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크랙, 알렉 비들러: 근현대교회사 ━ 펭귄 교회사 시리즈 4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0. 16.
근현대교회사 - 제럴드 크랙 & 알렉 비들러 지음, 송인설 옮김/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근대교회사
1. 서론 : 새로운 시대
2.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교회의 삶
3.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상
4. 영국의 왕정 복고와 혁명
5. 영국 사상의 전환점
6. 스코틀랜드의 서약자와 온건파
7. 독일 : 정통주의, 경건주의, 합리주의
8. 러시아와 동방 교회들
9. 영국의 하노버 왕조 시대
10. 감리교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
11. 영국 : 이성의 종교의 발흥과 몰락
12. 신세계의 기독교
13. 프랑스의 교회
14. 계몽 군주 시대의 교회와 국가
15. 합리주의의 절정기와 그 이후
16. 바로크 시대의 기독교와 문화
17. 에필로그
현대교회사
서문
1. 갈리아 교회 : 혁명과 나폴레옹
2. 독일의 신학적 재건
3. 영국의 기독교
4. 영국 성공회의 부흥
5. 스코틀랜드의 갈등
6. 프랑스의 자유주의 가톨릭과 교황지상주의
7. 콜리지와 모리스
8. 기독교 사회 운동
9. 슈트라우스에서 리츨까지
10. 영국의 과학과 기독교 신앙
11. 성경과 광교회
12. 영국의 자유 교회
13. 교황 피우스 9세
14. 전례주의와 공동기도서의 개정
15. 스코틀랜드 정통의 위기
16. 가톨릭 근대주의
17. 영국 신학의 썰물과 밀물
18. 키에르케고르
19. 위기의 신학
20. 동방 정교회
21. 미국의 기독교
22. 선교 운동
23. 에큐메니컬 운동
24. 흥분의 10년
25. 에필로그
근대교회사
서론: 새로운 시대
9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전쟁의 시대와 분쟁의 세기를 그치게 했다. 이것은 30년 전쟁의 끝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종교 전쟁의 끝이었다. 다음 150년 동안 유럽의 평화는 종종 깨어졌다.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으나 종교는 거의 전쟁의 구실을 제공하지 않았다. 영국 왕실에 가톨릭 왕조를 세우려던 루이 14세의 노력의 실패는 때늦은 종교 갈등의 시대의 추가 기록 같은 것이었다. 양 국가는 칼에 의한 선전 활동을 그만두었고, 이에 따라 교리적 논쟁은 국기들 사이가 아니라 국가 안에서 해결되었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는 국제 문제에서 중요한 자극제가 되지 못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가톨릭에 대한 조항에 반대하였고, "주 하나님의 열심으로"('Zelo Domus Dei) 라는 서신으로 항의 내용을 보냈다. 그는 가톨릭에 대한 조항들이 "무효이고 저주받은 것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아무 영향도 결과도 끼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학적 기교는 구사하기는 쉬워도 존중받기는 힘들었다. 유럽은 교황의 흥분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제 정치적 문제는 교회 행정가와 신학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지 않고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교황의 영향력은 아주 약화되어 그는 더 이상 서유럽의 정치 문제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교황은 독일에서 외국의 유력자로 취급받았다. 종교재판소는 교황이 스페인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배제시켰다. 마자랭은 프랑스에서 조심스럽게 교황과 거리를 두었다. 교황의 권력은 쇠락하였다. 교황의 성무금지령은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제도적 종교의 평판이 쇠락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믿음의 문제에서 각 나라 안에서 세속 군주의 힘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종교적 제재가 그 권위를 잃게 되면서, 이에 따라 각 나라의 법이 명성을 얻었다. 휴고 그로티우스에 의해 시작된 작업은 사무엘 푸펜도르프에 의해 계속되고 확대되었다. 주권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으나, 새 시대가 호소한 원리는 이전 시대의 원리들보다 더 세속적인 것이었다.
종교적 차이는 더 이상 국기들 사이의 분쟁을 정당화시키지 않았다. 종교의 차이는 한때 동료 시민 전체를 분리시키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즉각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헝가리는 관대한 규칙을 폐지하였고 비국교도에 대한 처벌 조치로 다시 바꾸었다. 루이 14세는 위그노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 칙령을 철회하였고, 프랑스에서 종교의 통일을 이루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인들이 팔츠를 점령하였을 때, 그들은 칼빈주의자들을 아주 무자비하게 굴복시켰다. 그래서 이웃 개신교 군주들은 루이가 멈추지 않으면 자기 영토의 가톨릭 주민에 대해 보복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그의 영토에서 15,000명의 개신교인들을 추방하였다. 스위스에서 종교 분쟁은 아라우 평화 협정(1712) 때까지 계속되었다.
