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44 제16강(3)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8.19 문학 고전 강의 — 44 제16강(3)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6강(3) 
이율배반二律背反: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동시에 눈 앞에 놓인 것, “희랍 비극은 사태를 끝까지 추적하여 원인과 결과를 잘 짜맞추려 하지만 어느 지점에 가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수의 여신들: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완결하려는 이들, “아테나 여신에 의해 비극적 상황이 해소되자 복수의 여신들이 격분하여 아테나이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합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려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는 것’(pathei mathos, suffer and learn)“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은 언제나 유효하다네.”(아가멤논, 176-178)

 

 

헬라스 비극을 읽는 《문학 고전강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16강에서 시작을 했다. 지난번에 두 번을 했다. 오레스테이아에 관한 얘기는 없었고 희랍비극에 관한 얘기, 욥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희랍 비극 같은 작품들을 우리가 1차 문헌이라고 말하는데, 1차 문헌들은 따로 공책에 정리할 것도 없다. 그냥 놓고 항상 이렇게 저렇게 읽어보고 그렇게 하면 된다. 핵심 지식에 해당하는 것들은 독서카드에 옮겨두면 되겠다.  《문학 고전 강의》 42번째의 제16강 첫 번째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했다. 신에게는 한계가 없지만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신과 인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신의 능력은 우리가 규정할 수가 없다. 무한하다고 할 때 무한한 것은 한이 없는 건데 어떻게 규정이 되겠는가.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고, 유한한 것만 규정할 수 있다. 그러면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이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는 안되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 문제인데 따지고 보면 신이라고 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기준으로 삼아서 그 앞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 인간의 한계를 생각해 보는 것 그게 바로 비극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경건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겠는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은 신을 숭배하고 마음속에 늘 기도하고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속된 말로 나대지 않는 사람, 노력은 하되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다. 유튜브를 보면 오늘의 신학 공부라고 하는 채널이 있다. 비아 출판사의 민경찬 편집장이 전에 거기 나와서 하는 걸 보고 알게 됐는데 가끔 그 채널을 본다.  최근에 30년 넘게 목회를 하시다가 퇴직을 한 어떤 목사님이 나와서 욥기에 대해서 얘기를 한 걸 봤다. 욥기를 지난번까지 했으니 제대로 읽었나 안 읽었나 검색을 해봤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서 그 가설에 따라서 읽어보고 그것이 들어맞으면 잘 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가설이 틀려버릴 수도 있다. 자연과학이 아니라서 검증이라고 하는 것, 해석이라고 하는 것도 아무리 욥기 같이 하느님에 관한 얘기를 한다고 해도 해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과관계에 들어맞도록 하는 것인가, 설명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하는 해석이 필요하다.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해석Auslegung이라고 하는 건 인간이 아는 것인데 해석은 틀릴 수 있다. 그래서 욥기를 제대로 해석을 했나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보니 그 목사님은 나는 욥기를 보면서 욥이 인내심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더라, 화만 내고 그러지 않았느냐 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렇다. 제가 그 강의에서는 인내하는 욥이라고 했었다. 제가 여기서 그분의 얘기를 다 옮길 수는 없고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찾아보시면 괜찮을 것 같다. 어쨌든 나대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겠다. 나대지 않는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또 안 된다. 그 경계선이 참으로 어렵다.   


지난번에 헬라스 비극의 기본적인 형식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프롤로고스에서 시작해서 엑소더스로 끝난다. 성서의 출애굽기를 엑소더스라고 하는데 어딘가로 떠난다는 말이다. 이집트를 떠난다라고 하면 해방의 서사인 것 같지만 떠났다는 게 무엇을 떠난 것인가. 광야에서 떠돌아다닌다는것은 집이 없는 것이니 홈리스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홈리스의 민족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을 생각하면 홈리스의 민족이다. 그래서 막스 베버가 《야훼의 예언자들》에서 그런 얘기했다. 막스 베버는 굉장히 뜬금없이 무심코 밍밍하게 썼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참 말이 맞는 소리를 했네 하는 얘기들이 있다.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가 번역된 게 있는데 제1권이 공동체들이다. 원래 nation이라는 단어가 라티움어 natio에서 나온 말인데 동일한 혈통을 지닌 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그들은 반드시 특정한 영토에 정착해서 하나의 citizenship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 집단의 대표적인 게 바로 엑소더스에 나오는 이집트를 떠난 그들이다. 이집트를 떠나 홈리스가 된,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지 못하는 사람들, 장소가 없는 민족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하느님이 정해준 시간에 따라 움직이니까 시간의 민족이 된다. 출애굽기 단계에 있는 유대인들은 아직 종말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유대라는 말도 있고 유다라는 말도 있다. 성서에서는 구별해서 쓰는데 우리는 그렇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16강을 마저 다 읽는다. 176페이지에 보면 아트레우스가의 비극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개작해서 썼다고 되어있다. 최근에 《오뒷세이아》를 김기영 박사가 옮긴 것을 가지고 얘기를 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도 옮겼고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도 옮겼고 지은 책으로 신화에서 비극으로가 있다. 제가 강의할 때는 천병희 교수님이 번역한 것을 교재로 썼다. 그런데 을유문화사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번역해서 2015년에 낸 게 있다. 거기 보면 뒤에 그리스 비극의 구성 요소,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극 구성, 해설 신화에서 비극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붙은 해설 신화에서 비극으로가 또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다.  

