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7 제14강(4) 구약 성서 〈욥기〉

 

2023.07.22 문학 고전 강의 — 37 제14강(4)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4강(4) 
신에게 원망怨望하기(murmuring) — ‘금송아지 사건’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출애굽 32.1-7)

 

《문학 고전 강의》 제14강 자신을 저주하다가 신에게 반항하는 욥은 책도 이 부분이 좀 길고, 성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악의 문제 또는 근본적인 고통의 원천에 관한 얘기가 많다. 15강 말의 잘못을 회개하고 신에게 무릎 꿇는 욥은 그런가 보다 하고 왜 신에게 무릎을 꿇어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는데, 14강에 있는 이 얘기는 "욥은 신에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직접 따져 묻게 됩니다."라고 얘기를 했다. 욥은 직접 대화를 해보겠다라는 것인데 친구들을 비웃는다. "참으로 자네들만이 유식하여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군. 나에게도 그만한 생각은 있다네. 자네들만큼 모르려니 생각하지 말게. 누가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하겠는가?" 엘리바즈나 소바르가 얘기한 것처럼 도덕적 응보, 신의 지혜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 그건 상식이다. 응보라고 하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이제 자신이 영원한 갑이라고 생각하고 끝없이 갑질을 하게 되는 그런 인간, 영원한 갑질의 인간이 탄생한다. 요즘 그런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된다. 옆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조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영원히 아무런 응보도 받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아주 자신만만함, 도덕적 응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상식인데 도덕적 응보라고 하는 것을 흥하고 콧웃음 치고 넘어가버리면 그 순간부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선 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욥도 그런다. "자네들만이 유식하여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군"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해보겠다고 한다. 

제14강 154 욥에게 신은 그의 친구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욥은 신에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직접 따져 묻게 됩니다.

〈욥기〉 12.2-3 
참으로 자네들만이 유식하여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군. / 나에게도 그만한 생각은 있다네. 자네들만큼 모르려니 생각하지 말게. 누가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하겠는가?


그러면서 욥기 13장 3절에서 5절까지 이렇게 얘기를 한다. "내가 참으로 통사정을 나누고 싶은 이는 전능하신 분, 하느님께 드릴 말씀을 다 드리려네. 자네들은 고작 거짓말이나 꾸며내는 사람들, 모두들 하나같이 돌팔이 의사…… 입을 좀 다물게. 그러는 편이 현명할 것일세."라고 말하고 23절에서 이제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죄악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역죄가 있다면, 어찌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십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제 신에게 직접 묻는 태도이다. 그래도 이건 낫다. 신에게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는 그런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에게 묻지 않고 신에게 물어봐야 대답이 없을 것 같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지친다. 고난을 겪다가 지쳐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 이제 흑화되는 것이다. 

〈욥기〉 13.3-5 
내가 참으로 통사정을 나누고 싶은 이는 전능하신 분, 하느님께 드릴 말씀을 다 드리려네. / 자네들은 고작 거짓말이나 꾸며내는 사람들, 모두들 하나같이 돌팔이 의사…… / 입을 좀 다물게. 그러는 편이 현명할 것일세.

〈욥기〉 13.23
나에게 죄악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역죄가 있다면, 어찌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십니까?