폭력이 진정된 후에도 오랫동안 반목이 계속되었으나, 문제의 본질이 변화되었다. 종교적 경쟁자들은 두 집단 사이의 정치적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복잡한 과제에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강력한 박해가 실패한 후 수정된 관용 정책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누구를 억압할 때 그 동기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일 때가 더 많았다. 많은 나라에서 이단은 여전히 처벌할 수 있는 범죄였으나, 18 세기가 시작할 때 잘못된 믿음은 형사 처벌되기보다는 무시되는 쪽이 많았다. 관용은 불안정하게 보였다. 그러나 박해의 정신은 때때로 강력하게 고취되었을지라도 효과가 없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적 적대감은 점증하는 계급의 분열의 의식으로 전이되었다. 가끔 사회적 구분은 교파적 분열과 일치하였다. 영국에서 지방의 대지주와 교구 목사의 연합은 강화되었고 국교에 대한 비일치 선언은 대개 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 사회의 분열은 종종 교회의 삶에 반영되었다. 프랑스 교회의 상급 성직자들은 이해 관계와 관심사에 의해 하급 성직자들보다는 상류 계급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반면에 시골의 성직자들은 점차 보통 사람들의 열망에 민감하고 동정적으로 변해 갔다.
이 시대는 안정을 몰랐다. 1648년 이전 몇십 년의 혼란은 평화에 대한 열망을 강화시켰다.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야심이 세력의 균형을 깨뜨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안정을 무너뜨릴 위협으로 위험하게 생각하였다. 우리의 시대의 두번째 부분(1715-89)에서, 안정을 향한 추구는 일관성 있게 또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영국에서 월폴과 프랑스의 뒤부아와 플뢰리의 정책은 유럽에 가장 긴 평화의 기간 중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주류적 태도는 교회와 교회의 임무를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그 시대의 일반적 정서는 계몽된 관점과 전통적 권위에 의해 강화된, 보다 안락하고 번영된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하였다. 기존 질서를 위해 교회의 자원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정된 시대에 종교적 기관들은 대개 보수적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기꺼이 전통적 방식의 후견인이 된다.
18세기에 그들은 사회의 구조 안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안정성은 귀족이나 농부들에게 필요한 만큼 교회에도 필요했다. 교회의 수입은 십일조 같은 반(半) 봉건적 세금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 견해가 전제하고 있는 공동체의 삶의 이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궁핍한 사람들을 다루는 적절한 방법은 그들을 공동의 삶 안에 재 통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 이론은 점차 적용하기 힘들게 되었다. 교회는 여전히 사회적 복지의 주요한 기관이었을지라도, 그 요구를 더 이상 다 충족시킬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교육과 건강의 분야에서 교회의 사역은 점점 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교회는 자본가 농업의 혼란이 농부들에게 덮쳤을 때 모든 곳에서 농부들의 근본적 궁핍을 고칠 수 없었다.
이 시대가 부딪친 주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권위의 문제였고, 그것은 도처에서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일제히 교회에 비우호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영국의 하노버 왕가의 에라스투스주의는 모양새를 갖추어 교회를 종속시켰다. 그밖의 다른 곳에서 교회의 독립은 보다 더 공개적으로 제한되었다. 통치자들은 교회의 일에 간섭하였고 교회의 부를 빼앗았고, 교회의 삶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 로마와의 끈은 고의적으로 느슨하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만 교황청에 의존하였을 뿐 민족 교회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몇몇 전제 국가에서, 교회는 국가의 한 부서의 지위로 축소되었다.
교회의 권위는 많은 영역에서 도전받았으나, 어느 영역도 지성적 분야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심리학, 즉 인간의 지성을 흰 종이로 설명하고 그 위에 경험이 지식을 새겨 나간다는 심리학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인 견해를 공격하였다. 도덕적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대체하는 적절한 수단이라는 은폐된 주장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간접적 공격이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원했다. 볼테르와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계몽주의는 그들을 "하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자유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으나, 최소한 자신의 종교를 적절하게 취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처음에 권위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은 드물었다.
