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4 제21강(3)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10.07 문학 고전 강의 — 54 제21강(3)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1강(3) 
- 오이디푸스의 성격
테이레시아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 없는 곳에서 /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316~317)
오이디푸스: “알고 있거든, 제발 부탁이오. 돌아서지 마시오. / 우리 모두 탄원자로서 무릎 꿇고 빌고 있소이다.”(326~327)“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알면서도 말하지 않겠다니, / 그대는 우리를 배반하고 도시를 파괴할 작정이시오?“(330~331)“이 천하에 몹쓸 악당 같으니라고! 돌이라도 그대에게 / 화를 낼 수밖에.”(334~335) 

 

 

《문학 고전 강의》 제21강 세 번째이다. 제21강의 제목은 지혜와 권세로 오만해진 오이디푸스이다. 헬라스 비극에서 나타나는 가장 빈번하고 전형적인 주제가 바로 오만함hybris이다. 오이디푸스가 오만하기로 치면 비극의 주인공 중에 최고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보다 좀 모자라고 좀 덜 떨어진 녀석인데 오만했던 자가 누구인지를 보면 맥베스쯤 되겠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오만해지는데 내가 지금 오만한 걸까 아니면 자신감이 가득 찬 걸까를 식별해내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그 사람 말만큼은 내가 꼭 듣는다'하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오만함을 방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다. 살다 보면 꼭 한 명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특정한 시기가 지나고 나면 누군가의 말을 꼭 들어야 하는 그런 때가 온다. 그때 그것을 듣지 않으면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뭔가를 막 하는데 그게 사실은 나락으로 가는 그런 길, 성취의 길과 멸망의 길이 동시에 벌어지는 사태가 된다.  

지난번에는 크레온과 오이디푸스가 대화를 하는 게 나왔는데 크레온만 가지고는 오이디푸스가 겁을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곧바로 크레온과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 오이디푸스는 "내가 다시 시작하여 진실을 규명하겠소" 이렇게 간다. 크레온의 얘기 가만히 들어보면 크레온이 가만히 들어오면 제3자에게 한번 맡겨볼 만도 하고 또 아폴론의 신탁을 듣고 왔으니까 크레온에게 '네가 한번 찾아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으련만 오이디푸스는 내가 다시 시작하여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게 좋은 태도이긴 하다. 결국에는 내가 규명을 하러 나섰는데 내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차리면 그것의 충격이 크레온이 밝혀내는 것보다는 훨씬 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니까, 그러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밝혀내는 것이 될 테니까, 스스로 알아낸다면 모르고 죽는 것보다 나을테고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에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오이디푸스 왕》 132행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시작하여 진실을 규명하겠소.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그러고 있는데 이제 등장하는 사람이 테이레시아스이다.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가 《오이디푸스 왕》에서 절정이다. 이 대화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참주 오이디푸스》에서 테이레시아스는 적대자이다. 주인공에 대척되는 사람, 우리가 흔히 주인공이 하나 있으면 거기에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인간, 꼭 적대자는 아니어도 로맨틱 코미디 같은 경우에도 남자 주인공이 있으면 여자 주인공이 있고 그렇게 나오는데, 서로 대척점에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가 쉽다.  그건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그게 그럴싸해 보이는데 현실에서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끼리 그렇게 해피한 결말로 맺어지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일시적으로 해피할지 몰라도 아닐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연한 환타지이고 진실은 그게 아니다.  

