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1 제20강(2)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9.19 문학 고전 강의 — 51 제20강(2)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0강(2) 
- 애련(연민. eleos)과 공포(phobos)
오이디푸스: “그대는 내가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 가르치지도 말고, 더 이상 조언하지도 마시오.” (1369-1370)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1414-1415)

- 시와 역사
“시는 역사(istoria)보다 더 철학적(philosophōteron)이고 중요(apoudaioteron)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ta katholou)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ta kath’ hekaston)을 말하기 때문이다.”(⟪시학⟫, 1451b 5-6) — 시가 전달하려는 목적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 확보되었다면 개별적인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창작이 만드는 가능의 세계는 경험세계보다 지적이고 이상적이다. 

 

 


지난번에 《참주 오이디푸스》를 읽으면서 신에게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다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했다. 다시 읽어보면 코로스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분이여, 어찌 감히 자기 눈을 / 멀게 하셨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가 아폴론이다. 그런데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라고 말한다. 왜 코로스가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라고 물었을까. 사람이 자기 눈을 찌른다는 것은, 특히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는 자기 눈을 찌른다 라고 하는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죽음에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쉽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코로스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평균적인 생각이다. 오이디푸스는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이 아폴론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내 이 두 눈은 내가 찔렀다 라고 얘기를 하니까 코로스가 뭐라고 한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는 "그대는 내가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 가르치지도 말고, 더 이상 조언하지도 마시오." 이것은 귀담아듣지 않겠다 라는 얘기가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대사가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점차적으로 자기가 모든 것을 짊어진다고 하는 것이 확고해지는 그런 방향으로 간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당겨서 스스로 안고 가겠다는 얘기를 하기 전에 일단 그대는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훌륭하다라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무언가를 읽을 때 속된 말로 '내 입맛에 맞네, 내 성질에 맞네, 난 이렇게 하는 게 나아'하는 지점들이 있다.  

《오이디푸스 왕》 1327~1334행
코로스: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분이여, 어찌 감히 자기 눈을 / 멀게 하셨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오이디푸스 왕》 1369-1370행
오이디푸스: 그대는 내가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 가르치지도 말고, 더 이상 조언하지도 마시오.


《참주 오이디푸스》를 읽으면서 이런 부분들이 어쩌면 제 성미에 맞아서 그런 것인지 좋았다.  "가르치지도 말고, 더 이상 조언하지도 마시오."가 막 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단 이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에 따라서, 가령 "그대는 내가 한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 가르치지도 말고, 더 이상 조언하지도 마시오." 다음에 '나 이대로 인생 망가뜨리고 마구 살 거야, 대충 살 거야'라고 말하면 이것은 인생을 포기한 그리고 자기 의식을 버린 사람으로 가지만 여기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중요하다. 1370행에서 그렇게 말하고 1414행에서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라고 말한다. 여기에 퇴장가에 나오는데, 이 상황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등장을 한다. 사람이 눈을 찌르고 등장하는 것, 실제 연극 무대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들을 보면 이 부분이 굉장히 참혹하다. 참혹한 장면이 나오니까 아주 당연하게 관객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공포가 등장했다.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려면 공포phosbos가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라고 하면 공포에 휩싸인 관객들이 오이디푸스를 보고 있는데 그 지점에서 오이디푸스가 과잉 공포를 뿜어내면 '자기가 찔러놓고 난리네'라는 식으로 공포가 식는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내 눈은 내가 찔렀다, 내게 어떤 동정도 하지 마라 라면 하면 그런 분위기로 가버린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그 공포에 휩싸였던 관객은 오이디푸스가 그런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겠다고 결심한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니까 이제 공포가 누그러지고 그 사람이 불쌍해지기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불쌍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바로 그의 딸이자 여동생들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등장이다. 바로 그 순간에 관객들의 심정이 연민으로 변하는 것이다. 《문학 고전 강의》에 써두었듯이 "오이디푸스가 구차한 변명을 일삼으며 허튼 소리를 하고 있었다면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등장은 몹시도 역겨웠을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분명히 모르고 저지른 잘못hamartia이긴 하지만, 이제 그 사람이 자신의 눈을 찌르고 등장해서 관객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 시점에서 그렇게 나의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말고는 없다, 내가 다 감당해야겠다 라고 말했을 때 이스메네와 안티고네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관객은 연민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공포와 연민, 애련과 공포,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가 등장하게 된다. 그게 이제 《참주 오이디푸스》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극적인 지점이다. 

《오이디푸스 왕》 1414-1415행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제20강 208 
오이디푸스가 구차한 변명을 일삼으며 허튼 소리를 하고 있었다면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등장은 몹시도 역겨웠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렇게 공포와 연민은 나오지 않는다. 복수의 여신들이 어떻게 해서 자비로운 여신들이 되었는가, 차가운 이성적 해결책, 신의 도움으로 사태가 마무리되니까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그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건 안도감이다. 그냥 마음을 졸이면서 복수가 언제 끝나려나, 끝나기는 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끝나려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 상황, 그 상황이 안도감으로 바뀌면서 드라마가 끝난다. 그러니까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아테나 여신에게 감사하게 된다. 인간이 거기서 하는 일은 없다. 인간은 그냥 계속 복수의 사슬을 엮어갈 뿐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하찮다. 오레스테스도 복수에 매달려서 아폴론신에게 애원하고 그러는데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사 중에 가장 무서운 대사가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아니겠는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잘못, 비록 모르고 저지른 잘못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단호한 태도, 이게 극심한 고통, 이 고통이라는 게 눈을 찌른 고통만은 아니겠다, 그 고통이 이어진다고 할 때 여기서 인간은 연약하다. 연약한 존재로서 인간이 급격하게 장엄한 장면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포클레스의 《참주 오이디푸스》가 굉장히 탁월한 작품이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나타나지 않고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인간이 얼마나 자기를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짊어질 수 있는가. 이것은 어렵다.  오이디푸스는 딱 이 말을 하고서 떠나버린다. 여기서 인간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하나의 본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래서 이 작품은 철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이다. 추론을 통해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것을 얘기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렇게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하나의 테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런 점에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보면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그게 철학적이다. 지금 오이디푸스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본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창작이 만드는 가능의 세계가 훨씬 더, 경험 세계는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될 하나의 이상 이런 것들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도덕과 윤리를 얘기하는데. 도덕이나 윤리나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도덕은 moral, 하나의 관습 속에서 형성된 규범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도덕은 이상적인 게 아니다. 윤리는 인간이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을 제시한다. 하나의 본paradeigma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주의가 반드시 그 밑바탕에 놓여 있다. 칸트의 도덕철학이라는 말보다 칸트의 윤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적당한 표현인 것이다.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관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지금 여기서 소포클레스의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적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그게 소포클레스의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 아닐까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시학》 1451b 5-6
시는 역사(istoria)보다 더 철학적(philosophōteron)이고 중요(apoudaioteron)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ta katholou)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ta kath’ hekaston)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제20강은 마무리를 하겠다. 제20강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왕을 잘난 오이디푸스, 흔들리는 오이디푸스, 파멸하는 오이디푸스 그리고 결말까지 해서 넷으로 나누는데, 제21강부터는 그렇게 나눈 것에 근거해서 하나씩 설명해 보겠다.  주인공들은 누구나 다 그런 극적인 변화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이행들을 거쳐 간다. 그런데 그 이행이 일어날 때마다 관객에게 덜커덕 하고 감격의 가슴속에 뭔가를 남겨두는 것,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탁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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