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밀러 : 정치철학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5

 

정치철학 - 10점
데이비드 밀러 지음, 이신철 옮김/교유서가

 

머리말

제1장. 정치철학은 왜 필요한가
제2장. 정치권력
제3장. 민주주의
제4장. 자유와 정부의 한계
제5장. 정의
제6장.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
제7장. 국민, 국가, 그리고 전 지구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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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치철학은 왜 필요한가

010 이 책은 큰 주제에 관한 작은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나의 그림은 천 마디 말의 가치를 지닌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을 정치철학이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큰 그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문제의 그림은 암브로조 로렌체티 (Ambrogio Lorenzetti)가 1337년에서 1339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시에나의 팔라초 푸블리코(시청사) 안에 있는 살라 데이 노베(아홉의 방)의 세 벽면을 채우고 있다. 그 그림은 흔히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라고 불린다.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는 무엇보다도 우선 통치자가 가져야만하는 자질과 가져서는 안 되는 자질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통해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본성을 각각 묘사하고, 다음으로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해 두 종류의 정부가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그래서 좋은 정부의 경우에 우리는 용기, 정의, 너그러움, 평화 사려, 절제와 같은 덕목을 나타내는 인물들에 둘러싸인 채 호화로운 예복차림으로 왕좌에 앉아있는 고귀한 통치자를 보게 된다. 그 밑에는 한 줄로 늘어선 시민들 사이로 기다란 끈이 이어지는데, 그 끝이 통치자의 손목에 묶여 있다. 그것은 통치자와 인민의 조화로운 결합을 상징한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먼저 도시에서, 다음으로 시골에서 좋은 정부가 미치는 효과에 대한 로렌체티의 묘사를 볼 수 있다. 도시는 질서정연하고 부유하다. 장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 팔며, 귀족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 곳에서는 한 무리의 춤추는 사람들이 손을 잡은 채 원을 그리고 있다. 성문 너머에서는 잘 차려입은 한 여인이 사냥하러 나가고, 길가에서는 포동포동한 새들백 돼지를 시장으로 몰고 간다.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땅을 갈고 추수한다. 주의 깊지 못한 관람객이 이 프레스코화의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상정해서, 안전을 나타내는 날개 달린 인물이 높이 내걸고 있는 깃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이 공동체가 여전히 이 주권자를 유지하는 한,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며, 각자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녀가 악한 자로부터 모든 힘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나쁜 정부를 나타내는 반대쪽의 프레스코화는 보존상태가 그만 못하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악마 같은 통치자가 탐욕, 잔인, 오만과 같은 악덕들로 둘러싸인 채, 도시는 군대에 점령당해 있고 불모의 들판은 유령처럼 그려진 군대에 의해 황폐해져 있다. 여기에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인물이 다음과 같은 말이 적힌 것을 들고 있다.

각자가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 정의는 폭정에 억눌려 있다. 그런 까닭에 이 길로는 누구도 자신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지나가지 못한다. 성문 바깥과 안쪽에 강도들이 들끓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이란 무엇이고 왜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는 데 로렌체티의 이 장엄한 벽화를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는 정치철학을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본성, 원인 및 그 효과에 관한 탐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로렌체티의 그림은 이 탐구를 간명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 주제의 핵심에 놓인 세 가지 관념을 인상적인 시각적 형상으로 표현한다. 첫째 관념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가 인간의 삶의 질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로렌체티는 우리에게 정의나 그 밖의 덕목의 통치 덕분에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거래하고 사냥하고 춤추는지, 즉 일반적으로 인간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행하는지 보여준다. 반면에 그림의 다른 쪽에서는 폭정이 빈곤과 죽음을 낳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이 첫째 관념이다. 우리가 잘 지배되는지 나쁘게 지배되는지에 따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에 등을 돌릴 수 없으며, 사적인 삶으로 물러설 수 없고, 우리가 지배받는 방식이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둘째 관념은 우리의 정부 형태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이런 벽화가 그려졌겠는가? 이 그림은 살라 데이 노베, 즉 아홉의 방에 그려져 있으며, 이 아홉은 14세기 전반기에 이 도시를 지배하던 아홉 명의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순환제 평의회를 가리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의회 구성원들에게 시에나의 인민들에 대한 책임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가 상당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에 그 곳에 세워진 공화주의 형태의 정부를 찬미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사악한 정부를 묘사한다는 것은 한낱 탁상공론적인 영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통치자가 인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거나 인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감시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셋째 관념은 무엇이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구별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한 형태의 정부가 가져오는 효과들을 추적할 수 있으며, 가장 좋은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성이 필요한지 배울 수 있다. 다시말하면 정치적 지식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는 이러한 관념에 수반되는 모든 표지를 담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덕 있는 통치자는 그 시대의 정치철학에 따라 좋은 정부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겨진 자질을 나타내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프레스코화는 교훈적이고자 한다. 그것은 통치자와 시민들 모두에게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삶을 어떻게 성취할지 가르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로렌체티가 확실히 믿었듯이,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성취가 가능한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프레스코화의 이러한 메시지를 믿어야 하는가? 이 그림이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주장들은 실제로 참인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정부를 가지는지가 정말로 우리의 삶에 차이를 초래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아니면 정부 형태라는 것은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정부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 밖의 더 작은 물음들과 더불어 정치철학자들이 제기하는 큰물음들 가운데 몇 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려 하기 전에 우선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정부(government)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하려는 것은 '현 정부', 즉 특정한 시점의 사회 속에서 권력을 지니는 사람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국가, 즉 그것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내각, 의회, 법원, 경찰, 군대 등과 같은 정치 제도보다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규칙과 관행 및 제도들 전체다. 누가 무엇을 누구와 함께 행할 수 있는지, 누가 물질적 세계의 어떤 부분을 소유할지,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등등을 알기 위해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여기서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아직은 당연시할 수 없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듯이, 정치철학의 핵심적 쟁점 가운데 하나는 왜 우리에게는 애초에 국가가, 좀더 일반적으로는 정치권력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회가 정치권력 없이도 완벽하게 스스로를 잘 다스려나갈 수 있다는 아나키스트의 논증을 다룰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정부'가 과연 국가를, 혹은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정부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 여부는 일단 열린 물음으로 남겨놓고자 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계속해서 열려 있을 또 하나의 물음이 있는데, 그것은 단 하나의 정부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수의 정부가 있어야 하는지, 즉 인류 전체를 위한 단일한 체제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인민들을 위한 서로 다른 체제들이 있어야 하는지 하는 물음이다.


벽화를 그릴 때 로렌체티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주로 두 부류의 통치자가 지닌 인간적 자질이라는 면과 그 자질이 그들의 신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면에서 제시했다. 메시지가 전해진 매체를 고려할 때 이러한 방식은 아마도 불가피했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대체로 그 시대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었다. 좋은 정부라는 것은 스스로의 체제 만큼이나 지배하는 자들의 자질 ― 그들의 사려, 용기, 관용 등등 ━ 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체제에 관한 논쟁 예를 들어 군주정은 공화정보다 바람직한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관한 논쟁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강조점이 바뀌었다. 우리는 좋은 정부의 제도들에 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만, 그 제도들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자질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는 분명 이 방향으로 너무 멀리 나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대의 논의방식을 따라 다음 장들에서 우리의 통치자들을 덕이 있게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가 아니라 주로 체제로서의 좋은 정부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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