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2023.10.17 문학 고전 강의 — 57 제23강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3강
-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운 소재분열된 자아. 주인공 메데이아가 자신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것
오늘부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읽는다. 《문학 고전 강의》는 40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포클레스까지가 절반쯤 되고 에우리피데스가 23, 24, 25강으로 3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어찌 보면 고전 드라마와 근대 드라마의 중간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는 분명히 고전 드라마에 속하는데 그 형식이나 또는 내용을 보면 근대적인 특징, 근대적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굉장히 모호한 표현인데 그것은 차차 규정을 해 가기로 하고, 근대 드라마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행동의 모방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기보다는 주인공인 메데이아의 내면, 내면의 어떤 감정의 흔들림, 떨림, 터져 나오는 어떤 배신감 그런 것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메데이아》라고 하는 작품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극단에 달했을 때의 모습, 조금도 영웅적이려 하지 않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게다가 주인공은 희랍의 시대에서 영웅으로 지칭되지 않았던 여성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하는 점에서 《메데이아》는 영웅 서사시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그리고 서사시의 영웅들로부터 멀리 와 있지 않은 소프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의 작품들과는 좀 다르다. 그리고 신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마지막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기계로부터 온 신)로 인해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데, 그게 신적인 어떤 그런 건 전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게 《메데이아》라는 작품이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메데이아》를 다 읽고 나면 아이스킬로스에서 메데이아에 이르는 전체 내용을 집약한 부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 안에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이라고 하는 챕터 설명을 하려고 한다. 《메데이아》를 읽고 곧바로 이어서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보면 메데이아가 레이디 맥베스로 이렇게 옮겨온 듯한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원래 이 강의를 할 때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도 강의를 했었는데 그건 여기서 뺐는데 문학 작품이라고 여기기에는 좀 그런 것이기도 했고 또 구성을 맞춰보려면 메데이아는 어쨌든 맥베스와 참주 오이디푸스 사이에 있는 것, 이게 참 잘 들어가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제23강은 "배신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의 처참한 복수극"인데, 《문학 고전 강의》의 챕터 제목을 지은 일종의 규칙에 따르면 《메데이아》라고 하는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분열된 자아의 처참한 복수극"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다음에 제24강 증오를 위한 증오에 빠져든 메데이아, 제25강 저주를 실현하고 허망하게 사라지는 메데이아로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배신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자아가 《메데이아》에서는 아주 가감없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제23강을 보면 일단 문학 작품이다 하는 것의 어떤 정체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의를 했다. 문학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문학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소재를 문학적으로 다뤄야한다. 그게 사실은 중요하다. 어떤 소재를 다루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든지 문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건 '문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든 게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인데, 거기서 하우저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채 소화되지 않은 새 소재를 급격히 문학영역에 투입하였다" 라고 말한다. 어떤 소재를 다루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떤 소재든 다룰 수 있지만 예술적으로 채 소화되지 않았다고 얘기를 한다. 새로운 소재가 에우리피데스에서는 발견된다고 하겠는데, 바로 그 새로운 소재는 제가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분열된 자아이다.
희랍비극에서는 분열된 자아가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그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분열된 자아라고 해서 나쁜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자아가 분열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사회화가 안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 뇌social brain가 없는 사람이 분열된 자아를 가지지 못한다. 분열된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자기가 스스로에게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다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라고 할 때 분명히 나는 나인데, 내가 있고 그런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내가 있다고 하면 자아가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뭔가 반성도 하고 그다음에 객관적으로 검토도 해본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본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생겨난 것이니까, 나라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둘로 분열된 것을 말한다. 분열된 자아라고 하는 것이 하우저가 말하는 "예술적으로 채 소화되지 않은 새 소재"에 해당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소재는 고대 헬라스 비극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소재가 아닌가 한다. 문제는 새로운 소재가 무엇인가는 그건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인데, 하우저는 에우리피데스가 예술적으로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그 소재를 표현했다고 말한다. 도대체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 참 알쏭달쏭한 말이다. 예술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표현해야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참 곤란한 곤란한 고민들이다. 저의 생각으로는 예술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이러하다 저러하다 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면 그것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잠정적으로 생각을 해본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발견과 급격한 전환, 급전peripeteia이다. 발견과 급전을 통하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얘기를 했고, 그것을 하나의 자기의 창작 예술론의 핵심으로 삼았다. 미메시스mimēsis, 즉 모방과 급전peripeteia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서 참주 오이디푸스를 거론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어떤 진실의 발견과 그에 이어지는 급격한 전환 즉 급전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가, 꼭 그렇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냥 자신의 답답한 마음이 있는데 그 답답한 마음을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얘기한다 라면 '나라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다'라는 어떤 일종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저 사람이 다 했네'하는 그런 개운함을 유발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카타르시스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예전에 강의할 때도 그렇고 쓸 때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 아주 명료하게explicit하게 얘기를 해보면, 《메데이아》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배신을 당했으니까 이아손의 새 신부에게 독이 묻은 옷을 선물로 보내고 그 옷을 받아 입은 크레우사가 죽고 그다음에 크레우사가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긴 그의 아버지 크레온도 죽는다. 선물을 주고 돌아온 이아온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두 아들도 죽인다. 그런데 이제 제가 강의하면서도 강조했듯이, 이 책에도 강조하고 있듯이 메데이아가 그냥 정말 떠드는, 혼자서 떠드는 부분이다. 대체로 아니 반드시 헬라스 비극은 혼자서 떠드는 건 없다. 코로스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메데이아가 혼잣말을 한다. 자기가 자기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자기가 자기와 대화를 한다라는 것이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다. 분열된 자아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혼잣말을 하는 게 사실은 분열된 자아의 가장 뚜렷한 징표이다. 그렇게 본다면 《메데이아》가 하우저가 말한 것처럼 예술적으로 소화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좀 지나치게 낮춰 바라보는 것이 아닌다 싶다. 자기가 자기와 대화하는 장면들을 비극에다 집어넣을 생각을 했다 라는 점에서 보면 에우리피데스는 굉장히 탁월한 극작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해보였다 라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탁월함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본다.
오늘은 제23강에 있는 내용인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예술 작품에 있어서의 하나의 시도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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