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42 제16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2023.08.08 문학 고전 강의 —42 제16강(1)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달리 말하면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 ‘모이라’(moira)에서 ‘튀케’(tykhē)로
- 경건한 사람과 합리적 정신을 가진 사람, 오만(hybris)하지 않은 사람

 

 

오늘부터 헬라스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을 읽는다. 《문학 고전 강의》에서는 16강부터 25강까지니까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헬라스 비극의 분량이 많다.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다른 내용도 할 것이고, 또 《문학 고전 강의》 안에서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본래 강의할 때도 많았고, 그 양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놨기 때문에, 책으로 내놓는 건 아무래도 압축하고 정선해서 정돈해서 압축하고 집약하고 그러다 보니까 책은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책들은 한 100페이지를 읽었는데 한 페이지면 될 내용을 너무 많이 떠들어 놓은 거 아니야 그런 책도 있는 반면에 어떤 책은 10페이지 읽었는데 이거 다 이해를 하려면 한 100페이지 정도는 썼어야 되지 않나 그런 느낌을 주는 책도 있다.  그만큼 일장일단이 있겠다.  저는 처음에 논문을 쓸 때부터, 글을 쓰는 것도 공부 배우기에 해당한다. 공부를 배운다는 게 듣기만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이제 글 쓰는 것도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공부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주 머리에 박힌 게 10분의 1 원칙이다. 1 페이지를 쓰려면 100페이지의 자료가 있어야 되고 100페이지의 자료를 만들려면 1000페이지를 읽어야 되고, 1000페이지를 읽어서 100페이지의 자료를 만들어낼 수 있으려면 사실은 만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 만 페이지를 정신없이 읽다 보면 1000페이지짜리 자료를 100페이지로 집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고 100페이지짜리 자료를 만들었으면 그걸 이제 다시 추리고 정돈해서 10페이지를 쓰는 것이다. 10페이지를 썼다 그러면 그 뒤에 만 페이지에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국어로 된 건 그렇지만 또 외국어로 돼 있는 것,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저는 중요한 책들은 원서를 꼭 사서 같이 대조해서 읽어본다. 번역이 잘 됐다 잘 못됐다를 따져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번역자는 이런 뉘앙스로 이런 문맥으로 이해해서 번역을 했을 수도 있는데 그게 또 제가 읽어볼 때는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꼭 그걸 본다. 요즘에 인터넷 헌책방이 있고 해서 외국에서 나온 책들 가져다가 읽고 하는데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공부하기에 좋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부터 시작해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까지는 일단 기본적으로는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부르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을 바짝은 아니어도 꼭 해당하는 부분들은 찾아서 읽어보려고 한다. 부르노 스넬은 에우리피데스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에우리피데스가 좀 소포클래스나 아이스킬로스에 비해서 좀 무시되어 온 측면이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한다. 오늘은 드디어 헬라스 비극의 3대 작가들을 읽어 나가는 그런 것이니까 전반적인 얘기를 하겠다. 우선 171페이지. 제16강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이율 배반의 상황이라고 하는 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이다. 171페이지부터 173페이지까지 3페이지에 걸쳐서 나와 있는 설명을 정리를 해서 말하려고 한다.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이다. 적어도 하나씩은 읽어야 한다. 문학 작품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먼저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 읽을 때는 항상 앞선 것부터 읽는다. 후대의 작가들은 앞선 것들을 전범paradeigma으로 삼는다. 그래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이 순서로 읽는다. 《인문 고전 강의》에서는 문학, 역사, 철학의 작품들을 골고루 다뤄야 하니까 거기서도 희랍의 비극 작품 중 하나인 《안티고네》를 읽었다.  그런데 소포클레스라고 하면 당연히 《오이디푸스 왕》을 읽어야 한다. 참주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게 적당할 만한, 참주가 이제 나쁜 뜻도 아니고 좋은 뜻도 아니고, 어떤 종류의 통치자를 가리킬 때 왕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 헬라스 세계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주 오이디푸스도 읽어야 하고, 그다음에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도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는 《욥기》를 읽었다. 《욥기》를 읽었으니까 《욥기》와의 관계 속에서 헬라스 비극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헬라스 비극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여기 써놓은 것처럼 "신과 인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1차적인 주제이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보다는 인간에 대해서만 다룬 것을 읽으면 안 되는지, 신에 대해서 논의가 되지 않은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여전히 하고 있는가 그렇게 얘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신이라고 하는 말을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신이라고 알려진 것들, 신이라고 알려진 그것이 우리 인간은 어찌 해볼 수 없는 자연적인 그런 위력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여기 써놓은 것처럼 "달리 말하면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이해해도 되지만 다르게 보면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신이 없다 해도 각자에게 정해진 몫이 있고 이를 "운명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모이라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모이라는 제우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건 신이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모이라 라고 하는 각자에게 정해진 몫, 그들의 운명 그렇게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는 굉장히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면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의지가 가진 힘이 조금 드러나서 저항하는 인간이 나온다.  그래서 제가 그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오이디푸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뭔가 좀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에우리피데스에서는 신이 정해준 운명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인간의 삶의 부조리함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니까 모이라가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술어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냥 굴러가는 운이라는 뜻의 행운, 튀케tykhē라고 하는 것이 들어온다. 튀케는 인간이 처해 있는 것에서 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튀케는 신도 어쩌지 못하고 인간도 어쩌지 못하는 흔히 하는 말로 팔자소관이다. 