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0 제20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9.16 문학 고전 강의 — 50 제20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0강(1) 
코로스: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분이여, 어찌 감히 자기 눈을 / 멀게 하셨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1327-1335) 

- 급전과 발견급전(peripeteia, peripety, reversal of situation): 일정한 목적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데도 완전히 다른 결과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또는 연속된 행동들 발견(anagnōrisis, recognition): 무지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 “가장 우수한 발견은 <오이디푸스>에서의 그것과 같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애련이나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시학⟫, 1452a 34-1452b 1) —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친부 라이오스의 살해자일 뿐만 아니라 생모 이오카스테를 처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따라 행복에서 불행으로 ‘급전’하는 경우 

 

 

고대 헬라스 비극을 읽고 있다. 오늘부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널리 알려진 제목이 오이디푸스 왕인데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참주 오이디푸스Oedipus Tyrannus"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나쁜 사람을 참주라고 부르는데 반드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나쁜 사람은 아니고 가장 원천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basileus라든가 tyrannus라든가 이렇게 왕을 그 지배자, 라티움어로 rex, 지배자를 가리키는 술어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느냐를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것도 좀 한참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그냥 참주라고 하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능력이 좀 탁월한 사람이다 정도로만 이해를 해두고 가겠다. 《문학 고전 강의》에서 그런 개념들을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본래 의도하고 있는 문학 작품이 가진 카타르시스, 지금 고대 헬라스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주로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놓치게 된다. 공부할 때도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따라서 부수적으로 해둬야 될 것은 그냥 부수적으로 가도 괜찮다. 어디에 집중하느냐 이걸 좀 알려주는 게 앞서서 먼저 읽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인데 제가 조금 먼저 읽었다고 해서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제20강의 제목이 운명에 수긍하면서도 자기를 굽히지 않는 인간이다.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있다. 수긍을 하면 끝까지 가면 되는데, 비극의 주인공들이 좀 속된 말로 뻗대고 자기를 굽히지 않는다. 그게 자기 의식인지 아니면 드라마를 만들때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주면 굉장히 드라마틱해진다. 그런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드라마틱해지는 그런 경향이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고 이 작품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풍부하다. 제가 그런 연구들을 전부 다 읽은 것도 아니고 몇 개 읽어가지고 추려서 제 머릿속에 이게 좀 중요하다 싶은 것들만 앞뒤로 말을 맞춰서 여러분들에게 해보는 것에 불과한다. 가장 중요한 해석은 오늘 이렇게 적어두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그런 해석이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시학》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보면 《시학》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넓은 의미의 쾌락이라고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레》,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이렇게 해서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저의 경우 이 헬라스 비극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순서는 《안티고네》부터였다.  그렇게 읽어보니까 《안티고네》보다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정말 좋았다. 노년의 오이디푸스, 그 노년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보기에는 한참 젊은 나이지만 당시에는 어쨌든 노년이었겠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도 언젠가는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안티고네》는 《인문 고전 강의》에서 한 번 얘기를 했고 그다음에 《오이디푸스 왕》은 지금 이야기를 할 것이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강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꽤나 열심히 읽었고 마음에 품고 있는 작품이다. 대놓고 이거 정말 좋아 라고 하는 게 《모비딕》과 같은 작품들인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언젠가는 함께 읽어보려고 한다.  함께 읽으면서 즐겨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문학 고전 강의》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중 맥베스나 오셀로 이런 것들만 하는데 양천구에 있는 방아다리문학도서관에서는 역사 드라마들을 강의했었다. 이 역사 드라마는 재미있기는 한데 이걸 가르치려면 굉장히 많은 사전 작업이 필요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역사 드라마는 잘 안 읽는데 역사 드라마부터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러니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든가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 저는 실락원이라는 제목보다는 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실락원은 학문적으로 탐구해볼 만한 주제가 있다.  그래서 여튼 《오이디푸스 왕》은 《인문 고전 강의》에 있는 《안티고네》와 지금 이것을 같이 읽고 나중에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는 혼자 읽어봐도 되는데 함께 어떤 부분을 짚어보면서 읽으면 좋을까 그런 것은 나중에 한번 하려고 한다. 제가 수첩에 다음에 강의할 것들은 뭐다 이런 것은 적어둔 게 있다. 