테레이시아스는 antagōnistēs, 즉 적대자이다. 적대자라는 게 반드시 내 뜻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만은 아닌데 이 드라마 오이디푸스에서는 아주 뚜렷하게 대립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적대자라고 하는 건 신이 적대자일 수는 없다. 신과 인간이 어떻게 적대를 하는가, 인간이 신한테 까부는 것이다. 그리고 적대자라는 건 너의 말이 옳다면 내 말은 틀린 것이고 내 말이 옳다면 너의 말은 틀린 것이다 라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 적대자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화해 못할 일은 없다. 제1 전제가 들어맞지 않으면 함께 못 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니까 오레스테이아에서도 인간과 인간끼리는 화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이 개입해야 되는데 신 안에서 화해를 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테이레시아스는 인간이긴 하지만 장님이다. 그러면 헬라스 세계에서 장님은 신의 대리인이다. 우리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신의 세계에도 관여할 수 있는 자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살짝 인간과 신의 대화라는 성격도 여기에 묻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대화 부분이 재미있는 점은, 대개 희랍 드라마를 보면 한 사람이 말을 길게 하고 그다음에 상대하는 사람도 말도 길게 하는데 이 둘의 대화는 거의 단문으로, 길어야 두 문장으로 주고받고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소리 내서 읽다 보면, 이런 드라마 읽을 때는 소리 내서 읽는 게 좋다, 점점 더 감정이 고조되고 격정이 일어나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딱 결정적으로 한마디를 건드린다. "아아, 슬프도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 없는 곳에서 /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오이디푸스 왕》 316-317행
테이레시아스: 아아, 슬프도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 없는 곳에서 /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지금 오이디푸스의 지혜는 여기서 필요하지 않다. 이럴 때 지혜라고 하는 건 그냥 고집이고, 내가 틀릴 리가 없어 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아주 강한 확신의 발로에서 나오는 그런 지혜, 지혜라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무지의 상태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텐데 그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혜롭다 그러니 내가 모든 걸 밝혀낼 수 있다 라고 나아가는 건 굉장히 지혜롭지 못한 태도이다. 마침내 테이레시아스가 마침내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오이디푸스가 부탁을 한다. 여기 지금 《문학 고전 강의》 테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대화에서 오이디푸스의 말만 3개를 인용을 했다. 오이디푸스의 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조와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점점 더 강도가 세지는 것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이제 이걸 읽는 사람은 당연히 그 감정이 격앙된다. "알고 있거든, 제발 부탁이오. 돌아서지 마시오. / 우리 모두 탄원자로서 무릎 꿇고 빌고 있소이다." 부탁하는 말이다. 어투도 그렇다. 그런데 이제 327행에서 끝났는데 바로 3행을 건너서 330행을 가보면 약간은 반협박을 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알면서도 말하지 않겠다니, / 그대는 우리를 배반하고 도시를 파괴할 작정이시오?" 여기는 폴리스이다.  그들의 삶의 전 영역인데 도시를 파괴한다, 공공 영역 전체를 파괴한다.  그게 331행에서 끝나는데 그래도 테이레시아스가 돌아가려고 하니까 오이디푸스가 화를 낸다. 그런데 326행에서는 "부탁이요"라고 했는데 334행이니까 10행도 가지 않아서 "이 천하에 몹쓸 악당 같으니라고! 돌이라도 그대에게 / 화를 낼 수밖에. 그래, 끝내 말하지 못하겠단 말이오?", 이렇게 '부탁'에서 '악당'이라고 부르는데 10행이 안 된다. 그 성격이 딱 드러난다. 이 성격이라고 하는 것, 성격이 운명이다 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지만 성격이라고 하는 건 되풀이해서 계속해서 뭔가를 하다 보면 그 사람 마음에 자리잡게 된 품성상태hexis, 그게 이제 charact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보면 드라마의 주인공들의 성격이 나온다.  

《오이디푸스 왕》 326-327행
오이디푸스: 알고 있거든, 제발 부탁이오. 돌아서지 마시오. / 우리 모두 탄원자로서 무릎 꿇고 빌고 있소이다.

《오이디푸스 왕》 330-331행
오이디푸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알면서도 말하지 않겠다니, / 그대는 우리를 배반하고 도시를 파괴할 작정이시오?

《오이디푸스 왕》 334-335행
오이디푸스:  이 천하에 몹쓸 악당 같으니라고! 돌이라도 그대에게 / 화를 낼 수밖에. 그래, 끝내 말하지 못하겠단 말이오?


