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9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2023.10.24 문학 고전 강의 — 59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1a-b
시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즉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kata to eikos ē to anankaion) 가능한 것”을 말한다.  
“시는 역사(istoria)보다 더 철학적(philosophōteron)이고 중요(apoudaioteron)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ta katholou)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ta kath’ hekaston)을 말하기 때문이다.” 

-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27-28
무사 여신들,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많이 할 줄 아노라. / 그러나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도 노래할 줄 아노라.” 

 

-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
“만일 누군가가 비극을 보며 여기 재현된 사건이 진실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조리 거짓 재현인가? 이 또한,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서사시의 잣대를 비극에 적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한 것이다.”(p. 199)

 

 

《문학 고전 강의》 오늘은 근대의 문학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동안 에우리피데스까지 우리가 고대의 문학 작품들을 읽었다. 그래서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 부제가 희랍에서 서구 사유의 탄생인데,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이라는 챕터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겠다. 두 번에 걸쳐서 핵심 부분만 그러니까 비극과 관련된 부분만 정리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비극 작품은 일반적으로 신화에서 그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얘기를 한다.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 그 신화라고 하는 것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올 때 처음부터 신화가 비극으로 들어와서 어떤 역할을 하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하는 과정이 있을 테고,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되 비극은 그래도 철저하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뭔가 드러내 보여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는 신화일 뿐이고 그게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해서 비극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의심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비극의 작가들은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오되 그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 벌어지는 사건들을 뭔가 재현해 보여야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정리해서 얘기해보자면 일반적으로 희랍비극은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온다고 논의되고 있다.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오면 그냥 그게 환상극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고 '신화에서 그런 일이 있었네' 하고 그런 데서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현실 세계에 있는 뭔가를 지칭하고 있어야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챕터의 제목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오되 현실을 재현하는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냄으로써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탁월한 작품으로 만들어졌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소설을 하나의 드라마로 본다면 소설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허구의 이야기이다.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허구이면서 사람들에게 일정한 정도로 현실을 반영하거나 또는 현실을 재현하거나 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극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립을 하는 것이다. 

지난번까지 읽었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보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어떤 moira와 같은 운명에 얽매여 있는 그런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에우리피데스가 고대의 그리스 비극의 핵심적인 어떤 작법을 버린 것인가.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에우리피데스가 살고 있던 시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운명을 믿지도 않았고, 그런 것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인간이라고 하는 건 이제 더 이상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그 당대의 현실,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부르노 스넬의 이 챕터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는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말이다.  시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즉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것"을 말한다. 즉 시는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즉 그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것, 그것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 밑에 보면 내용이 합해지는 얘기가 있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와 시의 구별이다. 부르노 스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는 역사와 문학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 문학이 역사보다도 "좀 더 철학적"이라고 말한다."  더 철학적philosophōteron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원래 서사시인들은 시인이 거짓을 말한다 하는 것을 비난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보면 그런 말이 있다. 27-28행에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많이 할 줄 아노라. / 그러나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도 노래할 줄 아노라." 무사의 여신들이 자기에게 알려준다고 하는, 칼리오페 여신이 헬리콘 산에서 헤시오도스에게 이렇게 알려준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처음에는 시인들은 거짓을 말한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비극으로 들어오면서 신화와 현실의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신의 발견》 6장 189 "역사가는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시학』 1451a)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는 역사와 문학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실제로 기원전 5세기에는 그랬다.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역사보다도 "좀 더 철학적"이라고 말한다. 

《시학》 1451b1-5 이상 말한 바로부터 또 명백한 것은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말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즉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것을 말하는 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계보》, 27-28 무사 여신들, "우리는 진실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많이 할 줄 아노라. / 그러나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진실도 노래할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신화의 어떤 모티브를 재현하면서, 신화를 보고 그것에 감동을 했다면, 비극 작품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그 신화와 현실의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에 들어오면서부터 신화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왜냐하면 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무대 위에서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부르노 스넬은 그 지점을 "신화의 서사시적 서술은 부활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한다.  서사시에서는 신화를 가져다가 말로만 실현을 하니까 얼마든지 환상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오뒷세이아》에서 보면 판타지적인 그런 얘기들이 쭉 나오는데, 그것을 극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극은 단순히 현실성을 추구할 수 없었고 극장의 요구에 따라 사건을 고쳐야만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각각의 장면들은 어떻게든 같은 정경에서 끝까지 연출되어야만 했고, 극전개는 대화로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가져다가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불가능한, 그러다 보니까 극작가는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기는 하되 거기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있음직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관념이 개입되어 들어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일어난 현실의 사건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현실을 드러내서 현실을 재현한다고는 하지만 그 현실의 관념을 결합시켜서 재현하게 된다. 

《정신의 발견》 6장 193 서사시와 서정시에 다룬 이야기들의 풍부한 신화 세계가 비극 안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신화와 현실의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정신의 발견》 6장 194 신화의 서사시적 서술은 부활되지 않았다. 극은 단순히 현실성을 추구할 수 없었고 극장의 요구에 따라 사건을 고쳐야만 했다. 각각의 장면들로 극 전개가 구성되어야만 했고, 희랍 무대에 막이 없어서 각각의 장면들은 어떻게든 같은 정경에서 끝까지 연출되어야만 했고, 극전개는 대화로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제 비극을 보면서 저게 진실이냐, 즉 historical fact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거짓이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것이 모두 다 거짓이냐 라고 물어보면 완전히 거짓이라고 또 말할 수는 없다. 진실과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의 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저것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즉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그 무엇을 비극 작품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오이디푸스 드라마는 신화에서 뭔가를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날 만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했겠는가. 그렇지만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저런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저런 일을 벌일 만도 하다 라는 생각도 좀 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 보면 비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정말 죽었다 깨나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런 사건을 다루는 것도 아닌, 그런 것이 되었기 때문에 비극은 현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정신의 발견》 6장 199 만일 누군가가 비극을 보며 여기 재현된 사건이 진실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조리 거짓 재현인가? 이 또한,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진실과 거짓이라는 서사시의 잣대를 비극에 적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한 것이다. 


부르노 스넬이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점에서는 서사시와 다르지 않지만, 서사시에서는 무한대로 인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현실과는 무관한 어떤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다면, 비극에서는 아무래도 무대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 무대에서 인간이 뭔가를 행위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력은 제약되는 대신에 현실을 가져와서 그 현실을 재현한다. 그런데 또 무대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현실을 재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 개별적인 사건들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그걸 구성하였고, 바로 그것이 현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 것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그게 이제 아이스퀼로스에서는 또는 에우리피데스에서는 또는 소포클레스에서는 어떤 식으로 그게 전개되었는가는 부분이 후반부에 있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토요일에 또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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