《문학 고전강의》 176페이지부터 16강 마지막까지 적어놓은 부분이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 관한 가장 간명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논란의 여지없이 이것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달 필요 없이 그냥 받아들여지는 얘기들을 정리해 둔 것이다. 아트레우스가의 비극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은 이율배반이다.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사태를 가운데 두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에서 효자인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어머니인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죽인다는 점에서 효자일 수 없고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면 모친 살해자가 되는 것이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동시에 눈앞에 놓여 있으면 그것을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율 배반은 해결할 수가 없다. 이율배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 문제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뭔가의 사태가 벌어져서 더이상 문제 자체가 되지 않는 해소로 가야 한다. 그렇게 해소하는 것을 변증법적으로 해결한다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 변증법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할 건 아니고 거기에 보면 한 중요한 설명이 있다. "희랍 비극은 사태를 끝까지 추적하여 원인과 결과를 잘 짜맞추려 하지만 어느 지점에 가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말이다. 이율배반은 인간의 합리성을 극도로 발휘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게 어느 순간에 가면 불가능한 지점이 보이는 것이 이율배반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결의 영역을 넘어서 버렸다. 그러니까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여기서 복수의 여신들을 나쁜 의미로 생각하면 안된다. 복수의 여신은 인과 응보를 주는 자들이고, 당연히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복수의 여신들 말이 제일 옳다. 결국 여기는 아테나 여신이 등장해서 뭔가를 하는데 이것은 흔히 하는 말로 정치적 해결이다. 복수의 여신은 깔끔하게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율 배반을 해결할 수 없는데 복수의 여신은 인간 세계가 끊임없는 인과의 연쇄 속에 들어가 있음을 우리에게 자극을 시켜준다. 그래서 복수의 여신이 나쁜 여신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에 대한 결과가 있고 또 그 결과를 책임지고 그다음에 또 그 결과에 의해서 어떤 사건이 또 벌어지고, 벌어진 사건을 또 책임지고 이렇게 끊임없는 인과의 연쇄를 이어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그 인과의 연쇄가 끊어지지 않도록 또 그 인과의 연쇄가 어긋나지 않도록 잘 챙겨서 벌받을 놈은 벌을 받고 보상받을 사람은 보상을 받고 하는 게 복수의 여신이다. 아테나의 여신은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여신이다. 그렇게 보면 복수의 여신이 절차가 어김없이 실현되도록 하기 때문에 공정한 여신이다.  

희랍비극에서 나타나는 인간은 이율배반이라고 하는 영역에 들어가 있다.  합리적인 절차 영역을 넘어선 이율배반의 영역에 인간은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법정에서도 어떻게 하지못했고 그 상황에서 오레스테스가 도망가려고 할 때 복수의 여신이 나타난다. 아테나 여신이 비극적 상황을 해소시키니까 복수의 여신들이 격분해서 아테나이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위협을 한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복수의 여신이 하는 일은 책임(responsible 또는 liable)을 지는 것이다. 이게 합리적인 태도이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은 이들 복수의 여신들을 자비로운 여신들로, 즉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이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이제 신들끼리 하는 것이다. 그건 신들의 영역이고 인간은 이율 배반의 한계 안에서 고뇌하는 것이다. 그러니 겪어봐야 안다 라고 하는 그런 것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드라마로 보면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헬라스 비극이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가, 주제는 무엇인가를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로는 이것이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멤논>에서 '제우스 찬가'가 유명하다. 160행에서 183행에서 나오는데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다네."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는 것, 즉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 suffer and learn.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되겠다. 신께서는 인간들을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했다.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고뇌를 통해서이다. 일단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이 있고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것에 대해서 뭔가 행위를 선택해서 해야 된다. 그러면 그렇게 주어지거나 물려받은 상황이 1번, 새로운 사건이 2번, 인간이 선택한 행위 3번이 총합으로 등장한 게 결과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율배반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거기서 좌절하고 그냥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게 이제 순환이다. 고뇌를 또 겪어보고 안 되면 신이 어떻게 해주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필수 사항은 아니고 옵션이겠다. 오늘은 16강을 했고 불쌍한 아가멤논은 이제 17강부터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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