품성상태hexis라고 하는 건 어떤 걸 계속하다 보면 그렇게 성격character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격은 바꿀 수 있는가, 드라마에서는 전형적인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오이디푸스를 보면 성격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아주 크게 고통을 당하고 나면 성격이 바뀐다. 드라마에서는 한 명의 성격을 고정시켜서 그걸 가지고 드라마를 이끌어가야 되니까 성격을 고정을 시키지만 우리 인생이 평생토록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니다. 품성상태hexis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가지고 성질을 내버리게 되는 그런 경우를 보게 된다. 자기가 뭔가를 남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게 들어맞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뭐라고 한마디 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말처럼 협박 비슷하게 하는데도 들어맞지 않으면 바로 이제 버럭 화를 낸다.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 상대방보다도 조금 권력이 또는 권세가 더 위에 있다고 하면 이제 화를 내면서 두드려 패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왜 그러는가.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은 '내가 성격이 원래 그렇다'라고 하겠지만 웃기는 소리이다. 성격이 원래 그런 게 아니다. 그냥 화를 내버려 두면 화를 내는 성격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화를 잘 내다보니까 화를 잘 내는 성격이 된 것이다. 그러면 그 성격을 고치려면 화를 잘 안 내면 된다. 참는 행동을 여러 차례 하면 그게 잘 참는 품성상태hexis 즉 character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성격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기질을 타고나는 것이고, 그 타고난 기질 위에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가 이제 그의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성격이 원래 그렇다 라는 말은 성격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무지함에서 오는 것이고, 성격이란 단어의 뜻을 알게 되면 성격이 원래 그렇다 라는 말을 쓸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노력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제 dual level structure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뭔가를 하는, 물론 선천적으로 그게 안 되는, 신체적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약을 먹어야 해결되는 그런 것도 있을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오이디푸스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성격이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이제 차분한 성격으로 바꾼다.  그러니까 여기서 테이레시아스가 바로 그걸 지적해서 말한다. "그대는 내 성질을 나무라면서 그대와 동거하고 있는 / 그대의 것은 못 보시는군요. 그대가 나를 꾸짖다니."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오. / 그러니 화가 나신다면 화가 나신다면 실컷 화를 내십시오." "암, 화내고 말고. 기왕 화가 났으니 남김없이 / 내 생각을 말하겠소.  알아두시오. 그대가 보기에 / 그대 손으로 죽이지만 않았을 뿐 이 범행을 함께 / 모의하고 함께 실행했오. 그대가 장님만 아니라면, / 나는 그대가 혼자서 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을 것이오." 이건 이제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를 무고로 몰고 가는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뭔가를 말을 뱉어내면 안 될 텐데 오이디푸스는 우리가 이런 걸 이제 선 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테이레시아스가 이제 말을 한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요."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이렇게 딱 말해 주는데 이미 오이디푸스는 불타올랐다. 진실이 들을 준비가 안 돼 있고 화가 그를 지배하고 있다. 화가 그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 앞에서 아무리 말해도 이제 그는 자기가 자기를 불태우는 단계로 들어서서 다른 사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그가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까 테이레시아스를 이제 두드려 패든지 아니면 칼로 치든지 할 것이다. 그러니까 테이레시아스도 도망을 가야 할 텐데 차마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다. 이런 상태, 이런 성격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끝내 모든 이에게 외면받고 자기 스스로 혼자 골방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코로스가 "늙어서야 지혜를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 왕》 337-338행
테이레시아스: 그대는 내 성질을 나무라면서 그대와 동거하고 있는 / 그대의 것은 못 보시는군요. 그대가 나를 꾸짖다니.

《오이디푸스 왕》 343-349행
테이레시아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오. / 그러니 화가 나신다면 화가 나신다면 실컷 화를 내십시오. 
오이디푸스: 암, 화내고 말고. 기왕 화가 났으니 남김없이 / 내 생각을 말하겠소.  알아두시오. 그대가 보기에 / 그대 손으로 죽이지만 않았을 뿐 이 범행을 함께 / 모의하고 함께 실행했오. 그대가 장님만 아니라면, / 나는 그대가 혼자서 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을 것이오.   

《오이디푸스 왕》 353행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요.

《오이디푸스 왕》 362행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오늘은 일단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라는 얘기까지 했는데, 오이디푸스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테이레시아스에게 저주의 말을 한 것까지 한번 읽은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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