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2023.08.02 문학 고전 강의 — 40 ‘신정론’에 관하여(1)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신정론’에 관하여(1)
마크 래리모어, ⟪욥기와 만나다 - 고통받는 모든 이를 위한 운명의 책⟫
4. 신정론과 욥기
‘신정론’(theodicy)은 악과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진술한다.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 중세 섭리에 관한 논쟁과 근대 신정론에 관한 논쟁이 지닌 차이를 식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중세는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 근대는 ‘무신론에 입각한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문학고전 강의》 제15강까지 읽었다. 제15강까지 읽으면서 욥기를 설명했다. 욥기를 설명하면서 중간에 잠깐씩 얘기했던 책 하나가 있다. 마크 레리모어의 《욥기와 만나다》으로 부제가 고통받는 모든 이을 위한 운명의 책이다. 희랍의 비극들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에 들어가기 전에 이 《욥기와 만나다》의 특정 챕터 중에서도 특정 부분을 간단하게 설명을 하려고 한다. 《욥기와 만나다》는 첫 번째 챕터가 고대 해석자들이 바라본 욥기이다. 고대에는 욥기를 어떻게 읽었는가, 일종의 해석의 역사, 문헌사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 챕터는 논쟁 속의 욥기이다. 욥기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 그다음에 셋째 챕터는 공연되는 욥기. 욥기를 가지고 뭔가 무대에 오른 것들이 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챕터가 신정론과 욥기이고 그다음에 다섯 번째 챕터가 추방당한 욥기이다. 그런데 오늘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해보려고 하는 것은 신정론과 욥기이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것은 욥기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한 번쯤은 거론을 해야 되겠는데 제가 신정론 전문가도 아니고 그래서 마크 레리모어의 책에 있는 내용을 두 번에 걸쳐서 얘기하려고 하는데, 신정론과 욥기라고 하는 부분은 이 책의 181 페이지부터 223페이지까지이다. 이 중에서도 181페이지부터 197페이지까지 그러니까 근대에 있어서 신정론이 논의가 되면서 어떻게 욥기가 거론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칸트에 와서, 칸트에서 보면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이 있다, 그것에서는 어떻게 정리가 되는가 즉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신정론에 관한 논의들을 정리해서 말하려고 한다.
칸트 다음에는 이제 위대한 유대인 칸트 주의자 헤르만 코헨이 나오고 종교·윤리적 욥기 독해 이렇게 나간다. 그다음에는 헤르더라든가 레비나스 이런 사람들 나오는데 그것은 그냥 두고 일단 칸트까지 이르는 동안에서의 라이프니츠와 칸트 이런 사람들의 신정론이 어떠한가 그 문제를 생각을 해보겠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문제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올바름을 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올바름에 대한 어떤 생각이 감정의 동요일 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벤담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쾌락과 불쾌 그리고 측정 가능한 것들 그런 것으로 모든 것을 넘겨버리면 되는가 그런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고 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엄청난 발명인 것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게 여기에 보면 이렇게 얘기되어 있다. 197페이지에 보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를 따르는 이들은 인간 본성이 삶의 도덕적 역설들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는 까닭에 반신정론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 말이 뭔지는 토요일에 다시 설명을 하기로 하고,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칸트의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오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욥기와 만나다》 197 칸트는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인간 본성의 근본적 악"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이해의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진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를 따르는 이들은 인간 본성이 삶의 도덕적 역설들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는 까닭에 반신정론을 강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욥기에서의 상황을 한번 생각을 해보겠다. 욥은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신도 인정할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청난 불행이 닥쳐오고 스스로에게 몸에 부스럼도 나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 욥은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욥기를 얘기할 때 여러 번 얘기했었다.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어떤 그런 것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럼 그걸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뭔가 잘못했겠구나,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하고 신을 탓하거나 세상의 이치가 글러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조금 이따가 설명을 드리겠는데 앞에 있는 것이 이를테면 근대 이전의 생각이다. 인간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욥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근대 이전의 생각인다면 신이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이렇게 생각해버리는 것, 그나마 신이 어떻다 저떻다 말해버리면 신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는 태도이지만 그것도 아니고 세상의 이치가 형편 없어졌네, 엉망이 되었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신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생각을 한다는 것, 동기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을 텐데 자기 이해의 한계를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나는 분명히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건 분명히 잘못된 거야 내가 모르니까 잘못된 거야 라고 하는 것, 이것을 바로 칸트는 인간의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고, 나의 무지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그런 태도를 인간 본성의 근본적 악이라고 불렀다.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하게 잘못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건데 나의 무지,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을 칸트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 악이라고 얘기를 했고, 마크 레리모어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고 하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하기로 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듯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는데 그게 칸트의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정론에 관한 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정도만 일단 알아두기로 하자.
