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6 제22강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10.14 문학 고전 강의 — 56 제22강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2강
- 오이디푸스의 자각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1414~1415)

- 코로스의 마지막 말

“저분이 유명한 /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1524~1530) 

 

 

《문학 고전 강의》 제22강 오이디푸스에 관한 얘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자신에 대한 앎이 파멸로 귀착된 오이디푸스"이다. 제목만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된다고 늘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통속적으로 인용되듯이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지혜로움의 시작이고 어찌 보면 끝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건데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았으면 복된 삶을 살아야지 왜 그게 파멸로 귀결되고 마느냐 하는 의아한 생각이 좀 들 수 있다. 파멸하는 오이디푸스가 이 드라마의 끝인데, 저는 오이디푸스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낸 순간 그가 파멸에 이르는구나 해서 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문학 고전 강의》를 강의하기 전에도 읽었고 강의하고 책으로 출간한 게 초판 1쇄가 2017년이다. 2017년이면 이제 꽤 시간이 지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오이디푸스에 관한 다른 책도 읽어보고 오이디푸스를 또 읽어보기도 했고 또 제 삶에서도 파토스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앎이라고 하는 것이 파멸되어 간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곰곰이 다시 생각을 해보니까 이것이 과연 파멸인가 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이디푸스가 테바이 왕의 자리에 있다가 물러나서 두 눈을 찌르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두 딸들과 함께 어딘가를 떠나게 되는 것이 이게 파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파멸이라고 할 것인가, 세속적인 뜻에서 그렇겠지만 이 우주가 보기에는, 파스칼이 말하는 그런 우주, 《팡세》에 나오는 우주가 보기에는 그냥 물방울 하나 떨어진 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억지로 또는 우리는 일상적으로 왕이었다가 뭔가 저렇게 된 사람을 파멸이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또 그렇게 말하기로 약속이 되어서 그런가, 이번에는 우리가 굳이 이것을 파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봤다.  

22강을 이렇게 설명하려고 준비하면서 제목을 읽는데 제목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파멸로 귀착된? 아니 잘 된 거 아닌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왕노릇하면서 테레시아스 같은 사람에게 비웃음 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사는 것보다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것에 상응하는 응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것을 스스로 질책하고 살아가는 삶이 파멸인가, 오히려 본질적으로 원래의 모습에 충실하게 사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봤다.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내가 나 자신의 재앙의 원인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보단 낫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본래 진정한 날 것 그대로의 삶으로 가게 된 전환을 맞이한 오이디푸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오이디푸스 같은 이런 작품들이 우리에게 주는 그게 무엇인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라는 것 아니겠는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과 실패 이런 것들을 벗어나서 생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겠다.  

이제 여기 책에서 물어보는 건 성격이 파멸로 일으키는 것인가 이끄는 것인가,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마는 것인가, 크게 대립되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성격이 자기의 못남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가. 그런데 지금 여기서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 그런데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려는 헬라스 비극의 전형적인 방식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이제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장면을 보자. "그래서 나는 나를 옆으로 밀어낸 마부를 / 화가 나서 때렸소." 오이디푸스는 불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 그렇게 저주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이었소. / 그리고 나는 내가 죽인 사람의 침대를 그를 죽였던 / 이 두 손으로 더럽히고 있소. 나야말로 사악하지요? / 또한 아주 불결하지 않소?" 자신이 사악한 자이고 불결한 자, 오이디푸스는 아무래도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다. 자기가 그런 것을 견디지 못하면 아닌 척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거나 그런데 이렇게 명백하게explicit 스스로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그는 이오카스테와 함께 궁전으로 퇴장하고 그렇지만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일단은 라이오스 왕을 자기가 죽였다는 건 알았는데그런데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하는 건 아직 모른다. 그런데 이오카스테에게 묻는다. 더 이상 따지지 말라 하고, 그래서 자신을 버렸던 목자에게 물어본다.  

《오이디푸스 왕》806-807행
오이디푸스: 그래서 나는 나를 옆으로 밀어낸 마부를 / 화가 나서 때렸소.

