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6 제14강(3) 구약 성서 〈욥기〉

 

2023.07.18 문학 고전 강의 — 36 제14강(3)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4강(3) 
엘리바즈의 도덕적 인과응보론: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대로 거두더군.”(4.8)
소바르의 관상적 태도: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11.7)

 

문학 고전 강의 제14강은 분량이 많다. 분량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닥치게 되는 또는 닥친다는 말보다도 좀 강한 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일들을 부딪쳤을 때 우리의 실존이 온전히 남아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겪어보지 못한 일들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학습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고 학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그게 없다. 그런데 학습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모른다, 예전에 한번 겪어봤는데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겨냈더라 하는 것이, 학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겪어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처리했던가, 어떻게 대응했던가 라고 하는 대응책까지도 기억하고 있고 그런 것을 학습이라고 한다. 학습이라고 하는 게 단순히 당해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의 일을 학습하지 못하였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일 텐데, 학습에 실패한 경우가 많다. 학습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저도 철학 선생이라고 해서 뭔가를 학습을 하는데 저도 학습이 잘 안 되는, 제가 안 되니까 남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주의적인 생각 버려야 될 텐데 말이다.  

 

지난번에 우리가 읽었던 지난번에 14강 두 번째 시간에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3장 26절에 있는 욥의 저주와 한탄, 그러고 나서 이제 그에 대해서 엘리바즈가 인과응보에 대한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빌닷도 인과응보를 얘기하고 소바르도 그 얘기를 하는데 오늘은 이제 엘리바즈의 얘기를 좀 보려고 한다. 엘리바즈는 응보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말을 한다. 엘리바즈의 이야기는 4장에 있다. 4장부터 5장까지가 도덕적 인과응보론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이다. 지금 욥은 곧바로 당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다음에 엘리바즈나 소바르나 빌닷은 한 발 물러서 보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당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발 물러나서 이렇게 저렇게 구경하면서 훈수 두는 사람이 못마땅할 수가 있는데 그게 못마땅한 것인 건 맞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못마땅한 것을 이렇게 보고 닥치기 전에 한 번은 그런 일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욥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욥기〉 3.25-26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151페이지의 "엘리바즈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이게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라는 말 자체를 제가 잘 안 쓰는데, 이건 정말 틀림없는 널리 퍼져 있는 얘기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도덕적 인과응보론이다. 이런 것을 갖다가 촘촘하게 이어서 논변을 만들면 바로 이제 불교에서도,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불교 얘기를 꺼낸 이유가, 지금 욥기라는 텍스트는 구약 성서에 들어있는 것이고 구약 성서에 들어있는 것이니까 흔히 우리가 말하는 서양의 전통 속에서 나온 얘기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지역 그리고 이 욥기 텍스트가 아주 먼 옛날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앞서 말한 바 있는데, 욥기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 마크 레리모어의 책을 얘기하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지역은 아시아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중세를 지내면서 유럽이라고 하는 곳은 자기네들이 유럽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바가 있긴 있다. 그런데 아시아 사람들은 사실 그건 없다.  적어도 여기 지역에 있는 사람이 서양의 사고 방식이다 라고 말하면 딱 들어맞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서양의 사고 방식이라고 일단 간주한다 하더라도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도덕적 인과응보론에 대한 얘기는 받아들이고 있다. 인과응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불교에서 많이 쓰고 있는 얘기이다. 인과, 원인과 결과, 원인에 대해서 결과가 나온다, 응보, 마땅히 대가를 받게 된다. 그런 얘기다. 이게 바로 이제 불교에서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한다. 원인이 있어서 이어 붙여서 뭔가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의 무수한 연세가 있는 것이 바로 이제 연기설이다. 계속 원인과 그것에 상응하는 것들이 끊임없는perpetual, consistent라기보다는 끊임없는perpetual 커넥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어 붙이는 것인데, 태어남이 있으니까 죽음이 있는 거 아니겠는가. 왜 죽었는지는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원인으로 밀고 들어가게 되면 애초에 그러면 태어나지 않으면 죽는 일도 없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런 얘기를 한 거 아닌다. 그럼 죽어버려야 되는가, 답을 못 내는 것 같다. 아무리 그것에 대해서 성찰을 한다 해도 어느 한순간 그 성찰을 멈춰 버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욥기〉 4.8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이 도덕적 인과응보에 근거해서 엘리바즈는 온전한 해결책을, 하느님을 찾아라 이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왜 하느님을 찾는가. 지금 욥기에 나오는 하느님은 유일신교에서의,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겠지만 가만히 보면 스토아주의적인, 즉 우주의 법칙으로서의 하느님 이런 의미도 조금 있다.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으로서의 하느님이라고 얘기를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욥기나 전도서나 이런 쪽은 유일신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들어 있는 텍스트들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해서 보면 유일신교의 신의 성격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다.  차라리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스토아주의적인 우주 이성 또는 세계의 법칙 그런 것과 가깝다. 엘리바즈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읽어보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 나오는,《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도 크게는 스토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텍스트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쪽과 훨씬 가깝다. 그런데 지금 여기 엘리바즈는 한 발 물러서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당하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금 내 몸뚱어리가 이렇게 괴로운데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라고 이것만큼 무책임해 보이는 조언은 없다.  그러니까 엘리바즈가 4장과 5장에서 인과응보를 얘기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 이것이다.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욥에게는 이런 것이다. 당신이 악한 짓을 했고 불행의 씨를 뿌렸다, 분명히 너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거두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지금 추적해서 알아내기는 곤란한 모양인데,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멀쩡할 때는 또 불행이 없을 때는 내가 뭔가 불행을 자초할 일을 하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또 생각을 안 하니까 그렇다. 그러니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안하고 느긋할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사실은 그때는 그런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여유가 있을 법도 한데 그러다가 불행이 닥치고 고난이 닥치면 그것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나에게 언젠가는 닥쳐올 불행의 원인을 지금 내가 만들고 있지 않는가 라는 그런 생각은 행복한 시기에는 못하고, 또 막상 불행이 닥쳤을 때는 내가 언젠가 이 불행의 원인이 될 만한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까를 생각할 틈이 없다. 이래저래 불행의 씨를 뿌린 것에 대해서 생각할 틈은 어떤 경우에든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읽을 때는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라고 엘리바즈가 조언을 한 것이 참 무책임하고 뜬금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경황이 없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경황이 없는데 뭘 생각을 해서 불행의 씨앗을 내가 뿌린 적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겠는가. 그냥 다짜고짜, 정말 말 그대로 다짜고짜 하느님을 찾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한다.  