205페이지를 보면 "앞서 읽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들과 함께 《오이디푸스왕》을 읽어보면 '모이라에서 티케로'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된기도 할 것입니다." 모이라는 정해진 운명이고 튀케는 복불복 그런 걸 말하는데, 이 중간 단계로 오이디푸스 왕은 제20강의 제목처럼 운명에 수긍하면서도 자기를 굽히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요체를 드러내 보인다. 자기를 굽히지 않는 인간, 욥기와 연결시켜서도 얘기할 수 있겠고 욥기는 어쨌거나 신의 뜻의 뜻에 따라서 해결되고 인간들의 복수 연쇄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화해로 귀결되는 것은 신이 뭔가를 했던 것이고 바로 우리가 앞서 읽었던 아이스퀼로스의 드라마들도 그렇다.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도 여신들이 인간의 요청에 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테나 여신의 요청을 받아서 복수의 여신들이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하는데 《오이디푸스 왕》은 신에게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작품이다. 물론 시를 창작하는 작시술의 측면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급전과 발견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또 이걸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이 정해준 운명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를 주장할 수도 있다 라고 하는 또 하나의 발견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이제 인용을 했듯이 1327행에서 1334행에 나오는 코로스와 오이디푸스의 대화는 정말 장엄하다. 이 부분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분이여, 어찌 감히 자기 눈을 / 멀게 하셨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가 말한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아폴론을 두 번 불렀다.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이제 신이 정해준 운명 얘기한다. 아폴론이 나한테 이랬는데 이건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스어에서 "쓰라리고 쓰라린" 이런 식으로 말을 되풀이하면 강조하는 것이다. 일종의 최상급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말도 그렇다. 영어는 비교급이 있고 최상급이 있는데, 한국어는 굴절어가 아니니까 앞에다가 형용서를 붙여야 한다.  한국어는 그 단어 하나로 최상급을 표현할 수는 없다. 되풀이해서 깊고 깊은 ,깊고도 깊은, 쓰라리고 쓰라린 이렇게 표현을 한다. 이런 표현들이 무서운 것이다. 최상급을 쓰는 게 더 좋은지 아니면 우리 말처럼 되풀이해서 하는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한국어는 그 앞에 꾸미는 말이 발전한다.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이게 가련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춰서 가련하다고 말하는데 사실 가련한 건 아니다. 낮춰서 말하면서 단단함을 드러내 보여준다. 자기가 자기 눈을 찔러서 가려한 사람이 되는 건데 그걸 찌를 때는 정말 말할 수도 없이 몹시 무서운 사람이다. 자기 눈을 찌르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겠는가. "보아도 /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강력한 자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이 "가련한 내가" 이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가련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눈을 찌른다. 거기서 버팅기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장엄하다. 쓰라리고 쓰라린 일은 신이 한 것인데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가련한 내가 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1327~1334행
코로스: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분이여, 어찌 감히 자기 눈을 / 멀게 하셨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오이디푸스도 그걸 발견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급전이 있다. 완전히 다른 결과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 또는 연속된 행동들. 오이디푸스가 가련한 내가 눈을 찌르기 이전에 일어난 쓰라리고 쓰라린 일들이 급전peripeteia이다. 상황들의 연속적인 반전들reversal of situation, 급전이라고 하는 건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서 그것을 발견anagnōrisis했다. peripeteia와 anagnōrisis,  카타르시스로 가기 직전에 빠른 속도로, 급전peripeteia이라고 하는 건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anagnōrisis는 recognition이니까 인간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일들이 일어난 것은 급전이다. 아폴론이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쓰라리고 쓰라린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오이디푸스라는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가련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련함으로 이르게 됐고 그러니까 그냥 심상한 일이구나 라는 게 아니라 이게 나와 관련된 일이구나, 관련된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이 일에 치명적으로 얽혀 있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상태로 이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이디푸스는 가련한 내가 내 눈을 찌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오이디푸스를 보고 사람들이, 눈을 찌르니까 공포 아니겠는가, 애련과 공포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다. "가장 우수한 발견은 <오이디푸스>에서의 그것과 같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이다." 손명현 선생님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이렇게 얘기했는데, 급전을 수반되는 발견, 급전에 이어지는 발견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애련이나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그러니까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의 살해자이고 생모 이오카스테를 처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서 행복에서 불행으로부터 급전하고, 그런데 행복에서 불행으로 급전하는 것은 또 앞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급전들에 의해서, 급전과 발견이 급전이 다 일어난 다음에 발견이 다 일어나는 게 아니라, 급전 1 그다음에 발견 1, 그다음에 다시 급전2, 발견 2, 그래서 급전과 발견들이 연쇄고리로 이어지면서 증폭되어 간다. 우리가 흔히 소설보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일어난 전개를 소설로 쓰면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거야 이렇게 얘기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우연한 그런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한번 깊이 음미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오이디푸스 왕》 1327행에서 1334행에 있는 부분이다. 

《시학》 1452a 34-1452b 1 
가장 우수한 발견은 <오이디푸스>에서의 그것과 같이 급전을 수반하는 발견이다. 물론 이와는 다른 종류의 발견도 있다. 왜냐하면 무생물이나 우연적인 사물에서도 위에서 말한 일이 어느 의미에 있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어떠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였는지 안 하였는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롯 및 행위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발견은 처음에 말한 발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애련이나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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