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53 제21강(2)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9.26 문학 고전 강의 — 53 제21강(2)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1강(2) 
-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대화크레온: “포이보스 왕[아폴론]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 이 땅에서 양육되는 나라의 오욕(汚辱)을 몰아내고, / 치유할 수 없을 때까지 품고 있지 말라고.”(96-98) 
오이디푸스: “우리를 오염시킨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화하라고 하시던가?”(99)

- 성취의 길과 멸망의 길의 동시성성취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추락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추락을 피하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그 추락의 원인이 되고 만다. 어떤 일을 피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그 피하고자 했던 일의 직접적 원인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계기임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고전적인 의미의 비극이 가진 특징의 하나 

 

 

《문학 고전 강의》 오이디푸스 왕을 다루고 있는 21강 두 번째이다. 지난번에는 오이디푸스에게 오만함의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사제의 이야기를 했다. 권력자가 오만해진다고 하는 것은 권력자에게 거의 필연적인 일인 것 같다. 권력자들이 또 그런 오만함이 있어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는 그런 권력을 가져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이제 아폴론에게 신탁을 받으러 갔던 크레온이 등장할 차례인데,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대화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 특히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는 아주 강렬한 부분이다. 지금 이렇게 《문학 고전 강의》 해설하려고 오이디푸스를 읽어보니, 처음 읽을 때는 그냥 한 번 쭉 읽으니까 이런 부분을 잘 몰랐다. 사실 철학 책들을 읽을 때는 처음 읽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선행하는 지식이 있다. 예를 들면 키케로의 《스토아 철학의 역설》는 처음 읽어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키케로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선행하는 지식이 있으니까 읽을 때 이런 얘기가 나오겠구나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을 처음 읽을 때는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 헬라스 고전 드라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상태, 참고문헌을 함께 읽어간다고 해도 일단 처음 읽어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뭐가 중요한지 잘 몰랐다. 특히 문학 작품은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맞물려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 형식적인 특징들을 알고 나서 읽어야 작가가 강조한 부분들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그런 걸 잘 몰랐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한 번 통독을 하고 그다음에 아무래도 고전 드라마들은 참고서가 없으면 제대로 읽어내기가 어려우니까 해설한 책들도 보고 이 드라마 자체를 촘촘하게 주석한 책들도 보면서 다시 읽어보고 그리고 나서 제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져보려고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읽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 번 읽어보고 이건 이렇게 읽는 게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전망을 가지고 정리를 해서 강의를 했었는데, 그 뒤로도 다른 책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인용하면서 다시 읽어보고 또 이렇게 설명하기 위해서 또 읽고, 이제 여러 번 읽어보니까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대화가 이 드라마에서는 가장 주목해야 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된다. 크레온과의 대화가 그쪽으로 향해가는, 드라마 자체의 절정은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르고 이렇게 하는 부분인데, 그걸 향해 밀고 가는 과정이 예고편처럼, 아폴론에게 신탁을 받으러 갔던 크레온과의 대화가 예고편처럼 나오고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가 단문으로 이렇게 이어진다. 그 부분이 좀 상당히 긴박하다. 


먼저 아폴론에게 신탁을 받으러 갔던 크레온이 이제 갔다 와서 이렇게 보고를 한다. "포이보스 왕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 이 땅에서 양육되는 나라의 오욕汚辱을 몰아내고, / 치유할 수 없을 때까지 품고 있지 말라고." 그러니까 테바이의 오욕이 일어났고 그것을 몰아내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전해준다. 아폴론의 신탁은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고, 저렇게 해석하면 저렇게 되는 것도 같다. 그래서 이제 오이디푸스가 묻는다. "우리를 오염시킨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화하라고 하시던가?" 오이디푸스의 핵심적인 물음이 이렇게 몇 개 나오는데, 《문학 고전 강의》에도 써두었듯이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는 오이디푸스의 물음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앞서서 얘기했던 것처럼 굉장히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모르는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모르는 게 나오면 화를 낸다. 그것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이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모르는 것을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사실은 이 드라마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즉 드라마는 행동을 통해서 이어져 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보면 새로운 발견과 급전, 그 두 개가 드라마를 움직이는 드라마의 변곡점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게 발견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가 뭔가를 물어본다고 할 때 '그거구나, 나도 알고 있었어'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건데 그건 뭐지?' 라고 하게 되면, 그걸 끝까지 추궁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다 보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안다는 것이 발견이다. 그러면 이제 두 가지가 요구된다.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무지로 인해서 모르고 있었던 객관세계의 뭔가를 알아야 한다. 즉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를 그리고 대상 세계에 대해서는 지식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이 앎이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 라고 할 때는 항상 자신에 대한 메타인지와 대상 인식,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는 셈이다. 먼저 대상 인식이 있다. 대상에 대한 그런 지식들이 자기에게 주어지면서, 바깥 세상에 있는 앎이 나에게 주어지면서, 그와 동시에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네 하는 자기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두 개가, 동시에는 아니고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동시에 일어난다고 보면 그 두 개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고 그 두 개가 함께 일어나야만 진전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날 수 있다. 만약에 자기 의식이 함께 일어나지 못하면,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내가 뭔가를 모를 수도 있다 하는 가능성에 대한 의식은 희박해진다. 즉 대상 의식과 자기 의식이 함께 일어나고, 대상 의식과 자기 의식이 병존하는 또는 병행하는 그런 것, 그것이 참다운 앎으로 가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 96-99행
크레온: 포이보스 왕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 이 땅에서 양육되는 나라의 오욕汚辱을 몰아내고, / 치유할 수 없을 때까지 품고 있지 말라고. 
오이디푸스: 우리를 오염시킨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화하라고 하시던가?


