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 10점
구범진 지음/민음사

들어가는 말| 두 마리 토끼 잡기

1장 청나라와 중국
|더 살펴보기| 삼전도비의 ‘수난’

2장 미약한 시작, 창대한 나중
|더 살펴보기| 누르하치, ‘혁신’의 지도자

3장 팔기와 청나라의 제국 통치
|더 살펴보기| 팔기의 조선인 후예들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더 살펴보기| 러시아에 간 청나라 사절단

5장 청 제국 질서와 조선
|더 살펴보기| 연행사의 봉변

6장 키메라의 제국
|더 살펴보기| ‘대청황제’, 중국 국민으로

주석
참고 문헌

 


153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 열강은 19세기 중엽 두 차례의 아편전쟁과 난징 조약에서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에 이르는 일련의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청나라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 관계는 17 세기 중엽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유럽에서 성립한, 19세기 동아시아에서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고 불렀던 국제법 원리에 기초한 '조약 체재'였다.

'조약 체제'는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원리에 의거했던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조공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에 강제한 '조약 체제'는 형식상후는 평등할지라도 내용상으로는 불평등하였기 때문에 보통 '불평등 조약 체제'라고 불린다. 과거 '조공 체제'와는 반대로 '불평등 조약 체제'에서 우위에 섰던 것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양 열강이었다. 

그런데 모든 서양 국가가 '불평등 조약 체제'가 형성된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서양 국가들 가운데 유독 러시아만은 이미 오래전에 청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또한 양국의 외교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조공 관계가 아니 '평등'한 조약 관계로,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155 이처럼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는 서로에 대하여 호혜 ·평등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역사상 '중국'을 지배하였던 제국의 황제로서 외국의 군주에게 대등한 지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청과 러시아의 대등한 외교관계는 그 자체로 이미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더하여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 체제'의 형성 과정과 운영 실태는 앞에서 살펴본 청나라의 제국 형성 과정 및 제국통치 원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 체제'의 형성은 당시 청나라가 준가르와 정면 대결을 벌이던 상황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즉, 청나라는 준가르와 러시아의 동맹 체결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러시아와 조약 관계를 수립하였다. 달리 말하면 청나라는 대 러시아 외교를 광의의 '몽골 문제'로 취급하였던 셈이다.



181 청나라의 제국 통치가 한인의 왕조국가 명나라와 이렇게 달랐다면 1637년을 기점으로 명나라의 조공국에서 청나라의 조공국으로 처지가 바뀐 조선은 청 제국 주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였을까?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청 제국 주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어떻게 이해하여 왔는지 간단히 언급한다.

일찍이 1960년대에 맨콜이라는 학자가 청 나라의 조공 체제와 관련하여 일종의 '이원구조'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을 필두로 한 과거 명나라의 조공국은 물론 청나라의 번부 역시 조공 체제 안에 포함시켰다. 번부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가 직성 지역과 달리 근본적으로 간접 지배의 성격이었으며, 번부에도 형식상 책봉 · 조공의 예제를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맨콜은 청 제국의 조공 체제가 포괄하는 공간을 생태 환경을 기준으로 '동남 초승달 지역'과 '서북 초승달 지역'으로 양분하고, 이 두 지역을 청나라의 중앙 관제와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즉, 정주 농경 사회로서 일찍부터 유교와 한자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동남 초승달 지역'은 예부, 대개 초원 유목 사회로서 '중국' 문화의 영향이 훨씬 약했던 '서북 초승달 지역은 이번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맨콜의 '이원구조' 속에서 조선은 유구, 베트남 등과 함께 '동남 초승달 지역'에 속한다. 나중에 일본 학자들이 맨콜의 이론을 한층 발전시켜 외교 관계뿐만 아니라 청 제국의 구조 전반에 걸쳐 '이원구조'론을 확대시켜 적용하였다.

조선은 일찍이 1630년대에 무력에 의한 정복으로 청나라 중심의 새로운 질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지만, 외형상 조선 · 명 관계와 마찬가지로 책봉 · 조공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맨콜은 물론 이거니와 거의 모든 학자가 조선 · 청 관계를 조선 · 명 관계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였으며, '이원구조' 속에서 조선을 유구, 베트남 등과 함께 '동남 초승달 지역'에 위치시켰다.