그래서 저는 모이라라고 하는 것과 튀케라고 하는 것을 서로 구별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항상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같은 운명이라 해도 모이라와 튀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아이스킬로스에서 소포클레스를 거쳐서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는 비극 작품들의 전개를 '모이라에서 튀케로'라는 말로 아주 간략하게 집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건 강의를 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그냥 이렇게만 외우면 안 된다.  모이라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고 튀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일단 안 다음에 그렇게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읽어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니까 책을 쓰면서도 이런 것이 걱정인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모이라에서 튀케로'를 외워가지고 희랍 비극 전체를 다 알았다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라도 일부러 제가 이것을 상세히 설명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제16강 171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달리 말하면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서 인간은 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각자에게 정해진 몫이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모이라'moira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모이라는 제우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제16강 172 같은 운명이라 해도 모이라와 튀케는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이스킬로스에서 소포클레스를 거쳐서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는 비극 작품들의 전개를 '모이라에서 튀케로'라는 말로 아주 간략하게 집약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욥기》와 비교해서 한번 읽어봐야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욥기》에서의 주제는 경건한 사람이다 하는 얘기이다. 그리고 흔히 희랍의 정신을 합리적 정신 이렇게 말을 한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따져보지 않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건한 사람은 다짜고짜 착하게, 신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이 나에게 고통을 주든 즐거움을 주든 신을 따라가는 것이 경건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욥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 인간의 정의는 신의 정의하고 다르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게 신앙이다. 이게 이제 욥기가 주는 메시지일 텐데 그리고 그렇게 따르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텐데 어떻게 보면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수동적인 태도만을 가리킨다고 하기보다는 경건함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영역이 있지만 그것에 대한 탐색을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따져보고 따져보고 따져보고 나니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구나를 찾아내서 또는 자각해서 그것을 수긍해가는 태도, 즉 자신이 따져보겠다는 것을 애초부터 포기한 게 아니라 뭔가를 해보고 나서 그걸 수긍해가는 태도도 경건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오만하지 않다 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희랍 비극에서도 계속 얘기하는 것이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이다. 희랍의 정신이 합리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라 해도 인간은 끊임없이 그 운명에 대해서 묻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 한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납득할 수 있게 해명하는 태도를 합리적 정신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합리적 정신으로 해명이 안 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 그리고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는 것들이 오만함hybris에 대한 경계이겠다. 그러면 오만함hybris을 경계한 다라는 그 지점에서 헬라스 비극과 욥기가 만나는 지점이 있겠다. 욥기는 경건함을 강조하는데 그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오만함을 경계한다 일테고 헬라스 비극은 합리적 정신을 강조하는데 합리적인 태도로 따져지지 않는 부분은 겸손하게 수용한다 라는 점에서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이고 그래서 오만함을 경계한다 라고 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세계가 만날 수도 있지 않겠나 한다. 흔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그 텍스트가 최근에 번역되어 나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강의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또 이렇게 번역이 되어 나오니까 굉장히 기분 좋은 그런 지점이 있다.  이 책은 최근에 번역되어 나오기로는 그 제목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로 번역이 되어 나왔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김재홍 박사가 번역을 했다. 이런 분들 정말 고맙다. 그리고 충실하게 문헌 해제도 잘 해놓다. 이 분은 만나 본 적은 없는데 옮긴이 서문도 적당하고 번역자로서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는 그런 것이 있다. 명상록으로 알려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정말 좋다. 명상록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이를 스토아주의라고 그러는데, 스토아주의는 굉장히 수동적이고 그다음에 안심인명의 철학이고 그래서 사실 빈델반트 시대부터 시작해가지고 안 좋은 거다, 소극적인 철학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건 경건함인 것이고 그다음에 그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게 말하면 합리적인 태도를 완전히 없애버린 그런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태도를 전제로 하되 그 합리적인 태도로서 해결되지 않는 것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 두려는 태도, 그런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우주와 인간을 지배하는 엄연한 법칙 또는 엄정한 법칙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그게 모이라이다. 모이라를 인정을 하고 있고 모이라를 따라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태도 그것은 굉장히 수동적이고 세상에 염세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를 가지고 통치자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신의 뜻을 이 지상에 실현하리라고 하는 광신적 신정정치보다는 훨씬 더 건강한, 건전한 것 아니겠는가.  저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정치사상으로서의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관심이 없는 주제였는데 그런 것이 좀 있지 않겠나 한다. 아주 그냥 광신적인 구약성서의 엑소더스에 등장하는 신정 정체와도 다르고 또 헬라스에서 플라톤이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던 민주정의 데모스가 보여주는 광기와는 다른, 그런 적절한 중간 지점에 있는 태도, 그런 태도를 황제가 갖고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통치자의 비르투virtù로서가 아닌 경건한 통치자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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