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47 제18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9.05 문학 고전 강의 — 47 제18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8강(1) 

오레스테스.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899)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1-2)

브루노 스넬, “아이스퀼로스는 인간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로…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했다… 아이스퀼로스에게 나아가 비극에서 중요했던 결단, 정의, 숙명 등의 관념들은 행위 직전에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책임의 엄중함을 오로지 행위 직전에 감지한다.”(⟪정신의 발견⟫, pp. 210-211)

 

 

《문학 고전 강의》를 지난주에 한 주 쉬었다. 한 주 쉬었으니까 두 번을 쉬었다. 읽고 있던 것 계속 읽는다. 계속 읽는다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읽는 것을 망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갈등 상황도 있을 수 없고 읽어야 한다. 읽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읽는 인간이다. 놀이하는 인간은 호모 루덴스이고 물론 요한 하위징아가 얘기하는 놀이는 놀고 있네 할 때의 그 놀이가 아니라, 어쩌면 놀고 있네 라고 하는 것도 그 놀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이것도 놀이다. 하위징아가 말하는 놀이라는 건 바로 그런 것인데 그냥 마구잡이로 노는 의미의 놀이가 아니라 읽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읽는 것이 전부이다.  

오늘 제18강은 자신의 재앙에 복수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운명에 빠져든 오레스테스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스 이야기 즉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다. 첫 번째가 아가멤논이고 두 번째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코에포로이) 그리고 세 번째가 자비로운 여신들(에우메니데스)이다. 오레스테스의 아버지인 아가멤논 그다음에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세 번째가 자비로운 여신들, 이 세 개의 작품이 오레스테이아라고 하는 것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예전에 문학 고전 강의 강의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 것 같다. 이렇게 강의를 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생각을 바깥에 내놓고 또 그렇게 내놓은 것을 다시 고정시키고,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구슬이고 그것을 글자로 써놓는 건 문자성이다. 구슬과 문자는 서로 대립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면서 유동하면서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이렇게 움직여가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문학 고전 강의를 강의했던 것을 지금 다시 읽으면서 제가 쓴 책을 제가 다시 읽으면서 또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러면 제가 쓴 책이라고 하는, 문자로 이루어진 것을 머릿속에 다시 담으면서 또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문자로 된 것을 다시 말로 하고 이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고 예전에 겁도 없이 오만하게 강의를 했구나 하는 반성도 해보고 그래도 이만큼을 해놔서 문학 고전 강의라고 하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해서 또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이 텍스트를 만들어 놓지 않았으면, 11페이지에 "2015년에 서울시 성북정보도서관에서 문학 고전들을 40주 동안 강의하여 2017년에 《문학 고전 강의》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적어놨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했는데, 허공에 떠돌아다녀서 흩어져 버리는 그런 말들을 다시 이렇게 해서 놓았기 때문에 지금 2017년에 출간한 책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이건 좀 잘 짚었다 이건 좀 잘못 짚었다 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조금씩 조금씩 더해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 세 개의 작품을 오레스테이아라고 할까를 조금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순진하게 또는 소박하게 생각해보면 오레스테스가 주인공이니까 그렇겠지 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왜 주인공일까. 왜 오레스테스를 주인공으로 우리는 보아야 할까를 한 번 생각해 봐야한다. 누가 저한테 지금 뭘 읽고 있어 라고 하면 오레스테스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읽고 있어. 그러면 그게 한 권인가 그러면 아니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로 이루어진 3개의 작품을 묶어서 오레스테이아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면 주인공이 오레스테스인가 라고 물어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그러면 왜 오레스테스를 주인공으로 생각할까 라는 물음을 한 번 더 해보면 좋겠다. 이걸 한 번 더 물어보면 괜찮을 것 같다. 왜 그럴까. 이 작품 전체에 걸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고 그 주제를 가장 첨예하게 잘 드러내고 있는, 흔히 하는 말로 이제 표상하고 있는, 표상하고 있는 인물이 오레스테스이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한 번 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주제가 뭐길래 오레스테스가 그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겠다. 주제가 뭘까. 운명의 위력이 주제다 라고 하면 '운명의 여신들'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 드라마들은 인간이 처해 있는 딜레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딜레마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 제16강의 이율배반의 상황이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그런 상황이다. 제16강 마지막인 180페이지에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이 있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는데 3번이 인간이 선택한 행위이다. 이 1번, 2번, 3번의 총합의 결과라고 하면 인간이 선택한 행위로서 나타나는 선택, 다르게 표현하면 행위로써 나타나는 인간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 핵심은 선택이다.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행위로써 나타나는, 선택을 행하는 자는, 물론 아가멤논도 그랬다. 아가멤논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총사령관으로서 출정을 할 것인가 아니면 딸을 죽일 것인가는 서로 다른 영역에 놓여 있는 것들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이쪽은 사회생활 얘기이고 저쪽은 사생활 얘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 훌륭한 장수라면 공적인 일을 위해서 사생활 따위는 희생하는 아가멤논. 그런데 오레스테스에게 놓여 있는 이율배반의 상황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건 가족 문제이고 같은 영역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갈등이 심하다.  

