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60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 강의노트/라티오의 책들 2021-24
- 2023. 10. 30.
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2023.10.28 문학 고전 강의 — 60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 비극의 재현 방식“비극은 신화 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도 않으며,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신화 사건들을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는다… 아이스퀼로스는 인간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로…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했다.”
- 호메로스의 세계와 비극의 세계“호메로스 세계의 인간은 아직 흔들림 없는 세계에서 태어났고 세계는 분명하게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은 이에 명료하게 대답한다.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보다 위대하며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이며, 인간의 통찰과 독립적으로 확고하게 항상 존재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이 신들의 세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 에우리피데스의 성취“에우리페데스는 인간들을 옛 연관들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영웅들을 행위로 추동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행동은 정당했나?”“특정 인물의 호사스러운 치장이 아이스퀼로스의 특징이라면, 누더기는 에우리피데스의 특징이었다. 남루한 일상은 화려한 치장보다 현실적이다.”(Wie für Aischylos die Prachtgewänder, sind für Euripides die Lumpenkleider bestimmter Personen charakteristisch. Der schäbige Alltag ist wirklicher als das feierliche Gepränge.)
- 정당성의 사변을 규정하는 문제들“궁극적으로 사회적 표상들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 신적인 것이 현상계 가운데 찬란하게 빛난다는 믿음이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정의로운 행위의 문제들이 차츰 정당성의 사변을 규정하게 되었다.”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
지난 화요일에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에 있는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의 전반부를 설명했다.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와 있는 얘기로 "시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즉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kata to eikos ē to anankaion) 가능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고, "시는 역사(istoria)보다 더 철학적(philosophōteron)이고 중요(apoudaioteron)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ta katholou)을 말하는 경향이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ta kath’ hekaston)을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시가 말하는 보편적인 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진리라고 하는 게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진리를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 사실과 부합하는 것을 진리라고 할 것인지, 사실 그게 진리의 개념이다. 미래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 이를테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추론하는 것, 그게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 방식이다. 진리를 말하는 방법은 굉장히 오랫동안 철학에서나 역사에서나 문학에서나 아주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주제이다. 흔히 요즘에 인문학이라는 말 아주 많이 쓰이니까, 저는 그런 말을 잘 안 쓰는데 긍정적인 의미로 써보자면,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 중간에 어중간하게 사회과학이 있다. 사회과학은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모호하니까 그냥 두고, 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면 반드시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나에게 아주 명백하지 않는가, 나에게 아주 명백한데 어떡하란 말인가 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앞서 읽었던 아이스퀼로스의 드라마 《오레스테이아》에서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 죽이려고 하는 것에서 많은 고민들이 오고 간다. 신들은 거기에 개입해 들어온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자연과학자는 '오레스테스, 당신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살인 행위이고 따라서 그 살인 행위에 대해서 명백하게 귀책이 작용하며 당신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팩트이다. 그리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법칙은 살인 행위에 대한 그의 합당한 처벌이다. 그러면 고민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만 받아들이면, 자연과학으로써 인간의 모든 윤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뭔가 개운할까. 카타르시스가 일어날까. 그 상황에서 '나의 진실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뭘 그렇게 고민하는가, 그냥 사이언티픽 팩트만 확인하고 그것에 따라서 해결하면 되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과연 우리는 그것에서 만족할 수 있겠는가, 만족이라고 하는 것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라고 말할 때, 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니까,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사실이 역사이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이제 브루노 스넬이 묻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비극을 보며 여기 재현된 사건이 진실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 물음은 이거 실제로 일어난 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어떤 삶의 현실 또는 드라마틱한 현실, 삶의 현실과 비극적 현실, 즉 드라마 속에서 구현된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허구를 가지고 왜 그렇게들 열광하고 난리인가'라고 물어본다. 희랍비극을 보면서 여기에 나온 것이 진실인지는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충분히 재현된 사건, 실제로 일어난 것을 재현한 사건이 아니라 해도 그것에 진심일 수는 있다. 어떤 과거로부터 그 어떠한 그 경험도 아닌 그런 것들로부터 가져온 어떤 이념이 진실일 수 있다. 누군가가 비극을 보며 여기 재현된 사건이 진실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실제로 일어난 것을 재현한 것이 아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모조리 거짓 재현인가, 또 그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나는 저 사람에게 진실이야 라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이게 모조리 거짓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인간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들어있고 여러 차원이 개입되어 있다. 지금 《문학 고전 강의》를 읽고, 브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읽고 있는데 이건 진심이다. 《문학 고전 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하고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사람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라는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의 잣대가 된다. 