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5 제21강(4)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10.10 문학 고전 강의 — 55 제21강(4)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1강(4) 
- 테이레시아스의 말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오.(353)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362)
크레온이 아니라, 그대,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379)
바로 오늘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일 것이오.(438)

 

 

《문학 고전 강의》 제21강은 분량은 적은데 여러 번에 나눠서 읽고 있다. 이 부분이 《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데 있어서 《오이디푸스 왕》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이디푸스에 관해서 차근차근 좀 살펴보는 중이다. 지난번에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에게 부탁을 하다가 그다음에 약간 버럭하다가 마지막에는 화를 내는 것까지 얘기했다. 순식간에 바뀐다. "제발 부탁이오"라고 시작했다가 "악당"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그래서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성격을 문제 삼는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성격이라고 하는 건 타고나는 게 아니다. '성격이 운명'이라는 말도 그렇고, 타고난 어떤 성격이 운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성격을 만드는 것이고 그런 행동들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객관화하기가 어렵다.  

테이레시아스가 하는 말들이 이 드라마에서 주제들이다. 218페이지를 보면 《오이디푸스 왕》 353행과 362행에서 테이레시아스가 하는 말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요",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이렇게까지 말해줘도 오디이푸스는 믿을 수 없어서 크레온이 범인이 아니냐고 말하는데 테이레시아스는 세 번이나 오이디푸스 당신이 범인이야 라고 말한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요",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그래서 이제 오이디푸스가 크레온이 범인 아닌가 하고 말하니까 다시 "크레온이 아니라, 그대,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라고 계속 그렇게 말을 한다. 그대가 그대의 재앙, 즉 너 오이디푸스가 원인이고 그것 자체로 너 오이디푸스가 너에게 재앙이다. 물론 사사화私事化 personalization, 개인의 어떤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벌어진 사태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삭제해버리고 개인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것, 그걸 사사화, 사적인 일로 만들어버린다 라고 하겠지만 그것도 결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원인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항상 일단 자기부터 돌아보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테이레시아스의 말이 참 뼈저리다. 너 오이디푸스가 범인일 뿐만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가진 성정이 네가 저지른 죄악의 원인이기도 하다. 길게 오이디푸스가 변명을 늘어놓고 어떤 일을 했고 이거 다 소용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 이전에 자기가 뭔가 원인이 되어서 벌려버린 일들이 있다. 

《오이디푸스 왕》 353행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요.

《오이디푸스 왕》 362행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오이디푸스 왕》 379행
테이레시아스: 크레온이 아니라, 그대,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지요.


그래서 테이레시아스의 이 말은 범인임을 지적했는데 그리고 범인 정도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413행에서 420행 사이의 얘기는 오이디푸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누구나 다 한 번쯤 생각해 봐야 되는 그런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남들이 슬금슬금 나하고 얘기를 안 하려고 그러면 남 탓을 할 수도 있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테이레시아스가 한 말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돌아보면 어떨까 싶은 때가 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 이 책은 늘 손 닿는 곳에 놔둔다. 로버트 페이글스의 그 영역본과 예전에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은 손 닿는 곳에 이렇게 놔둔다. 책상 밑에도 책꽂이가 있는데 거기에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단테의 《신곡》와 함께 놔둔다.  

최근에 나온 Emily Greenwood의 《Thucydides and the Shaping of History》와 같은 책들도 읽어야 한다. 저는 이제 투퀴디데스를 그리스 비극 드라마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물론 투퀴디데스는 수사학자로서 뭔가를 썼지만, 이런 책을 봐서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도 '다시 좀 읽어봐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읽어보고 강의를 해본 적은 없으니까 그렇다. 에밀리 그린우드의 책을 읽고 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이 사람들이 보고 있는 관점이 이런 거구나. 그런데 나는 이걸 어떻게 봐야 되나'하는 것들, 얇아도 이런 게 되게 좋은 책들이다.  


