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W. 서던: 중세교회사 ━ 펭귄 교회사 시리즈 2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7. 26.
중세교회사 - R.W. 서던 지음, 이길상 옮김/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서문
제1장 교회와 사회
제2장 시대구분
제3장 기독교 세계의 분열
제4장 교황제
제5장 주교와 대주교
제6장 수도회들
제7장 주변 수도회들과 대립 수도회들
후기
역대 교황들의 명단
11 서구의 중세 교회사는 종교 사상과 사회 관습이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통일된 체계를 이룩했던 역사이다. 아울러 간헐적으로 급속한 변화를 거치면서 현대의 제도들과 생각 습관을 잉태했던 8백 년 세월의 유럽 사회사이기도 하다. 이 방대한 기간의 역사를 책 한 권에 담아내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며, 따라서 몇 가지 분야로 미리 한계를 정해놓고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목적은 중세 교회의 종교 조직들과 사회 환경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실 중세교회사라고 하면 중세 교회의 가장 중요한 발자취인 영적·지적 활동에 가장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지만, 지면의 한계를 안고 집필 목적을 견지하느라 그런 내용을 상당 부분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손실이다.
12 역사가가 교회사를 세속사와 떼어놓고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중세 교회의 개혁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중세의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환경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환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던 자유란 당시의 제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당시의 세계에서 해방될 것을 외칠 때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자유를 매우 좁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주장한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여전히 많은 한계들을 갖고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12 중세라는 시대는 종교적 이상들에 어떤 종류가 있고, 그 이상들을 보호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 들이 사회 환경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가를 연구하는 데 각별히 중요하다. 우선 중세에는 종교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이렇게 들어선 조직들은 놀라울 만큼 강한 생존력을 드러냈다. 그 여파가 현대에까지 미쳐서 현대 세계에도 중세의 사회 환경에서 형성된 제도들이 살아남아 있고, 그런 제도들로 인해 중세적인 사회 환경이 여전히 출몰한다.
13 중세가 고대와 현대와 구분되는 특징이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와 사회가 동일했다는 것이다. 중세를 가장 넓게 구분하자면 주후 4세기에서 18세기, 즉 콘스탄티누스부터 볼테르에 이르는 유럽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 시기에 국교에 순응한 정통신자들만 충분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이 이론이 실질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제도는 그 동안 파생한 무수한 예외와 모순 때문에 더 이상 고수해야 할 이론으로 즉 이상으로 존립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예외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시대가 갈수록 예외가 줄어들 것이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예외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게끔 상황이 전개되었다.
61 800년에 거행된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50년 전에 채택한 정책의 실질적인 결과였다. 그것은 서방의 정치적 해방의 상징인 동시에 기독교 세계의 정치적 — 따라서 궁극적으로 종교적 ━ 분열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를 일체의 정치적 충성 의무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집단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종교적 통일이 먼저 정치적 통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통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든 궁극적인 강제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치적 통일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의 재통일을 위한 향후 중세의 모든 계획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재통일을 위한 계획이다.
64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간명한 신앙 진술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니케아 신조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을 망라한 온 교회가 채택한 이 신조에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문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아마 7세기에 스페인에서 서방의 어떤 알려지지 않은 개인 혹은 공동체가 그 문구에다 필리오케(Filioque, '[성부]와 아들에게서')라는 단어를 비공식적으로 덧붙였다. 이 문구는 만약 샤를마뉴의 고문들이 스페인에서 와 있지 않았더라면 순전히 지역적 특성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영향 하에 샤를마뉴 예배당의 미사 때 쓰이는 니케아 신조 본문에 문제의 그 단어가 덧붙었다. 이 순간부터 그 단어가 덧붙은 사실은 지역적 특성을 훨씬 넘어서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102 서방 제국을 교황권의 확장으로 보는 견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는 교황이 황제를 세울 때 대리자를 세우지 않고 경쟁자나 심지어 지배자를 세웠기 때문이다. 대관식 행위에 함축된 이론적 수장권은 실질적인 복종으로 전환될 수가 없었다. 교황이 황제에 대해 갖는 실질적인 수장권은 대관식이 끝나는 순간에 함께 끝났다. 따라서 중세 말기 교황들이 제국 이외의 다른 통로들을 통해서 자기들의 최고 세속 주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행위가 중세 교황들이 이론을 실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할 때 범한 가장 큰 실수이다.
