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2 제21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9.23 문학 고전 강의 — 52 제21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1강(1) 
- 오이디푸스의 오만함오이디푸스: “이 일에 관해 남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것은 / 도리가 아닐 것 같아,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 이 오이디푸스가 몸소 왔소이다.”(6-8) 
사제: “나와 여기 이 아이들이 그대의 제단 가에 앉아 있는 것은, / 그대를 신과 같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인생의 제반사에서나 / 신들과 접촉하는 일에서나 그대를 / 인간들 중에 으뜸가는 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옵니다.”(31-34) 

- 권력과 통제“무엇이 승자를 만들고 또 권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인류 전체의 미래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하다.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의 쟁점이나 이론적인 차원의 쟁점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와 이 자아가 맞닥뜨린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물리적인 산물이다. 권력과 성공의 이 물리적인 근원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우리는 권력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우리 주변의 권력을 보다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이안 로버트슨, ⟪승자의 뇌⟫  

버트런드 러셀, ⟪권력⟫ 

 

 

오늘은 《오이디푸스 왕》 제21강 지혜와 권세로 오만해진 오이디푸스를 한다. 제21강은 두 번 정도, 코로스와 사제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대화를 보고 그다음에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 이 드라마의 적대자antagonist는 바로 테이레시아스이다. 오이디푸스의 오만함hybris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스 비극에서 아주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만큼 그때부터 이게 심각한 문제였던 건 사실이다. 자존감이 높다, 자신감이 있다, 당당하다, 이런 것들과 오만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경계선을 획정지여서 구획을 나눠서 정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겸손함과 오만함의 그 선은 어디에 있는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고려, 초월적인 것은 인간이 가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지향성이다. 《향연》에 나오는 이른바 에로스의 사다리 그것을 타고 올라가는 그곳에서, 그 끝에서 우리가 불현듯 알게 되는 것이 초월적인 것이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지향 그리고 그것을 향해 가려는 고귀한 순정한 에로스, 그것이 없을 경우에 생기는 게 오만함이고 뭔가 굉장히 자신 있어 하다가도 초월적인 것이 자신을 건드리고 그걸 건드리고 있음을 감지했을 때 그때는 겸손함이 생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에 굉장하게 권력이 도취되어 있다. 말할 수 없이 권력의 능력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참주라고 불린다.  

크레온에게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제 신이 내린 처방prescription에서 뭔가 의혹이 제기되고, 이 의혹이 증폭되면서 오이디푸스는 예견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건이 전환된다. 전환이라는 게 이제 일어나게 된다. 문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예견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는 데 있다. 인생이 정말 계획대로 안 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오이디푸스는 합리적이고 명민하고 으뜸가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거기서 한 가지 더 해서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 사변적 이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한 사변적 이성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진정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사변적 이성이라는 것이 헛된 것이고 헛소리고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드라마의 1행이 “내 아들들이여, 오래된 카드모스에 새로 태어난 자손들이여, /  어인 일로 그대들은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 여기 이 재단가에 탄원자들로 앉아 있는 것이오?" 오이디푸스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하는 말이다. 오이디푸스의 말 중에 봐야 되는 게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인데 세속의 권력자에게 탄원을 하고자 하는 때는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온다. 오이디푸스는 기분이 좋을 것이다. '역시 내가 최고야. 나한테 탄원을 하고 왔군' 그럴 것이다. 이 대사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인데 만약에 현실 세계에서의 누군가가 권력자이고 그에게 사람들이 와서 뭔가 탄원을 한다고 하면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탄원을 하러 오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시작을 해야 된다. 그런데 만약에 거기 등장한 놈이 '어인 일로 여러분들께서는 대빵인 저에게 탄원을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면 그놈은 오만한 놈이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자는 오만한 자이다. 정말 그렇다. 양털실에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것은 세속의 권력자에게 탄원을 할 때 사용되는 의례 양식이다. 그리고 종교적 지위를 올리고자 할 때는 향을 든다. 910, 911행을 보면 이오카스테가 화관과 향을 든 시녀 한 명을 데리고 궁전에서 등장하는 장점이 있다.  향을 들고 갈 때는 종교적 제의이다. 우리가 제사 지낼 때도 향 피운다고 그러는데,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향을 들고 그 사람에게 하면 죽으라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여튼 오이디푸스는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탄원자들이 앉아 있는 걸 보고 기분이 뿌듯했을 거 아닌가. 그것이 이제 증폭돼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일에 관해 남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것은 / 도리가 아닐 것 같아,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 이 오이디푸스가 몸소 왔소이다." 스스로를 3인층으로 부른다. 세상의 명성이 자자한 이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왕》 1-3행
오이디푸스: 내 아들들이여, 오래된 카드모스에 새로 태어난 자손들이여, /  어인 일로 그대들은 양털실을 감아 맨 나뭇가지를 들고 / 여기 이 재단가에 탄원자들로 앉아 있는 것이오?

《오이디푸스 왕》 6-8행
오이디푸스: 이 일에 관해 남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것은 / 도리가 아닐 것 같아,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 이 오이디푸스가 몸소 왔소이다, 내 아들들이여. 

 

오이디푸스는 공명심에 가득 찬 사람인데 그 공명심이라는 것을 정말 조심해야 된다. 여기 《승자의 뇌》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놨듯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은 뇌를 바꾼다고 한다. 이 책은 품절이 아닌데 정말 좋은 책이다. 버틀런드 러셀의 《권력》이라는 책도 좋은 책인데. 제가 러셀 책을 읽고 기분 좋았던 적이 없는데 이 《권력》은 정말 기분 좋았다. 이 책은 현재 품절이다. 여튼 공명심에 가득 찬 사람은 말 그대로 공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야겠다 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는 게 이제 생겨버린다. '남이 안 알아주면 어떡하지'라는 것이 있다. 공명심하고 자신감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결합이 되면 이제 오만함hybris으로 들어가게 된다. 윗분을 모시는 공직자들은 그런 것을 많이 봤을 것이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이렇게 오만해갖고 뭐라고 떠들고 있으니까 사제가 지금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밭침에도, /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 이게 무엇인가. 대지, 풀을 뜯는 소떼, 여인들의 산고 다 자연이다. 자연 질서가 파괴되어 있다. 그게 이제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짓도 자연 질서의 파괴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처음에는 프롤로고스 부분 쪽에서는 암시가 계속 나오니까 그 부분을 드라마 읽을 땐 잘 읽어야 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에게 경고를 한다. "나와 여기 이 아이들이 그대의 제단 가에 앉아 있는 것은, / 그대를 신과 같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인생의 제반사에서나 / 신들과 접촉하는 일에서나 그대를 / 인간들 중에 으뜸가는 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옵니다." 인간들 중에 으뜸 가는 분이지 신과 같은 것은 아니다. 질적으로 아주 다른 것이다. 인간들 중에 으뜸이라고 해서 신과 같은 건 아니다. 그 분별을 분명히 하라. 오만함을 경계해라. 그렇게 딱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크레온이 등장한다. 지금 오이디푸스가 얼마나 오만한가 까지 읽어보고 다음 주 화요일에는 크레온이 등장해서 아폴론의 신탁을 전해주는 장면을 계속 읽겠다. 

《오이디푸스 왕》 25-27행
사제: 이 나라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밭침에도, /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떼에게도, 여인들의 불모의 /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해 있나이다. 

《오이디푸스 왕》 31-34행
사제: 나와 여기 이 아이들이 그대의 제단 가에 앉아 있는 것은, / 그대를 신과 같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인생의 제반사에서나 / 신들과 접촉하는 일에서나 그대를 / 인간들 중에 으뜸가는 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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