앞부분에서 자연과학적 진실이다, 역사적 진실이다 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라는 것이 진실의 잣대 척도가 있다면, 지금 《문학 고전 강의》에서, 드라마에서 진심인 것은 이것이 얼마나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서 진실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판별해 낸다. 그래서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브루노 스넬은 "진실과 거짓이라는 서사시의 잣대를 비극에 적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했다고 하면 비극에서 서술되고 있는, 어떤 드라마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이걸 봐야 하겠다 라는 얘기겠다. 그러면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를 얼마나 잘 의미 있게 보여주는가가 드라마의 중요한 진실의 척도가 된다. 그래서 헬라스 드라마는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진실한가를 잣대로 삼는다. 인간의 내면에서 얼마나 자기가 이것에 대해서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아주 중요한 진실의 척도로 삼는 것이다. 진실의 척도라는 건은 얼마나 그가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상황은 첨예한 상황들이다. 어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런데 그 사건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진심으로 대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첨예한 상황을 찾았다는 것이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말하자면 서사시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 210페이지를 보면 "아이스퀼로스는 이러한 첨예한 상황들을 찾았다. 그 까닭은 그에게 사건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했기 때문이며, 인간 행위의 본질은 결단에 있기 때문이다. ··· 극작가는 행위의 정수를 표출하기 위해 행위들을 구성한다"고 했다. 행위들을 구성해서 첨예한 상황들에서 결단하는 인간의 모습, 그래서 그러한 결단에 의해서 드러나는 행위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극작가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리를 다시 해보면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했다 라고 하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했다. 그건 우리가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팩트가 중요하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하는 것이다.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즉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를 가장 잘 표출해낼 수 있는 첨예한 상황들을 극작가는 찾아낸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첨예한 상황들에서 어떤 행위를 했고 어떤 결단을 내렸는가를 본다는 것이다.
《정신의 발견》 6장 210 아이스퀼로스는 이러한 첨예한 상황들을 찾았다. 그 까닭은 그에게 사건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했기 때문이며, 인간 행위의 본질은 결단에 있기 때문이다. ··· 극작가는 행위의 정수를 표출하기 위해 행위들을 구성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중요하다고 호소하고자 하는 것과 무관해 보이는 것들은 생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관계가 생략될 수 있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브루노 스넬은 "비극은 신화 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도 않으며,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신화 사건들을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서사시도 물론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지만 비극은 행위들을 재구성한다. 그 첨예한 상황들에서 내적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의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로, 서사시는 내면적 변화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정말 한없이 설명한다. 특히 《일리아스》가 바로 그런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사태들을,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사람이 창을 찔러서 몸을 뚫고 들어가는 그 과정을 정말 하나하나 서술해 나아간다. 그런데 아이스퀼로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관계를 희생시킨다는 점에서는 서사시와 비극은 똑같은 점이 있는데, 인간의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하다 보니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하는 것이 비극이고, 그것이 바로 아이스퀼로스로 하여금 헬라스 비극의 본격적인 시작을 열게 한 그런 창작의 힘이겠다.
《정신의 발견》 6장 210 비극은 신화 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오지도 않으며,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신화 사건들을 역사적 진실로 여기지도 않는다.
《정신의 발견》 6장 210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의 행동을 내면적 변화의 결과로 파악한 최초 인물로, 뭔가 대단한 통찰을 가진 사람에게서 흔히 있는 일인바, 내면적 변화의 본질을 강조했다.
이제 내면적 변화에 해당하는 것들인 결단, 정의, 숙명 이런 관념들이 행위 직전의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게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아직은 인간이 신에게 이렇게 휘둘리기도 하고, 세계가 분명하게 분명하게 흔들림 없는 세계이고, 그 안에서 그 신들의 이끌림을 받는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쓴 첫 문장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의 그 시대가 서사시의 시대이다. 멋지긴 한데 그 시대로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그 시대는 그 시간은 끝났다. 근대라고 하는 이 시간에 들어오면 과거의 경험을 바탕을 두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고 미래를 안내 받을 수 있는 그런 참조 지평으로 지침으로서의 과거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시대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하는 '말안장시대'인 1750년에서 1870년 사이,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던, 이제 우리는 과거를 참조할 수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과거를 참조할 수도 없다. 어쩌면 이렇게 지금 과거를 참조할 수도 없는 우리들의 이 처참한 현실에 애써 눈을 좀 감고 싶어서 이렇게 과거의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이렇게 옛날 고전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이 틀림없고, 고전을 읽음으로써 자기의 뒤처짐을 억지로 변명하려는 쓸데없는 인간들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이론》 1장 27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아이스퀼로스는 그렇게 확고하고 안정된 세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니까 아이스퀼로스는 루카치 같은 사람이다. 루카치는 그 물음은 아이스퀼로스보다는 훨씬 나중에 한 셈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아테나 여신이 개입을 한다고 해도 뭔가 좀 찜찜하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는 아폴론이 끝까지 돌봐주지도 않는다. 복수의 여신들Erinyes이 쫓아가니까 어떻게 해주지 못하고 결국에는 아테네 여신한테 외주를 주고 말았다. 아폴론도 이성의 상징이고 아테나도 지혜의 여신이고, 헤겔의 《법철학》에 나온 유명한 구절처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그때의 미네르바가 로마 신화에서의 아테나 여신이다. 아테나 여신이을 지혜의 여신이라고 하는데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 신이 아니다. 사실은 이도 저도 못 할 때 갈등하고 고민하는 신이다. 그리고 인간들과 협력해서 뭔가 판결을 할 수밖에 없는 신이다.