크레온과의 대화에서도 그렇지만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에서도 그렇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자기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데 그런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몰랐던 것을 알면 좋지 않나. 누가 알려주면 좋은 것인데 그걸 가지고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자기 의식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겠다.  어쨌든 첫째 질문이다. "우리를 오염시킨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정화하라고 하시던가?"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를 오염시킨 게 오이디푸스의 행위이고 그다음에 추방하면 정화가 된다. 고대 헬라스 세계에서나 로마에서나 추방령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 물음 자체가 오이디푸스 자신을 겨냥하는 대답들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의 자기 의식을 촉구하는, 너 자신을 돌아보라 하는 것 그런 물음들이다. 사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계속 모르고 있는 거니까 자기한테 물어봐야 되는 것이다.  

크레온은 무엇 때문에 더러워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한다. "사람을 추방하거나 피를 피로 갚으라 하셨어요." 오이디푸스의 "대체 어떤 사람의 운명을 신께서 드러내시는 것인가?"는 둘째 물음인데 앞에 나온 것과 대동소이한 물음이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관객은 제3자이다이고 그래서 구경꾼이다. 구경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다. 구경하는 사람으로서의 철학자.  그러니까 철학자이거나 또는 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어마어마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 구경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운명을 주재하고 있는 존재는 아니라 해도 구경하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구경하는 사람을 우리는 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튼 관객의 태도 또는 관객의 입장으로부터 철학자 그리고 절대적인 관객, 절대적 관객으로서의 신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인생 다 살아본 것처럼 구경꾼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이게 어찌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쁜 것일 수도 있는데 인생을 다 살아보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것들을 못하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 와보고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는 게 바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뭔가를 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다. 

《오이디푸스 왕》 100-105행
크레온: 사람을 추방하거나 피를 피로 갚으라 하셨어요. / 바로 그 피가 우리 도시에 폭풍을 몰고 왔대요.
오이디푸스: 대체 어떤 사람의 운명을 신께서 드러내시는 것인가?
크레온:  왕이시여, 그대가 이 도시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전 / 우리에게는 라이오스가 이 나라의 통치자였지요.
오이디푸스: 들어서 잘 알고 있네. 그분과 나는 생명부지니까. 

 

다시 크레온이 대답을 한다. "왕이시여, 그대가 이 도시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전 / 우리에게는 라이오스가 이 나라의 통치자였지요."  오이디푸스는 "들어서 잘 알고 있네. 그분과 나는 생명부지니까"라고 말한다. 여기서 크레온도 이렇게 짐작을 한다. 라이오스가 죽었다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이 피를 피로 갚으라 하는 말에 상응하는 크레온의 추론이다. 그래서 역병이 번진 것은 오이디푸스나 크레온이 그 범인을 알지 못하는 살인 사건이고, 범인을 찾아내서 공동체에서 추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가 "세상 어디에 그 자들이 있는가? 대체 어디서 오래된 / 범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자들이라고 한 것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정말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혼자 라이오스 왕을 죽였기 때문이다. 가장 열심히 찾아내려는 사람이 오이디푸스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기가 막힌 것이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사람이든 사람들이든 알지 못한 채 자기가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108-109행
오이디푸스: 세상 어디에 그 자들이 있는가? 대체 어디서 오래된 / 범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제 오이디푸스는 절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시작하여 진실을 규명하겠소." 이게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겠는가. 내가 그 살해자들을 찾아내면 또다시 내가 이제 명성을 드높이겠구나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규명하면 자기가 범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을 규명해서 자기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는 그 과정이 자신의 명성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추락의 과정이다.  어떤 걸 하고자 열심히 했던 것이 애초의 그 목적을 상실케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을 피하고자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그 피하고자 했던 일에 직접적인 원인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계기라는 것, 이게 바로 고전적인 의미에서 비극이 가진 특징이다.  이걸 잘 봐야 된다. 

《오이디푸스 왕》 132행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시작하여 진실을 규명하겠소.


오전에 키케로의 《스토아 철학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키케로의 일생에 대해서 간략하게 거론했는데,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하고 안토니우스를 추방하고자 비난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키케로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명예를 찾고 로마 공화정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안토니우스를 물리치면 키케로 자신의 명예도 얻고 동시에 위기에 빠진 로마공화정을 되살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한 게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맺어버린다. 그러면서 키케로를 적으로 만들고 안토니우스가 살생부를 만들어서 죽이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 개인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게 로마 공화정 멸망으로 가는, 이미 그 도정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키케로가 그런다고 해서 막아질 리도 없었겠지마는, 그렇게 보면 키케로도 역시 공화정의 몰락과 자신의 몰락을 피하고자 열심히 했던 일, 그게 결국 자신의 몰락과 공화정의 쇠퇴를 불러온 결정적 계기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다음에는 테이레시아스와의 아주 긴박한 대화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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