테이레시아스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어오. 그대가 어떤 /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 이게 뼈때리는 말이다. 어디서 누구하고 사느냐. 너의 어머니와 살고 있지 않냐는 얘기이다. "그대가 누구 자손인지 알고나 있나요? 그대는 모르겠지만, / 그대는 지하와 지상에 있는 그대의 혈족에게는 원수외다." 지하에 있는 사람은 라이오스 왕일 테고 지상에 있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스메네와 안티고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라는 이중의 채찍이 언젠가 / 그대를 무서운 발걸음으로 뒤쫓으며 이 나라 밖으로 몰아낼 / 것이오." 콜로노스로 가게 되니까 추방당한다. "지금은 제대로 보는 그 눈도 그때는 어둠만 보게 / 될 것이오." 테이레시아스는 장님이기 때문에 눈을 가지고 얘기를 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말이다. 어둠만 보게 된다는 것은 실제로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고 나서 테이레시아스를 물러나게 한 다음에 오이디푸스가 "인간들 중에 누가 나를 낳았지?" 이제 이게 셋째 물음이다. 내가 누구냐라고 물은 다음에 근원을 따져가 보는 것이다. 로버트 페이글스의 영역본을 보면 "Who is my father?", 누가 나의 아버지인가,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라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뿐만 아니라 오뒷세우스도 그런 질문을 계속 받는다. 당신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느냐 이런 물음을 계속 받을 때 그것에 대답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은 반드시 실존철학의 물음만은 아니다. 모든 드라마 그리고 모든 철학의 물음이다. 방금 전에 얘기한 Emily Greenwood의 《Thucydides and the Shaping of History》, 이 책을 읽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이 글을 읽지, Emily Greenwood가 읽은 책을 내가 읽으면서, Emily Greenwood를 통해서 투퀴디데스를 읽고 소포클레스를 읽는 나는 누구이지, 나는 왜 이걸 읽는 것이지 이러한 물음 없이 그냥 계속 읽기만 하면 그냥 그것은 탐독을 하는 것일 뿐이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읽어야 이제 내가 읽는 것이다. 2023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내가 읽어야 다르게 읽을 수도 있고 어떻게든 나의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두 개의 물음은 테바이를 더럽힌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니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사태들이다. 원인을 묻고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묻고 그랬는데 이제 오이디푸스 자신에 대해서 이제 묻는 것이다. 그러니 테이레시아스가 그대가 그대의 재앙의 원인이라고 일갈한 것도 그렇게 썩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왕》 413-420행
테이레시아스: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어오. 그대가 어떤 / 불행에 빠졌는지, 어디서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말이오. / 그대가 누구 자손인지 알고나 있나요? 그대는 모르겠지만, / 그대는 지하와 지상에 있는 그대의 혈족에게는 원수외다. / 그러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라는 이중의 채찍이 언젠가 / 그대를 무서운 발걸음으로 뒤쫓으며 이 나라 밖으로 몰아낼 / 것이오. 지금은 제대로 보는 그 눈도 그때는 어둠만 보게 / 될 것이오.

《오이디푸스 왕》 437행
오이디푸스: 인간들 중에 누가 나를 낳았지?


그러니까 이제 테이레시아스가 대답을 한다. "바로 오늘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일 것이오." 오늘에야 비로소 그대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너는 오늘 이제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 참다운 인간으로서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게 오늘이다. 

《오이디푸스 왕》 438행
테이레시아스: 바로 오늘이 그대를 낳고 그대를 죽일 것이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생일이라는 것을 기념하여 여럿이 모여서 뭘 하고 그런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야지 하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연적 탄생natural birth이다. 그러면 정신적 탄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적 탄생은 날짜가 정해지지 않는다. 오늘 나는 비로소 내가 나라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그때 거듭난 것은 참 개판으로 거듭난 것이었네 하면 스스로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하고 그러다 보면 또 거듭나게 된다. 그러니 정신적인 탄생spiritual birth라고 하는 건 끝없이 이어진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면 그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탄생의 날을 샌다고 하는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것들을 자연적 행위라고 하고 하는데 자연적인 것에 굴복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이라고 하는 정신적으로 의미를 계속 부여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아직은 이게 뭔 말인지 모른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철없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는군", 테이레시아스가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그대가 가장 능하지 않았던가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조롱하는 것이다. 너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잘 풀어서 테바이의 왕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신만만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하고 있다. 그거 풀 줄 알면 벌써 성인이 되었겠다. 그게 안 되니까 지금 계속 이렇게 테이레시아스에게 조롱받는다. 이제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가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버티고 있으면 악당이 되는 것이고, 여기서 흔들리는 오이디푸스로 나아가서 전환을 이루면 그나마 인간의 꼴을 갖춘 사람으로 죽게 되고 그런 상황이 된다. 다음에는 제22강 자신에 대한 앎이 파멸로 귀착된 오이디푸스를 읽어가겠다. 

《오이디푸스 왕》 439-440행
오이디푸스: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는군.
테이레시아스: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그대가 가장 능하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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