아이스퀼로스에서는 인간은 신들도 믿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고,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현실과의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들이 뭔가 답을 준다. 그러다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 오면 어떻게 되는가. 브루노 스넬은 "에우리피데스는 인간들을 옛 연관들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라고 말한다. 제6장 읽으면서 제일 눈에 들어온 문장이 이것이다. "특정 인물의 호사스러운 치장이 아이스퀼로스의 특징이라면, 누더기는 에우리피데스의 특징이었다." 이 표현이 정말 좋다. "남루한 일상은 화려한 치장보다 현실적이다."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에서도좀 남루해졌는데 에우리피데스에서 오면 엄청 남루해진다. "궁극적으로 사회적 표상들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 신적인 것이 현상계 가운데 찬란하게 빛난다는 믿음이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정의로운 행위의 문제들이 차츰 정당성의 사변을 규정하게 되었다." 정당성의 사변, 무엇이 옳고 그른가, 이것을 행해야 마땅한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참 심각하게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그전에는 고민할 필요 없었다. 그런 것들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행위의 문제들이 정당성의 사변을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게 마땅한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마구 변설하는 것 이게 정당성의 사변이다. 그런데 정당성의 사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었다. 누가 이게 마땅하고 옳은 일인지 물어보면 성경에 나와 있잖아, 불경에 나와 있잖아 또는 아폴론 신이 다 얘기한 거야 라고 말하니까 사변 자체가 일어나질 않았는데,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흔들림으로써 내가 이게 마땅히 해야 될 일인가, 이게 옳은 일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정당성의 사변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 사변의 핵심 문제는 바로 정의로운 행위의 문제들이 되었다.
《정신의 발견》 6장 213 에우리피데스는 인간들을 옛 연관들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정신의 발견》 6장 214 특정 인물의 호사스러운 치장이 아이스퀼로스의 특징이라면, 누더기는 에우리피데스의 특징이었다. 남루한 일상은 화려한 치장보다 현실적이다.
《정신의 발견》 6장 215 궁극적으로 사회적 표상들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 신적인 것이 현상계 가운데 찬란하게 빛난다는 믿음이 소멸했음을 의미한다. 정의로운 행위의 문제들이 차츰 정당성의 사변을 규정하게 되었다.
아이스퀼로스에서는 그런 것들에 신들이 개입하면서 조금 이렇게 논의가 되었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 오면 어떤가. 그런 얘기 한마디도 없다. 그냥 죽여 서로 죽여라, 니들끼리 서로 죽여라라는 분위기가 욕망에 의해, 지식에 의해, 영혼에 이른 활동에서 빚어지는 갈등에 의해 인간이 규정되기에 이르렀고 이게 바로 이제 에우리피데스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거는 정말 비참한 현실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당히 힘들다. 올바르고 마땅하고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하는, 정당성의 사변을 떠드는 일 자체가 굉장히 힘들다. 이제는 성경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수없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모든 권위를 잃어버렸고, 철학도 마찬가지로 인간에 관한 어떤 올바름을 제시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 중 하나였는데 이제 그런 과제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게 철학의 업보겠다. 지금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부분을 소개해 드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정당성 사변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의 준거 틀을 어디다가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정당성 사변이다. 지금은 '내가 원해, 내 욕망이야, 돈이 되잖아'라는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시대, 지배적인 시대이다. 이게 옳은 것인가, 신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오레스테스의 고민은 차라리 승고하다. 그런데 《메데이아》는 그게 아니다. 거기까지 가는 건 정말 굉장히 먼 거리이다. 욕망에서 신적 올바름으로까지 사람을 이끌어가는 것은 정말 이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은 요즘에 읽었던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과 같이 실존철학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이고 신학자들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그것을 보여준 게 에우리피데스이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놀랍다. 근대 드라마에서는 올바름의 기준인 정당성의 사변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에우리피데스의 후예들이니까, 민감하게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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