그것을 성서에서 우리가 욥기 이전에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출애굽기Exodus이다. 이게 탈출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Exodus를 그대로 번역하면 탈출기이다. 출애굽은 이집트를 떠난다는 얘기만 있는데 사실은 떠난 것도 중요하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 사건이다. 이집트를 떠난다, 그다음에 광야에서 헤맨다, 그다음에 약속된 땅으로 보내준다고 하는 그런 계시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셋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출애굽기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얘기는 아직 없다. 이어지는 레위기라든가 민수기, 신명기까지 가야 한다. 신약covenant pericope라고 하는 에피소드가 그렇게 신명기까지 가야 끝난다.  그런데 어쨌든 광야wilderness에서 자꾸 헤매다 보니까, 이제 믿도 끝도 없는 고난이 계속 이어지니까 백성들이 어떻겠는가. 이게 야훼 믿고 따라 나왔더니 온갖 고생은 다 하고 아무래도 아닌가 보다, 우리가 잘못 나왔나 보다. 그런데 이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되돌아가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러니 그 길은 끊어졌다. 원래의 길로 돌아갈 수가 없다. 광야에서 계속 헤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제 야훼에게 뭔가를 가지러 산에 올라갔다. 그런데 안 내려온다. 그러면 마음이 급해진다. 여기서 이제 조급한 마음, 급한 마음, 모세가 저 산에 가도 뭔가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 같아 라고 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다. 금송아지 사건이라고 하는 게 고난을 겪는 이들의 흑화된 사건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서 6절까지인데 한번 읽어 보자.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모세만 믿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는, 무작정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제 신에게 원망하기murmuring라고 하는데, murmuring이라고 하는 게 조용히 불만을 표한다는 말인데, 꼭 그렇지는 않다. 금송아지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murmuring이라고 한다. 이삭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라는 에피소드는 아케다 사건이라고 하는데 모두 전형적인 사건들이다. 저는 이것이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는데, 지치고 힘들고 하니까 열화되면 미쳐버리지만 열화되기는 싫고 그럴 때 흑화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제 금송아지 사건, 금송아지 만드는 것이다.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 오래도록이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의미가 있다. 지금 욥도 그동안 이렇게 하느님을 내가 경건하게 모셨는데 왜 이러는가. 그러니까 욥은 이제 하느님에게 직접, 욥은 흑화되지는 않는다. 욥은 엄청난 사람이다. 따라서 욥 정도만 되면, 믿음의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상투적인 표현이고 흑화를 견뎌낸다고 하는 것이 진짜 무서운 것이다. 흑화를 견뎌내는 거 어렵다. 금송아지 안 만들고 흑화를 견뎌내기 어렵다. 금송아지를 안 만들고 화를 견뎌내는 게 어렵다.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게 며칠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게 이제 함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광야wilderness에서 아주 오래도록 헤맸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어서 만들어 달라는 것, 어서라는 말도 지금 당장,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것이다. 모세를 기다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이집트 땅을 벗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세월을 이제는 못 견디겠다. 마지막에 한 번 꺾이는 것이다.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 뭔가 이제 느낌이 쎄하다. 이것을 지금 오늘날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로 번역을 해보면 그동안 우리는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우리 눈앞에 성과를 좀 보여달라. 그리고 우리한테 약속된 미래를 얘기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버렸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Exodus의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현실에서 비유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텍스트들을 우리가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울림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이클 왈저가 쓴 《출애굽과 혁명》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 보면 murmuring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예를 들어서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을 가져다가 얘기를 한다. 그것은 그 사람 머릿속에 사례가 그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을 참조할 게 아니라 2023년 한국을 참조하면 된다. 

 

그러니까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게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눈에 안 보이는데 눈앞에 보이는 게 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이 금송아지를 원한다. 그러니까 욥은 얼마나 대단한다. 하느님이 나한테 이렇게 고난을 주니 신에게 반항을 할지언정 다른 신을 믿어봐야겠네 하고 금송아지 만들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유형의 뭔가를 보고 이렇게 떠들어 대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론은 흑화된 지식인이다. 아론은 사제이고, 레위 지파를 이끌고 가게 된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이제 개운해진 것이다.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만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일찍 일어나, 이러한 단어 하나 하나가 꽂힌다. 이제 눈에 보이고 숭배할 뭔가가 생겼으니까 늘어져 있다가 일찍 일어났다.  흑화된 이들의 특징이 이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몸도 개운해지고 그러니까 얼마나 좋은가.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그러니까 32장 7절을 보면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참 좋은 표현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이제 흑화된 사람들을 보고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구나 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는 최소한 고약하게 놀아나지는 않아야 하는데 참 쉽지 않다. 고약하게 놀아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참고 견디는 것이다. 

〈출애굽기〉 32.1-7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번외편으로 좀 생각해 볼 만한 게 있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읽은 사람이라고 해보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못 들어갔다.  모세가 못 들어가는 사건들에 대해서 가슴이 아픈데 어쩌겠는가. 모세도 못 들어갔는데 나도 못 들어가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요즘에 많이 하게 된다.  

어찌보면 murmuring을 하다가 흑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오늘 자신을 저주하다가 신에게 반항하는 욥, 신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던 것과 전혀 다른 태도로 죄를 따져 묻는 욥을 읽어야 되는데, 욥은 어쨌든 흑화되지 않았다 murmuring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을 한번 말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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