147 1389년에 우르바누스 6세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오십 년이 안 된다는 합리적인 근거로 그 간격을 오십 년에서 삼십삼 년으로 줄였고, 1470년에 파울루스 2세는 인간 목숨의 취약성을 좀더 깊이 감안하여 그 간격을 이십오 년으로 줄였다. 따라서 누구든 로마에 갈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연옥에서 받을 형벌을 완전히 면제받을 수 있었다.
182 한번 주교가 되면 심지어 교황조차도 폐위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세속 정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가 주교가 된 사람들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이 무성해도, 그들은 먼 거리와 더딘 통신 수단에 의해서 교황권의 근원과 분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현안들에 대해 주교들은 자신들의 최선의 판단대로 행동해야 했으며,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행동했음을 뜻했다.
182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교구는 가장 오래된 제도였다. 주교구는 대체로 가장 오래된 수도원들보다 더 오래되었고, 여느 세속 왕가와 왕국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주교구는 주교에게 위엄 있는 사회적 지위를 주었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문서들로 보증되고 교회의 성인들에 의해 보살핌을 받는 유서 깊은 권리들과 의무들의 유산도 주었다. 이 유산의 수호자로서, 주교들은 사회의 덧없는 유행이나 입법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지역 관습의 무게가 그들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227 1050년 이후 두 세기 동안 주교 정부의 전 분야를 되돌아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교황의 통제에 갈수록 굴복해갔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중요한 분쟁이 모두 교황청으로 몰리게 한 교회법의 발전의 결과로 도처에서 발생했다.
228 교황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주교들과 주교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고 딛고 섰다. 교황청과의 관계에서 기반을 상실하긴 했지만, 다른 분야들에서는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주교들은 사유지를 소유했다. 이들은 하급 성직자들에 대한 사법권, 교회 재산, 유산, 부채, 고리대금, 그리고 온갖 형태의 윤리적·교리적 범죄에 대해 갈수록 더 큰 권한을 행사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교황의 입법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유럽 사회가 그만큼 확대된 데 따른 결과였다. 그들의 행정 활동은 거의 모든 행정 형태가 증가했기 때문에 증가했다.
228 대주교들과 주교들은 어쨌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성직자 계층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속 정부에서 경력을 쌓고서 성직에 입문한 탁월한 역량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이 성직에 입문하기 전에 쌓았던 경험과 권위가 교회적이라기보다 대체로는 세속적이었다는 점이 약점이기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그런 과거 경력에 힘입어 그들은 주교로서의 권위를 더욱 단호하게 지켰다. 세속 사회에서 성직자들의 권력에 대립해본 경력이 있는 주교들만큼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강렬한 투쟁을 벌인 사람들도 없었다. 이것이 중세 사회가 끝날 때까지 그 사회의 필수적인 특징들의 하나로 남았다.
230 1100년경 이전에 수도회들의 이상이 안정성을 띠었던 원인을 중세 초기의 사회가 상대적으로 정적이었던 점에서 찾고 그 이후 시대에 종교 조직이 급속히 다양해진 원인을 서구 사회가 확대되고 갈수록 복잡해졌던 점에서 찾는 것이 대체로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회적·종교적 변화가 맞물려 진행된 것이 수도회의 역사에서만큼 극명하게 나타난 분야도 없다.
232 중세 말에 이르러 베네딕투스회의 이상이 아무리 과거의 것이 되고 심지어 소멸된거나 다름없었을지라도 그것은 다른 어느 수도회의 이상보다 더 유서 깊고, 더 권위 있고, 더 안정된 종교 생활의 표준을 계속해서 제공해 주었다.
243 귀족은 그렇게 고지된 금액을 지불하거나, 자기 대신 고행을 받을 사람을 내세울 수 있었다. 중세 초기의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고행을 부과받으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이 부과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개인적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초자연적 부채를 지불하는 문제였다. 고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거나, 다 채울 방도를 마련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연옥 교리가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이 시기에 유행했던 문학에는 고행을 다 채우지 못한 사람이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다.
244 더 나아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대 가문의 경제를 위해서도 구성원들을 수도원에 보내는 것이 필요했다. 중세의 어떤 시기에도, 적어도 중세 초기의 어떤 시기에도 귀족 가문의 모든 자녀들에게 세속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고루 제공할 만큼 사회의 자원히 급속히 확장된 적이 없었다. 가문의 재산을 분할하는 일에는 아주 엄격한 규율이 있었고, 충분한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안전하고 유리한 직위를 제공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가문의 소녀들에게는 그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소년들은 적극적인 군사 활동으로 죽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소녀들은 그런 모험에 노출되 진 않았다. 모든 소녀들을 두루 만족시킬 만한 혼처가 많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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