이제 181페이지부터 있는 내용을 한번 생각해보겠다. 욥이라고 하는 존재는 우리가 앞서서 읽었듯이 어쨌든 경건한 인간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내가 이걸 모를 수 있다, 이건 분명히 나의 능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일이므로 신께서 하는 일이다 하는 그런 겸손을 보여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욥기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정직한 인간, 말 그대로 정직한 인간 그리고 바로 그런 무지에 대한 겸손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부분을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부분을 떼어내서 이것은 근대적인 의미의 무지에 대한 존중, 우리가 무식한 걸 존중해주고 떠받들어준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겸손하다는 걸 말한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굳이 신에 대한 신앙이 없다 할지라도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 할지라도 욥기는 받아들여서 읽어볼 만한 그런 텍스트가 된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만들어낸 말이다. 이 말은 희랍어로 신을 뜻하는 테오스theos와 올바름을 뜻하는 디케dike를 합해서 theodicy라는 말을 만들어서 썼다. 지난 시간에 얼핏 얘기했던 것처럼 이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이라고 하는 그런 주장을 펼쳤다. 물론 그 이후의 사상가들은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고 얘기를 했다. 182페이지에 보면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하나는 중세의 섭리에 관한 논쟁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뭔가 문제가 있을 때 이건 내가 무지한 것이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신 앞에서 이것을 회개하고 반성해서 나아갈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것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그리고 근대는 무신론에 입각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 신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이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이렇게 물어보는 게 무신론에 근거한 물음의 방식이겠다. 이렇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 점차 무신론이 어떤 위력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는 정말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문제의 시대이다. 마크 레리모어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종교 전쟁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는 분열되고 훼손되었으며 교회의 성서 해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정적인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우의적 해석은 신뢰를 잃었다"고 되어 있다. 우의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이 성서의 이 구절은 이런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석을 해주면 그 해석에 따라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제 17세기부터는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런 신뢰를 잃어버리면서 자연스럽게 뭔가 다른 신뢰를 할 만한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세계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 이게 바로 과학 혁명으로 인한 발견들이 이어지면서 자연과학적 세계의 이해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전환기가 된다. 그래서 "둘째, 과학혁명으로 인한 발견들이 이어지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이 세계를 안식처로 삼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인 생각이 힘을 얻었다." 재미있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인간들은 굉장히 낙관적으로 세계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게 이제 자연과학적 세계관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인간들은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저는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그냥 살아가고 있으니까 생명이 주어졌으니까 산다 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인생은 짧기 때문에 짧은 인생에서 얻은 몇 가지의 단편적인 통찰만 가지고 세상을 살 만한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세상은 참 복잡다단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다 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다 라고 말해온 것들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냥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었으니 저는 사실 답을 내질 못하겠다.
《욥기와 만나다》 182 근대 이전의 사상가들은 하느님이 세계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근대 사상가들은 신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활동하는지, 설령 활동한다 해도 신이 정녕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물었다. 중세 섭리에 관한 논쟁과 근대 신정론에 관한 논쟁이 지닌 차이를 식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중세는 '난문을 제기하는 방식', 근대는 '무신론에 입각한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욥기와 만나다》 184 종교 전쟁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는 분열되고 훼손되었으며 교회의 성서 해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정적인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우의적 해석은 신뢰를 잃었다 이에 상응해 고대 학문이 부활하면서 세계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가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욥기와 만나다》 185 둘째, 과학혁명으로 인한 발견들이 이어지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이 세계를 안식처로 삼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인 생각이 힘을 얻었다
그러면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했을 때 이 과학적 세계관을 마크 레리모어는 "종교적 믿음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했다"고 말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즉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믿어오던 종교적 믿음을 한순간에 폐기할 수는 없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열광적으로 열심히 종교를 믿는 분들이 있다. 그렇게 쉽게 폐기가 안 된다. 그분들도 병원 다니고 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종교에 의존하고 있는 그런 지점들이 있다. 그래서 이제 과학적 세계관이 종교적 믿음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했다 라고 말할 때 악의 문제를 이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중요한 물음이 된다. 그렇다고 당장 악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라이프니츠는 비록 신정론이라고 하는 말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이라고 하는 일종의 신의 섭리를 옹호하는 대답을 내놓는다.
《욥기와 만나다》 185 과학은 종교적 믿음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했다.
그리고 존 밀턴의 《실낙원》의 이 구절 굉장히 중요하다.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리라." 이게 실낙원, 잃어버린 낙원의 목표이다. 그러니까 밀턴은 christian epic tradition에 들어있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리라", 이게 1667년에 나왔다. 그러면 17세기 말에 나온 이 텍스트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섭리를 인간이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전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종교를 대체하지는 않았다 라는 것을 우리는 《실낙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실낙원》에서 밀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신앙을 증명한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보면 그보다 이전이지만 프랜시스 베이컨과 같은 사람들도,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과학에 굉장히 몰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앙을 버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 지상에 신의 섭리가 실현되는 낙원을 건설하는 게 인간이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정도로 전환기, 두 가지가 완전한 의미에서 자연과학 따위는 필요 없어, 나는 믿음만 있으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에 자연과학적으로 섭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고, 밀턴처럼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옳음을 밝히겠다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제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1775년 리스본 대지진이다. 리스본 대지진이 일어남에 따라서 세계에는 악이 있다 라는 선언이 나오게 된다. 그게 볼테르이다. 이때부터는 악의 문제가 《캉디드》와 같은 책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신과 대면하는 인간이 남아 있는데 신과 대면하는 이 인간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이것들에 대해서 섭리따위는 없다 라는 생각에서 철저하게 묻는다. 그러니까 1775년 리스본 대지진을 딱 그날 그 해부터 그랬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제 18세기 말에 이르면 반종교주의인 계몽주의가 본격화되면서부터 철학적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둔 신정론,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 그런 생각들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계몽주의 철학에서는 정말 이 문제를 신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궁리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텍스트가 되리라고 본다.
《욥기와 만나다》 190 18세기 말에 이르자 철학적 낙관주의에 바탕을 둔 신정론은 사라졌다. 하지만 악이라는 문제와의 대결은 엄밀히 말해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서 근대 의식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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