《오이디푸스 왕》819-823행
오이디푸스: 그리고 나를 / 그렇게 저주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나 자신이었소. / 그리고 나는 내가 죽인 사람의 침대를 그를 죽였던 / 이 두 손으로 더럽히고 있소. 나야말로 사악하지요? / 또한 아주 불결하지 않소?"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 안 될 사람과 결혼을 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그래서 파멸을 자각하고 자신의 눈을 찌른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스스로 감당하겠다. 이러면 이제 어마어마한 악인이라고 해도 사람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모르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알고서 그런 죄를 저지르고 그다음에 스스로 이렇게 뭘 한다 그러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렵다. 남을 많이 괴롭히다가 궁지에 몰려서 스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연민을 보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알고서 저지른 잘못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어쨌든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저 사람은 몰랐다는 것이다. 차라리 오이디푸스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는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냥 데리고 키우고 너 그러면 안 돼 라고 얘기했으면 오이디푸스도 아예 안 했을 것 아닌가. 내다 버리고 죽여버리려고 하는 게 문제이다. 자신들에게 닥쳐올 나쁜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행했던 일이 오히려 그 나쁜 운명을 불러온 것이 되었다. 자세하게 얘기해 주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여튼 관객들은 오이디푸스는 그걸 모르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선언하면 이제 연민으로 가게 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면 공포가 불러일으켜지는 것이고, 왜 저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게 저렇게 하는가 하는 걸 관객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공포가 연민으로 전환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공포와 연민이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불러일으킨다. 무엇을 정화하는가.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막 마음 졸이며 보았던 것이 사라지게 된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그렇다. 오이디푸스가 감당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 어떤 것인가. 누구나 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이 당신이 고통을 감당해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을 스스로 회피하지 않고 감당하겠다고 나서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감동을 주는 것이다. 내가 감당하고 가겠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 밀고 들어가겠다, 내가 그것으로 직진해서 들어가서 내가 다 감당할 거야 라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바로 감동이다. 공감까지는 모르겠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릴 때 두려움이 일단 감탄으로 변환되고 그리고 이제 그러고 있을 때 이스메네와 안티고네가 등장한다. 가령 여기서 오이디푸스가 '내가 모르고 그랬는데 어쩌라고'하고 있는데 이스메네와 안티고네가 등장하면 오이디푸스를 저주하게 되고 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주는 자연스럽게 그의 자녀들에 대한 저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굉장한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알지 못하고 저질렀으니까 정화되고 동전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정화되는 그리고 저 아이들에게는 무슨 죄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꼭 기억해 두어야 될 어떤 상식적인 그런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걸 못한다. 그걸 하면 오이디푸스처럼 하면 위대함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적어도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존중은 얻을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르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오이디푸스 왕》1182-1185행
오이디푸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 안 될 사람과 결혼을 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오이디푸스 왕》1414-1415행
오이디푸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앎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앎에 대한 definition을 보면 정확하다고 여기는 신념이 앎이다. 신념이라고 하는 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원히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인 한에서는 그걸 전제하고 정의가 만들어진다. 앎이 무엇인가. 어떤 사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또는 정확한 지식이 아니고 어떤 사태에 대해서 정확하다고 여기는 신념이 앎이다. 신념에 개입되는 것들을 다 따져 물어야 되는데 오이디푸스는 어쨌든 이제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accurate 또는 precise한 knowledge를 갖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게 되 된 순간 이 사람은 옳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신의 옳음이 어긋났다 라고 생각해서 자기 스스로를 징벌하고 타인으로부터 그 어떤 동정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짊어지려고 한다는 것들이 영웅의 면모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짊어지려고 한다. 남 탓하지 않고 온전하게 짊어지려고 한다. 어려운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코로스가 얘기한다. "저분이 유명한 /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오이디푸스의 일생이 이렇게 다 들어가 있다. 불과 이 여섯 줄에 그의 일생이 다 들어가 있다. 우리 일생도 이렇다. 우리도 살면서 불행으로만 점철된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에는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것에 대한 설명이 226페이지에 있다.  

《오이디푸스 왕》1524-1530행
코로스: 저분이 유명한 /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오이디푸스는 잘났다. 그리고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파멸하는 오이디푸스을 보고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이라고 하는 건 고통인 것이니까,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는 구경꾼으로서 반성을 얻게 된다. 철학은 몸소 겪지 않더라도 반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사실은 이렇게 늘 지켜보는 사람이 구경꾼인데 이론theoria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을 예전부터 철학이라고 불러왔다. 철학이라고 하는 건 나쁘게 말하면 자기는 겪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구경만 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색은 구경하는 행위, 그런데 구경을 하더라도 사태에 아주 민감하게 파고들어서 구경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철학적 사색이라고 하는 그런 행위를 하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걸로 이제 마무리를 하고 다음부터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한다. 《메데이아》는 23 24, 25강인데, 그 것을 한 다음에는 브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들을 차분하게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26강부터는 셰익스피어이다. 근대 이후의 작품들을 읽게 되기 때문에 브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보면서 고대 헬라스 정신세계에 대해서 좀 많이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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