운데 / 아르고스인들의 꽃은 지쳐 시들어 갔다네.  / 이에 진중의 예언자 / 이 모두가 아르테미스 탓이라고 밝히며  

<아가멤논> 212~213행 
코로스(좌 4)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져버리고 /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아가멤논> 214~216행 
코로스(우 4) 처녀의 피를 재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 부당하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까 코로스가 얘기를 한다. 코로스를 잘 읽어야 된다고 얘기했는데 코로스가 중간중간에 정리를 해준다. 우리가 고민할 필요도 해석할 필요도 없다. 코로스를 읽으면 해석이 나온다. "한번 운명의 멍애를 목에 매니 /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 불순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 치욕을 꾀하는 미망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이것을 김기영 씨의 번역을 보면, 그렇게 아가멤논이 고개 숙여 강제의 굴레를 쓰자 마음의 바람은 불경하고 부정타고 성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불어 그때부터 온갖 무모한 짓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으니 무수한 착란이 수치스러운 계획으로 사람을 대담하게 하다니 재앙의 시작이로다. 천병희 교수님은 미망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무수한 착란이라고 번역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아가멤논이 나쁜 놈 됐다는 얘기이다. 헬라스어가 원래 무엇이었는가를 떠나서 미망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어찌 될지 모르고 알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착란은 어지럽고 어수선한 것이다. 이게 문학 작품이고 문학 작품 있는 사람이 한국어 사전을 옆에 놓고 읽는 건 아니니까, 착란보다는 미망이 훨씬 더 이 알 수 없는 미로 그럴 때 쓴다. 착란이라고 하는 말은 그럴 때 쓰진 않는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거 아득하고도 깊숙한 그런 뜻을 이렇게 미처 담아내지 못한다. 이럴 때는 한국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17강은 아가멤논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그 도식에 따르면 이렇게 된 것이다. 누구 탓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아가멤논의 탓이 있다. 그걸 한번 생각해보았다.  

<아가멤논> 218~226행 
코로스(좌 5) 그리하여 그가 한번 운명의 멍애를 목에 매니 /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뀌어 불경하고, / 불순하고, 부정하게 되었다네. 이때부터 그는 / 마음이 변해 무슨 일이든 꺼리지 않게 되었다네. / 치욕을 꾀하는 미망은 사람의 마음을 대담하게 / 만드는 법. 미망이야말로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네. / 이제 그는 한 여인의 원수를 갚는 전쟁을 돕고 / 함대를 위해 미리 제사 지내고자 / 제 딸을 손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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