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61 제26강 셰익스피어 《맥베스》

 

2023.10.31 문학 고전 강의 — 61 제26강 셰익스피어 《맥베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26강

- 안정된 규범 없이 쟁투를 벌이는 인간들의 무대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짓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맥베스⟫ 5.5.23-28)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오늘부터 《문학 고전 강의》에서 근대 드라마로 들어간다. 《문학 고전 강의》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고전 쪽이 훨씬 더 많다. 근대보다는 고대에 해당하는 것, 중세에는 드라마가 없다. 드라마가 없다는 것은 어쨌든 그것도 안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안정된 믿음 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하나 일상이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들의 파토스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기니까, 고전 고대의 작품들보다도 근대의 작품들이 적다. 물론 많은 걸 읽어야 하겠지만 저는 《모비딕》에서 끝냈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맥베스》와 《오셀로》, 《문학 고전 강의》를 책으로 출간한 뒤로도 여러 번 《맥베스》와 《오셀로》는 강의를 했고 또 다른 작품들도 더러 읽었다. 제29강 제목을 보면 "안정된 규범 없이 쟁투를 벌이는 인간들의 무대", 안정된 규범이 없다는 것은 지난주 토요일에 말했던 그것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세계와 비극의 세계, 호메로스 세계 역시 진실의 문제는 그전과는 달라졌지만 호메로스 세계는 여전히 신적인 어떤 것이 초월적이고, 인간의 통찰과는 무관하게 그것과는 떨어져서 확고하게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이스퀼로스가 그것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에우리피데스다.  바로 그러한 안정된 규범 없이 쟁투를 벌이는 또는 내면의 것이 그들을 사로잡는 그 세계를 에우리피데스가 드러내 보였다. 그런 점에서 에우리피데스는 근대 드라마의 출발점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바로 그것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읽어보면 《맥베스》가 잘 읽힌다. 

제26강은 245페이지부터 247페이지까지 셰익스피어드라마를 읽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션 매커보이의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를 추려서 정리한 내용이 있다. 그건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되고 앨럼 블룸이 쓴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서문은 언젠가 한번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서문을 강의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거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얘기를 해보려고는 한다. 여기서는 그냥 내버려 두고 247페이지부터 나온 얘기하겠다. "《맥베스》는 물론이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드라마에는 대체로 왕이 등장합니다. 《오셀로》에는 왕이 등장하지 않지만, 두 작품 모두 권력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오셀로》는 권력과는 조금 거리가 먼 점이 있어도 그래도 그렇게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다. 희랍의 드라마들은 앞서 말했듯이 일종의 통일적 원리를 갖는다. 에우리피데스는 예외이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는 지난 토요일에도 얘기했듯이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안정된 규범 없이 자기 내면에 고통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의 얘기가 에우리피데스에는 어김없이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소포클레스까지는 아직은 신이 부여한 운명이 있고 그 운명이 그들의 삶을 규율한다. 《메데이아》는 《맥베스》와 좀 대조되는 지점이 있다. 《메데이아》에서는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등장하는데, 《맥베스》에서는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등장한다. 이아손과 메데이아에서는 이아손이 어김없이 메데이아에게 죽음을 당하지만 여기서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그 광분을 나눠 갖는다. 에우리피데스에서 《메데이아》에서의 이아손은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겠지만 《맥베스》에서는 맥베스마저도 그런 자기 확신을 끝까지 가지지 못한다고 하는 점에서 보면,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혼란 속에 가득 차 있고, 오히려 맥베스와 맞선 사람들이 안정된 규범을 가지고 있고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에는 《맥베스》를 읽으면서 맥베스에만 중심을 두었는데 이제 덩컨는 어떠했을까 이런 것들, 그다음에 뱅쿼는 또 어땠을까, 또 맥더프는 맥베스를 물리칠 때 보면 굉장히 확신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맥베스만 얘기하지 말고 맥더프, 덩컨, 뱅쿼 이 3명에 대해서는 한 번씩은 좀 우리가 조명을 비춰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읽는 것도 읽기가 여러 번 거듭되면서 우리의 읽기가 늘어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여기 248페이지에서 볼 수 있듯이 "등장 인물들이 발딛고 서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코러스가 있을 수 없고, "관객 또한 안정된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므로 '갈등하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고",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맥베스》에서는 5막 5장의 23~28행이다.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유명한 대사들은 유명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걸 꼭 외워야 한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어도 그걸 인용할 수 있는,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Paris vaut bien une messe)라는 말처럼 외워야 한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짓일 뿐. /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 아무 의미도 없는.” 영어로 보면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 Signifying nothing."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아우성이다. 이 단어는 셰익스피어 드라마에서 나왔고 관용어처럼,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야'라고 할 때 사용되고 있는 그 용어이다. 미합중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제목이 《The Sound and the Fury》이다. 포크너의 소설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다고는 하는데, 윌리엄 포크너는 그냥 시끄러운 소리, 시끄럽다는 것이다. 소리와 분노라고 하는 게 and로서 연결될 수 있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니까 묶어서 해버리면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furious sound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바보에게는 분노가 없으니 그냥 아우성이다 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그런데 Signifying nothing이니까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것이니까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 sound and fury라고 하면 무無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아닐까 한다. 

《맥베스》 5.5.23-28
맥베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짓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어쨌든 《문학고전강의》의 《맥베스》는 짧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 맨 마지막 작품이다. 읽는 동안에 여러분들도 아침에슬에서 나온 책을, 막 감정 이입할 필요는 없고 한 번 읽는다라는 느낌으로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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