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엄스: 바울을 읽다 - 로완 윌리엄스의 바울 서신 읽기

 

바울을 읽다 - 10점
로완 윌리엄스 지음, 손승우 옮김/비아

들어가며
바울의 편지들에 관하여


1. 내부인과 외부인: 바울이 속한 사회 세계
로마 시민 바울 / 유대인 바울 / 인간 바울 / 종교가 없던 세계
2. 보편적 환대: 바울의 불온한 사상
장벽을 허물다 / 완전히 새로운 자유 /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 / 치유하는 희생
3. 새로운 창조: 바울의 그리스도교적 세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 /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 /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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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 바울 서신 읽기 안내

 


74 바울 저작의 핵심이라는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됨', 칭의에 관한 엄청나게 복잡한 논의, 유럽 종교개혁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이 논의는 결국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이 저자가 바울이었든지 그와 가까운 동료였든지)는 이 주제를 이어받아 놀랍고도 신비로운 통찰을 선보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핵심에 이르렀습니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숨겨져 있던 비밀이 이제 명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그 비밀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의 피조물을 결연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제 이 비밀이 세상을 비추는 빛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는 정확히 어떻게 실현될까요? 바울이 이야기한 자유가 숨겨져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신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라면 이는 그러한 불안으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행동으로부터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는 집요한 자기 집착, 타인이 자신보다 무언가를 더 잘한다는, 그래서 더 사랑받으리라는 두려움, 모든 면에서 만족감을 얻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들말이지요. 이 자유는 우리가 서로 위협하고 위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삶과 안녕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빚어내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는 서로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하시도록 하는 자유입니다. 생명을 불어넣고, 용서와 화해를 약속하며, 말과 행동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활동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는 단지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백성이 과거에 그랬듯 기록된 율법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율법이 목표로 삼던 것이 다른 방식으로, 뒤집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율법은 과거와 달리 우리 안에서 작용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들에 일관된 흐름을 빚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느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 같이 되었습니다
(1고린 9:21)

이제 예수가 우리를 빚어내고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동하고 말할 때 그 모습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빚어내신 모습, 곧 환대와 자비, 봉사, 그리고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기도의 모습을 띕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이 용감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얻게 된 자유는 곧 예수의 자유(그의 죽음 이전과 이후의 삶, 그가 하느님 아버지와 맺은 관계, 그가 인간으로 우리 가운데 와서 희생양으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보여준 헌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예수의 자유를 자신의 삶속에서 '닮고자'합니다.


 

116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는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거부하고 내쫓은 것으로 하느님의 반대편에 선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고난 가운데 예수는 버림받음, 하느님 부재의 경험과 같은 홀로 남겨진 인류의 운명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우리의 짐을 짊어지는 이 행위는 가장 기쁜 소식이 됩니다. 아무리 깊고 어두운 곳에 버림받는다 해도, 이제 하느님께서 꿰뚫고 들어와 치유하시지 못할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양쪽 끝에서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합니다. 한쪽 끝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강렬한 영광을 드러내는 이입니다. 다른 쪽 끝에서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어진 상태를 대표하는 이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날카로운 역설을 보여주는 인물이며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주장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성과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예수가 정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라면 그는 어떤 면에서 모세의 율법이라는 범주를 능가하고 넘어서야만 합니다 예수가 당시 로마와 유대교의 정치와 권력에 의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철저하게 굴욕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하느님의 영광은 그저 인간의 성공, 매력 안전을 부풀린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엮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에 관한 바울의 생각,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들에 관한 그의 생각, 자유와 율법에 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가 자기 백성의 삶과 고통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면("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과거에 있었던 한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여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가 과거 예루살렘 성전만큼이나 하느님의 빛나는 현존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존재라면,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이 겪는 고난의 한복판으로 가져오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느님을 향한 궁극적인 적대, 혹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소외를 대변하는 사형수였다면 기존에 있던 하느님, 그리고 인간의 능력에 관한 이해 모두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바울의 편지들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은 이 편지들을 저 물음에 답하는 일련의 시도로, 그리고 예수를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고민의 결과들로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이 모두 타당하다면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선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내기 위해 조금씩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광채를 본다면,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능력을 감지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운다면, 그가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입니다.


 

125 '파레시아'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할 자유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입술에 예수의 말을 담아 하느님께 기꺼이 나아가려는 자세는 담대함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 주의 기도를 드리기 전 쓰는 공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고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는 담대히 기도합니다. ···

예수가 불렀던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곧 예수의 생명에 빠져듦으로써 (1고린 12:13-14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와 함께 묻혀 그 안에서 새로이 살게 됨으로써(로마 6:3-4) 예수와 성령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기도라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에 대한 그의 이해와 밀집한 연관이 있습니다. 신비롭게도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만물의 원천을 향해 '아버지'라 말할 용기를 얻게 되면 설명할 적절한 말이나 형상을 찾을 수 없는 이를 '가족'으로 여길 수 있게 되면 이로써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법 자체를 철저하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의 말을 주어서 그가 성부, 성령과 나누는 자기희생적이고 배려하며 인내하고 기쁨에 찬 사랑을 우리 또한 말할 수 있게 되고 우리 가운데서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거룩한 생명이 이 땅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생명은 상호성이 영원히 이어지는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하느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완전히 공식화되지는 않았다 해도 말이지요. 또한 그는 의미심장하게도 우리가 이미 '미래'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미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습니다. 그 미래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리스스도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의 정 반대편에 곧 하느님의 생명 안에 있습니다. 온 세계의 온 생명이 이 하느님의 생명에 이끌리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 창조세계의 망가진 모든 것을 화해시키고 치유하는 사랑 때문입니다.


 

142 그가 온 세계의 운명에 대해 말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옥중서신'들에 이를 때까지, 세계의 종말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바울은 세계가 이르게 될 종착지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대단히 많이 이야기합니다. 종말의 희망, 기쁨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꿰뚫고 들어와 이에 스며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저는 바울이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돌아오리라는, 희망 어린 미래에 관한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피울 삶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가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종말은 세계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현존이 마지막 때 하나가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세계가 완전히 꽃 피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3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필립 3:11-14)

어떤 면에서 온전함을 갈망할 때 이미 온전함은 이미 싹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미래를 열망하지만, 이는 그가 이를 지금 이미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구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유와 기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바울의 전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망을 담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도래가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관계 맺을 때 그리고 예수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관계 맺을 때 그 미래는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 삶 속에서 당신을 살아내시며 이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 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향해 당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떤 말로도 기술할 수 없고. 어떠한 모습으로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분, 그분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과 깊이"(로마 11:13)에 우리가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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