오레스테이아의 주인공이 오레스테스이다. 오레스테스가 가장 첨예한 이율배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라고 말을 했다. 뭔가의 비참함에 빠져 있는데 그 비참함에 대해서 구원을 요청하는 대상이 헤르메스 신이다. 그런데 헤르메스는 변증법의 신, 담장 위를 걷는 신이다. 이 경계선에 서 있는 신이다. 그러니까 이게 참 잘 짜여진 서사이다. 지하와 지상 두 영역에 걸쳐 있고, 신들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오고 가면서 메신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여기 오레스테스는 죽음과 삶에 동시에 걸쳐 있는 사람인데 바로 이 오레스테스가 가장 첨예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면 오레스테스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내가 도대체 어떤 행동을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장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구절이 899행이다.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 아이기스토스를 죽인 다음에 어머니를 죽이기 직전 얘기이다. 그래서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가 "멈춰라, 내 아들아. 얘야, 너는 이 젖가슴이 / 두렵지도 않느냐? 잠결이도 이 어미의 젖가슴에 매달려 / 그 부드러운 잇몸으로 달콤한 젖을 빨곤 했는데." 이렇게 하니까 오레스테스가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라고 말을 한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할까 그렇지만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다. 어머니를 죽인 다음에 오레스테스가 약 10행에 걸쳐서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길게 말을 한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날지 나도 모르겠소.  / 내 비록 고삐를 잡고 있긴 하나 말들은 이미 / 주로 밖으로 멀리 벗어난 느낌이오." 이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기 위해서, 고민이 되니까 말이 긴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 바로 이 부분이 오레스테스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대사가 된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1-2행
오레스테스: 아버지의 권능을 지키시는 지하의 헤르메스여. / 부디 내 편이 되어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896-899 행
클리타이메스트라: 멈춰라, 내 아들아. 얘야, 너는 이 젖가슴이 / 두렵지도 않느냐? 잠결이도 이 어미의 젖가슴에 매달려 / 그 부드러운 잇몸으로 달콤한 젖을 빨곤 했는데. 
오레스테스: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


제가 이 부분을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 부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 ─ 희랍에서 서구 사유의 탄생》의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 때문이다. 거기에 보면 "비극은 신화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도 않으며, 서사시와 마찬 가지로 신화사건들을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의 대등하게 양립하는 주장들 가운데 정의와 운명의 인식을 통해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에게 나아가 비극에서 중요했던 결단, 정의, 숙명 등의 관념들은 행위 직전에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책임의 엄중함을 오로지 행위 직전에 감지한다."라고 했다. 바로 그 부분 그러니까 "아이스퀼로스는 인간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인데 “뭔가 대단한 통찰을 가진 사람에게서 흔히 있는 일인바,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했다."고 했다. 그러면 부르노 스넬은 아이스킬로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런 내면적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모든 아이스킬로스의 인물들은 아주 그런 갈등 상황에서의 내면의 결단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정신의 발견》, 제6장 210-211
비극은 신화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도 않으며, 서사시와 마찬 가지로 신화사건들을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는다. 비극은 사건의 동기를 인간 행동에서 찾고, 따라서 초기 비극도 일상의 현실을 시로 모방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관계는 희생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가령 포괄적이며 정확한 심리학적 동기들을 제시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스퀼로스는 인간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로, 뭔가 대단한 통찰을 가진 사람에게서 흔히 있는 일인바,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했다. 그렇게 그는 첨예한 상황들 가운데 핵심적 인간 행동을 최대한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실제 삶에는 수많은 행위 동기가 뒤엉켜 혼재하며, 진정한 행위의 원형이라 할 자유로운 결단은 오로지 창백한 회상 속에만 나타난다.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의 대등하게 양립하는 주장들 가운데 정의와 운명의 인식을 통해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 
분명 서사시도 신화의 모든 요소를 무턱대고 취한 것은 아니다. 서정시도 의미 있는 것만을 말한다. 하지만 비극이 특정 동기들을 불 러들인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었다. 본질적인 것의─이는 동시에 현실적인 것이다 ─관념이 변했기 때문이다. 
행위가 가장 명확한 형식으로 양식화되었다는 것은 이미 현실이 오로지 사상과 관념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스퀼로스가 파악한 바와 같은 함축적 행위는 사실 전형이다. 이때 행위는 과거에 대응함만이 아니라 미래와 연결함을 의미한다. 아이스퀼로스에게 나아가 비극에서 중요했던 결단, 정의, 숙명 등의 관념들은 행위 직전에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책임의 엄중함을 오로지 행위 직전에 감지한다. 정의는 목표일 때만 혹 은 의지 안에서만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는다. 사실화된, 이미 지나간 행위에는 늘 다른 동기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숙명의 두려움은 전적으로 미래와 관련된다. 막 실현되려는 행위는 아직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전형에 따라 파악될 뿐이다. 아이스퀼로스가 도입한 투석형은 아킬레우스에게 행위 독려가 아니라 행위 저지의 동기로 고안되었고, 그로 하여금 숭고함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숭고함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고 목적론적으로 규정되지만, 선한 것을 위한 결단을 가로막거나 어렵게 하는 원인은 존재한다. 

참주 오이디푸스 맨 마지막에 코러스가 "늙어서야 지혜를 깨닫게 된다"라고 하는데 뭐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죽기 전이라도 깨닫고 죽으면 다행인데 죽으면 또 잊혀진다고 얘기하니까 영혼 불멸을 믿지 않을 수가 없고 괴로운 일이다. 하여튼 왜 오레스테이아 라는 제목이 붙었는가 오레스테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이 세 개의 작품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떤 내면적 결단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의 초점을 거기다 맞춰서 그 단면을 잘라가면서 읽는 게 좋겠다 하는 얘기이다.

<안티고네> 1351-1353행
코로스: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 큰 타격을 받게 되어, /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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