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책 밑줄긋기/책 2023-24
- 2023. 10. 9.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길찾기 |
아버지는 2001년 5월 4일에 자살했다. 그 후로 그분은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됐다. 사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옥에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5년 전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우울증을 앓아본 사람이나 가족들만이 그 병이 마음에 어떤 고통을 주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고대했던 죽음을 맞자, 또 다른 것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망령처럼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앙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마치 고아가 된 것 같은 공허함과 커다란 죄의식이 나를 덮쳤다. 나는 아버지께 더 많은 것을 해드려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아버지를 양로원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더라면··· 다른 정신과 의사를 찾아봤더라면··· 무엇보다도 그토록 비통한 모습으로 자살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받아들였더라면··· 아버지에겐 나밖에 없었다. 그분은 나하고만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몇 년 간은 오직 나만이 고통으로 굳어버린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고, 또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으며, 또한 아버지를 슬픔의 심연 속에서 꺼내려 애쓸 때마다 너무나 힘겨웠기 때문이다. 처음에 의사인 친구에게 아버지의 자살을 도와줄 수 있는 약을 부탁했을 때 거절당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게 나타난 그 고통의 이유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했던 만큼 나는 그분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우리의 피의 동맹을 저버렸다···
아버지가 들아가시고 며칠 뒤, 나는 양로원의 리타 몬트레알 원장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편지 내용은 아버지가 1 일이 아닌 4일에 축었기 때문에 월 시설 이용료인 34유로롤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앙로원을 고소하거나 보상금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의무실에 있던 아버지를 보호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원장에게 앞으로는 안전에 더 주의할 것과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애도를 존중할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34유로는 내지 않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이것으로 매듭지어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행정기관의 비인간적인 관료주의를 망각했다. 2004년, 리오자 앙로원에서는 34유로에 대한 연체금과 그동안 불어난 이자금의 지불을 요구했다. 이 시점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끝나는 3년이 막 지난 후였다. 마치 우연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차라리 채무 불이행으로 감옥에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적 불의의 희생앙이 된 아버지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건은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하고 유해를 뿌리고 난 후에도 그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짓이었다. 아버지가 들아가신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직접적인 요인인 우울증 말고도, 살아오는 동안 계속된 실패와 패배, 그리고 모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쌓였기 때문이다. 내가 양로원을 고소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또 하나의 그것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터였다. 나는 시설 관리자들을 법정에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주제넘은 반항을 응징하기 위해 국세청까지 동원하여 상속세를 조사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은 몇 천 유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결국 내가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물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토록 우울한 몇 달 동안. 나는 한편으론 미디어를 통해 그들과 싸웠다. 기자들을 만났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부당함을 알렸다. 하지만 이 또한 리오자 양로원 윗선에 의해 (확신하건데 세금 조사원도 분명 그들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모두 좌절됐다. 그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리오자 신문사에 접촉했고, 신문사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싣지 않겠노라고 통보해 왔다. 이로써 나 역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권위적이고 오만한 민주주의가 휘두르는 횡포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시민들이 정의를 찾기 위해 권력자들에게 맞섰던 전쟁에서의 패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치른 전쟁은 아버지와 그 세대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인생을 걸고 어마어마한 희생정신으로 싸웠지만. 나는 복잡한 서류들과 과장된 미사여구들이 난무하는 싸움을 했다. 결국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치렀던 전쟁들과 그분의 패배를 이제는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능함을 실감하면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글쓰기는 세상을 항해 고백하고 고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기에.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건에서 글쓰기 작업을 시작했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을 뿐만 아니라(이것뿐이라면 오히려 익숙하다), 어떤 예측도 계획도 없는, 측 밑그림 없이 시작한 작업이었다. 사실 나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이번엔 글의 형식과 구조를 결정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작업에 뛰어들었다. 오로지 글을 써야만 한다는 목적으로만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쓴 노트들을 다시 읽었다. 그것은 일관성 없이 기억에 떠오르는 대로 쓴 메모이다. 이미 수없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새로운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실마리가 보였다. 비록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다 읽은 후에는 이 작업에 대한 의지가 더 굳건해졌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했을까? 쓰려는 모든 내용은 모두 아버지의 글을 읽거나 직접 들은 것이다. 즉 이미 언어화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장르는 그것들을 추리고 배열하여 극적 구성을 부여하는 데 적합한 소설이다. 소설에서라면 아버지의 언어들을 다시 내 방식대로 포장만 하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각별한 관계가 주는 내밀함 덕분에 문체만 간단히 손보면 우리 둘의 목소리를 조화시키기도 쉬웠다. 단지 아버지의 증언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됐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형식은 아버지의 사건들을 순서대로 배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와 아버지의 감정 그리고 회한들을 표현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나의 유일한 재능인 글쓰기로 완벽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
나는 오래전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만화는 문학적으로 저평가되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 장르가 이론서부터 시나리오까지 소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문학적 요소들이 그 특유의 조형성과 결합되는 만화의 특성 상 여타 시청각적인 장르와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화는 극적인 대화에서는 그림과 만나 더욱 생생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 역시 그래픽적인 표현 덕분에 시공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 재현에 있어서도 탁월하다. 만화의 컷에서는 배경. 의상, 오브제, 상황을 충실하게 복원해낼 수 있다··· 거기에 적절한 고증들을 넣는다면 과거의 장소들은 그곳에 삶을 담고 있던 인물들에 의해 활기를 띠고 진정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이야기 속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역사성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인물들 역시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갖게 된다. 그들은 한 컷 한 컷 지날수록 생기를 띠게 되고 결국 고유의 캐릭터로 완성된다. 만화 속 인물들은 소설과는 달리 그의 내적 표현이 전달되기 전에 형태를 먼저 부여받는다. 처음의 그들은 종이 위에 그려진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점차 제스처나 몸짓 같은 본래 형태의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 말로만 표현되는 소설보다도 더 다양하고 암시적으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가시성은 인물의 복잡하고 미묘한 변화들도 쉽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삶이 아버지에게 남긴 혼적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 굽은 등, 주름살, 빛을 잃은 눈동자... 시간과 역사가 한 인간의 육체 위로 지나간 흔적들을 만화의 컷 진행에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
우리 삶을 짓누르던 운명의 흐름이 기적에 가까운 속도로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이 점차 완성돼 감에 따라 다른 세상으로부터 아버지의 너그러운 화해의 손길과도 같은 신호들이 느껴졌고, 그것은 마침내 최고조에 이르게 됐다. 만약 살아계셨더라다면 99살이 되셨을 아버지 생신에 책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34유로의 초회 한정판은 양로원에서 요구했던 금액을 해결하는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이 되자 세계 각국에서 출판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백년이 지난후에 말이다···
내 운명이 어떻게 급격하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더 많은 일화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실제적이고 뚜렷한 변화에 대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작품에 주목하는 세상의 반응과 이 작품으로 형성된 새로운 유대 의식이다. 조밀하게 엮인 그물과도 같은 그 유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향수와 분노라는 공통된 감정이 우리틀 연결했다. 우리란, 그 위대한 사상을 따라 행동한 소수의 생존해 있는 사람들과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세대의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도 있다. 자살한 부모의 자식들, 끔찍한 시골의 삶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 동업자에게 사기당한 사람들, 뒤늦게 이혼한 사람들, 양로원에 버림받은 사람들...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 유대 속에서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가장 연약한 얼굴을 보였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혹은 애인, 친구,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오랫동안 속죄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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