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8 제14강(5) 구약 성서 〈욥기〉

 

2023.07.25 문학 고전 강의 — 38 제14강(5)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4강(5)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 해만 지면 살인자가 활개를 치며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다니고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 / 남의 아내를 넘보는 눈은 어둠을 기다리며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 하며 얼굴을 가리는 무리, / 어둠을 타서 남의 집을 뚫고 들어가며 낮이면 틀어 박히는, 모든 빛을 외면한 족속, / 한밤중이 그들에게는 아침인가 짙은 어둠 속에서 온갖 무서운 일을 자행하는 무리.”(24.13-17)

 

《문학 고전 강의》 제14강 자신을 저주하다가 신에게 반항하는 욥을 꽤 여러 번에 걸쳐서 읽고 있다.  오늘 신정론에 관한 얘기한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주제이다. 세상의 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 신정론이라는 주제는, 유대 기독교의 전통에서 선한 신을 얘기한다. 플라톤도 그렇다. 전 우주를 감싸고 있는 또는 전 우주에 관철되고 있는 하나의 이데아,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다. 그런 것을 수퍼 보자기 이론이라고 한다. 일단 기본 바탕을 선으로 깔아놔야 사람에게 그쪽을 향해 가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차라리 뚜렷하게 악을 저질러 버리면 누가 봐도 저건 악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악이다 그런 짓을 해버리면 그냥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시오패스, 여기서는 살랑살랑 착한 사람처럼 굴고 저기 가서는 또 온갖 그런 거 다 하는, 일상적으로 부딪치게 된다. 또 어쩌면 남들에게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쁜 놈이다 라고 할 때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걸 방해하는 게 나쁜 놈인지 그거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제 악은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악. 절대 악이라고 하는 게 있는가, 절대선이 있다면 절대악은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선이라고 하는, 절대라는 말이 앞에 붙어버리면, 상대가 없는 것이 절대이다. 상대를 끊어버린다는 것. 그러니까 절대 선이라는 게 있으면 절대 악은 없는데 그냥 상대적으로 선악이 있다, 상황에 따른 선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을 윤리학적 상대주의라고 한다. 절대 선 문제가 해결이 안 나니까 공리주의가 등장한 것인데, 예전에는 공리주의자들을 참 비겁한 놈들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읽어보고, 요즘은 다시 그냥 어떻게든 뭔가 해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아닌가, 흔히 하는 말로 나이 먹어서 세상과 타협하는 태도인가 이런 약간의 자괴감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절대 선의 경지를 일단 관념적으로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3장 23절부터 26절에서 욥이 묻는다. 신이 주재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우주의 진리 자체가 무엇인가. 당신은 선한 신이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하느냐 묻는다. 그리고 이제 욥과 세 친구들의 셋째 대화인 21장부터 31장 사이, 특히 24장 1절에서 12절 이 부분은 정말 굉장히 압권이다, 읽는 이를 압도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게 문헌적으로 볼 때는 가장 잘 정리된, 신정론에 관한 오래된 원천적인 물음이 아닌가 한다. 이 부분을 항상 이렇게 갈피를 넣어 놓고 늘 본다.

〈욥기〉 24.12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


그다음에 이제 24장 13장에서 17절은 악에 관한 규정이다.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 밝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하면 상대화되어 가는 것인데,  "해만 지면 살인자가 활개를 치며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다니고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 세상이 이렇다는 것이고, "남의 아내를 넘보는 눈은 어둠을 기다리며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 하며 얼굴을 가리는 무리, 어둠을 타서 남의 집을 뚫고 들어가며 낮이면 틀어 박히는, 모든 빛을 외면한 족속", 욥의 고통이니 경건함이니 이런 것은 욥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고통을 겪는 일들이 많이 있다. 까닭없이 자식이 죽어버린, 정말 까닭을 모르겠는 그런 일도 있다. 그런데 여기 이제 "모든 빛을 외면한 족속", 이 규정이 진짜 여러 차례 곱씹게 되는 그런 거였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한 번 읽고 또 다른 책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부분을 여러 번 되찾아보게 될 것이다. 욥기는 물론 이에 대해서, 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답이 없다. 이것을 인간이 답을 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도 사실 답을 주지 못하고 신의 답이 성서에 있다고는 하지만 있다고 믿는 것이지 그것이 진짜로 있어서 그러겠는가. 

〈욥기〉 24.13-17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 해만 지면 살인자가 활개를 치며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다니고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 /  남의 아내를 넘보는 눈은 어둠을 기다리며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 하며 얼굴을 가리는 무리, / 어둠을 타서 남의 집을 뚫고 들어가며 낮이면 틀어 박히는, 모든 빛을 외면한 족속, / 한밤중이 그들에게는 아침인가 짙은 어둠 속에서 온갖 무서운 일을 자행하는 무리.


그리고 이제 31장까지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욥은 잘못이 없다, 끝까지 자신이 결백하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깊이 생각해 봐도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 벌을 받을 까닭이 없다, 이게 내 생각, 인간의 생각이다.  앞서서도 여러 번 말했다시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인과 계열 속에 엮어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지만 그건 참으로 어렵겠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건들도 정말 당연히 인류에 입각해서 분노하고 추모해야 될 일이 많다. 그런데 가만히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게 또 아니다. 역사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하느님이 내게 괴로움을 주시는 것은 하느님이 아시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인 내가 어찌 알겠는가. 이런 고통이 나에게 오고 이런 괴로움이 오는 것은, 여기 하느님이라는 말 안에다가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건 아닐까 라고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 거대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 내가 그것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는 않더라도 그런 연쇄가 뭔가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신정론을 따져 묻고 그다음에 인과 응보를 따져 묻고 이렇게 한다 해도 결국 우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성찰로 들어가게 되면 무엇이 남느냐, 인간은 참으로 하찮은 존재구나 라는 그런 정말 허망한 그리고 덧없는 통찰이 남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면 그게 이제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구나 하는, 그게 바로 실존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이다. 실존적 존재Existenz, 그냥 이곳에 이 시간에 그저 있을 뿐인 그런 존재라는 것이 남는다. 내가 내 머리로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원인을 모르겠고 신에게 호소한다 한들 신이 어떻게 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막막한 상태로 멍하니 있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실존이다.  그러면 그게 우리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밑바닥의 최저선인데 그것을 전제하고 뭔가를 하겠다고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실존적 결단인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져보고 하는 것들은 역사적 성찰일 것이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역사적 성찰과 실존적 결단 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14강 160 나는 아무 생각해봐도,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나는 고난을 겪고 있다. 어찌된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따져보기는 하겠으나 하느님이 내게 무슨 괴로움을 주시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인 내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 욥의 총제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가 우리에게 인과응보 얘기도 하고 신정론 얘기도 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궁극에는 실존적 최저선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실존적 최저선에서 뭔가를 결단하게 하고,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그렇다는 얘기, 그것을 한번 이제 14강을 마무리하면서 그 얘기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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