〈욥기〉 5.8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


원인 분석은 4장 8절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그다음에 지금 정신없고 고난을 당하느라고 경황이 없는 욥에게는 아주 딱 들어맞는 대책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게 이제 엘리바즈의 도덕적 인과응보론이다. 도덕적 인과응보론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도덕적 인과응보론이라는 게 어디에나 들어맞을 만한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따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 이 우주의 생성 자체가 원인이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이제 예상했던 대로 우리가 짐작하듯이 욥의 반응은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몸에 박혀 나의 영혼은 그 독을 마시고 있는데 하느님의 두려움이 나를 휘몰아치는구나." 이게 도덕적으로 잘하였다 못하였다를 따져볼 경황이 아니고 그냥 두려움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얘기를 불러오는가.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하다네." 그렇게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바즈가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라고 말했을 때 지금 하느님을 찾는 건 무책임한 행위 아닌가, 내가 과거에 불행의 씨를 언제 뿌렸는지를 한번 생각을 해보고 온전히 이 고난의 책임을 나에게 귀속시켜야겠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저는 좀 그러고 싶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고난이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번 이 시점에서 멈춰서 생각해볼 만한 텍스트 아닌가 싶다.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아 이건 도저히 내가 그 원인을 규명할 수도 없고 규명할 수 없으니 그것이 나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판단도 할 수 없고, 그럴 때는 판단을 중지하고 그 누구에게도 탓을 돌리지 않고 심지어 신에게도 뭔가를 갈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그냥 당해버린다.  그게 스토아적 현인이고, 스토아적 현자들의 태도이다. 그게 고요함이고 인간 같지 않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느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뭔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에요 이렇게 하는 것, 그게 이제 울부짖고 그래서 신께서 나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셨다 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보면, 나쁘게 말하면 광신이고 좋게 말하면 그게 건강한 신앙인의 태도일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원인을 캐물어서 어디에다가 책임을 귀속시킬 것인가, liability, 법적 책임도 되지만 밝혀질 수 있는 어떤 그런 책임도 되겠다. liability, 유한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걸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하면 고요하게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 즉 그 사태를 관상contemplation하는 것이 스토아주의일텐데 그것이 인간다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욥기〉 6.4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몸에 박혀 나의 영혼은 그 독을 마시고 있는데 하느님의 두려움이 나를 휘몰아치는구나.

〈욥기〉 6.13
나 이제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하다네.


그래서 이제 욥의 반응은 철저하게 이른바 '인간적인 태도'인데 그것에 대해서 소바르는 인간은 신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전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소바르의 태도는 원인을 찾을 수도 없다. 인간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으니 전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꼭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의 논변이 아니라 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알 수 없으니까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라고 하는 11장 7절의 소바르의 말을 책에는 인간과 절대자인 신과의 관계라고 이제 해명을 해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신비라고 하는 게 우주의 법칙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네가 우주의 법칙을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 '이라고 하면 이제 우주에 관철되고 있는 무한한 법칙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 라고 약간 비틀어서 읽어보면 우주적인 이성, 우주의 법칙을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수동적인 태도, 수동적인 태도라고 하는 것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태를 이렇게 관조하는 것, 그러면 여기에 이제 세 가지가 있다. 욥은 정말 실존적,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그 자체에 매몰되어 있거나 또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면 엘리바즈는 아주 동서고금에서 널리 통용될 수 있는 설명, 즉 도덕적 인과응보론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소바르는 소바르는 그것에 대해서 우주법칙론 또는 관조contemplation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게 세 가지가 있겠다. 엘리바즈의 얘기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고 도덕적 인과응보론이라고 하는 것을 끝까지 따져 들어가서 인간에게도 책임을 지우는 그런 얘기가 부처님 말씀이다. 우주의 법칙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도 그것에 완전히 수동적으로 있는 것만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니까, 이 세 가지 태도가 여기에 이 부분에 나온다. 그러니까 이제 욥은 친구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면서, 욥은 이제 결국 신에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직접 따져 묻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신과의 대화가 나오는데 욥이 뭐 신에게 따져 물어봐야 신이 뭐라고 하겠는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욥기 이 부분에서 엘리바즈와 소바르의 얘기를 통해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또 고난은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아주 행복한 순간도 썩 그렇게 반겨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평생 행복하게 살 수는 없고 평생 불행하게 살지는 않는다. 그럼 행복과 불행 둘 다 소바르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행복할 만한 일을 했던가, 행복을 지금 얻을 만한 일을 했던가를 따지기도 그건 귀찮으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소바르처럼 행복도 불행도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그냥 그 무한한 법칙의 세계를 더듬지 말고 냉정하게, 고요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라는 태도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욥기〉 11.7
자네가 하느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제14강 153 이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한 가장 올바른 말일 것입니다. 신은 말 그대로 '절대자'이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신과 맞설 수 없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