225 청 제국을 '키메라'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키메라' 생명체를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생명체는 생물학적 발생 과정에서 몇 가지 서로 다른 유전자 조합이 형성되고 그것이 세포와 조직으로 자라나서 각기 머리 · 몸통 · 사지 등을 이룬 아주 복잡한 '키메라'다. 청나라의 팔기 조직은 청 제국이라는 '키메라' 생명체의 머리에 비유할 수 있다. 팔기는 곧 1636년경에 탄생한 다이칭 구룬으로, 그 자체가 만주 · 몽골 · 한인의 유전자가 혼재하는 '키메라'였다.

입관 이후 팔기는 청나라의 제국 통치에서 줄곧 중추의 역할을 맡았다. 청 제국에서 명나라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직성은 제국 전체를 지탱하는 각종 자원을 공급하였으므로 음식물을 소화하여양분을 온몸에 공급하는 몸통에 해당한다. 이 몸통의 세포와 조직은 먄주 유전자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한인의 유전자가 발현되어 자라난 것이다. 한인 유전자의 작용 범위는 대체로 몸통에 국한되었다.

청 제국의 번부는 '키메라' 생명체의 사지에 해당한다. 다이칭 구룬의 탄생 무렵 사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내몽골 초원에 불과하였지만 18 세기 후반이 되면 제국 판도의 절반을 넘길 정도로 커졌다. 이 부분의 세포와 조직에는 만주 유전자와 몽골 유전자가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청 제국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지배 구조를 역사의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키메라' 생명체에 비유하면서 발생학적으로 접근하는 이해 방식은, 18세기 말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던 '세계제국' 청나라가 19세기를 거치면서 '중화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238 지금까지 살펴본 청 제국의 변질을 주식회사의 지배 구조 변화에 빗대어 보자. 19세기 중엽까지 청 제국의 지배 구조에서 한인은 기껏해야 이해관계자(stake-holder)였을 뿐이지 주주 (share-holder)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내우외환을 겪으며 '주식회사 다이칭 구룬'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이 순간 한인 지배층이 회사를 파산에서 구하였다. 회사는 기존 주식의 상당수를 소각하고 한인의 자본을 유치하여 그들에게 신주를 내주었다. 이제 한인은 '주식회사 다이칭 구룬'의 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청나라가 중국번 등에게 봉작을 주어 제국의 공신 반열에 올린 것은 그들의 주주 지위를 공인한 것이다.

새로운 주주들은 이사진에 참여하여 경영 전반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제국 전체에 대한 구조 조정을 이끌었다.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주주들도 구조 조정 노력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9세기 중엽 이후 번부와 만주의 '직성화' 내지 '중국화'는 만 · 한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청이라는 '세계제국'을 '중화제국'으로, 이어서 중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 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역시 만 · 한의 공동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청나라 말기의 만 · 한 관계와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팔기 제도가 끝까지 유지되었으며, 따라서 기인과 민인, 즉 만 ·한의 구분과 차별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청나라 말의 '만주 대 한인'과 '보수 대 개혁'이라는 두 가지 대립 구도의 혼재에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이 두 가지 구도를 '만주=보수', '한인=개혁'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개혁을 추구하는 만주, 보수를 지향하는 한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직성화' 또는 '중국화'라는 만 · 한 합작 프로젝트는 몽골, 티베트, 신장 등지에서는 심각한 불안감과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특히 의화단전쟁 이후 청나라조정이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본격적으로 추진한 '신정(新政)' 개혁은 몽골과 티베트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과 같은 청 제국의 변질을 '키메라' 생명체에 빗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 제국이라는 '키메라' 생명체는 한 차례의 급속한 '변이'를 경험하였다. 안팎의 생존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키메라' 생명체의 내부에서는 한인 유전자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키메라'의 몸통에서는 만주 유전자가 발현된 조직이 퇴화하는 대신 한인 유전자가 발현되어 형성된 조직이 급속히 자라서 몸통 전체를 장악하였다. 한인 유전자가 발현된 세포와 조직은 몸통을 벗어나 '키메라'의 사지로 전이되었다. 머리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키메라' 생명체의 '사령탑' 안으로 한인 유전자가 발현된 조직이 퍼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앞서 보았듯이, 청나라가 내세운 '만한일가'라는 구호는 18세기 말까지 단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19세기 후반의 청 제국에서는 이 '만한일가'의 구호가 더 이상 허울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현실 속에 구현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은 이제 '세계제국'의 면모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안으로는 제국전체의 '중국화'가 추진됨과 동시에 한인 인구의 거주지가 제국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밖으로는 청 제국이 '중화제국(Chinese Empire)'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 시기부터 '키메라'의 제국 청나라에 진짜 한화(漢化)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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