볼테르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교회나 정부에 대해 드러내 놓고 숙고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퀘이커의 교회와 정부에 대한 저항에 대한 그의 찬양은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전통적 권위는 또한 피에르 벨 같은 사람들의 완곡한 비판에 의해서도 약화되었다. 뉴턴 물리학에 대한 과장된 존경도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곧 보다 대담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권위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런 접근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격들은 보다 더 공공연해지고 신랄해졌다. 계몽주의 사고의 지도자들은 이제 드러내 놓고 교회와 교회의 신앙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리고 합리주의의 교만이 결국 반동을 불러일으켰을 때, 그 대안은 반드시 기독교에 더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루소가 아무것도 새로 만들어 내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고 말하였다. 계몽주의의 주창자들은 안정성을 옹호함으로써 시작하였으나, 마지막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전령이 되었다.
이 시대의 매력은 주로 지적 발전에 있었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우리는 근대 세계의 문턱에 위치하게 된다. 사람들의 지성을 사로잡은 문제들과 이 문제들이 논의된 정신은 우리를 여전히 압도적으로 중세적인 분위기로부터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분위기로 이전시킨다. 과학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18세기 말까지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든 곳에서 뉴턴의 자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인간의 지성의 작용은 로크에 의해 만족스럽고 흥미롭게 보이는 방식으로 탐구되었다.
로크는 하나님이 지혜와 권위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것을 믿었고, 기독교의 도덕이 최고로 지혜롭고 합리적인 행위의 법전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성이 우리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법칙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또 사려 깊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믿음의 유형을 서서히 드러나게 한다는 그의 확신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로크는 계시의 필요나 가치에 대해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시에 부여한 상대적 위치는 계시가 다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로크의 계승자들은 그의 사고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이성의 역할은 확대되었고, 계시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성경은 강력하고 때로는 비동정적인 심문을 받아야 했다. 기적은 도전을 받았다. 예언은 재평가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사고는 기독교의 독특성과 권위를 모두 박탈하려고 하는 위협에 부딪쳤다. 이 시대는 바로 이러한 투쟁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새로운 사고는 처음에는 기독교 신앙을 향해 우호적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으로부터 인간이 발견한 것으로 균형이 이동하였다. 마침내 이성의 충분성이 확신있게 주장되었고, 성서 신학의 모든 내용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의 위치로 전락하였다. 영국에서 이러한 이성의 도전은 활력있고 단호하게 대처되었다. 일련의 유능한 저술가들이 교회는 여전히 그 비관자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버클리와 버틀러의 작품은 영국 사상사에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했다. 어쨌든 이성의 도전은 자기 파괴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흄은 극단적 합리주의가 완전한 회의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철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발견해야 했다. 이러한 동안 웨슬리는 종교는 단순히 지적 가설이라는 경솔한 전제를 무너뜨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인간의 삶을 변혁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대륙에서는 그 유형이 약간 달랐다. 영국의 사고, 특히 뉴턴의 물리학과 로크의 심리학은 이 시대의 지적 배경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의 세계평화주의는 국제적으로 기본적 신념으로 나타났다. 많은 확신들이 영국의 이신론자들로부터 나왔다. 전형적 세계 평회주의자는 볼테르였다. 그는 원래의 영국에서는 크게 신뢰를 얻지 못한 이성에 대한 견해를 대중화시켰다. 이성에 대한 신앙은 18세기 사고의 전형이 되었으나, 바로 그 확신이 반동을 일으켰다. 루소와 낭만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들의 무미건조한 지성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강조는 옛 것만큼이나 신앙에 대해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대륙에서 불신앙에 대한 대답은 영국에서보다 더 자신이 없었다. 프랑스 변증가들은 설득력이 없었고,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그들의 태도에 의해 그들이 주로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로 알려진 복음주의적 운동은 무미건조한 합리주의와 황량한 유형의 스콜라 정통주의가 인간의 탐구하는 정신에 개방적인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분명히 경건주의는 열정과 지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 둘을 결합하는 데 실패하였고, 따라서 다음 세기에 씨름해야 할 근본적 문제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에서 독일은 유일하게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대를 요약하고 동시에 다가올 시대를 예기할 자격이 있는 사상가를 내었다.
이성과 권위는 하나의 긴장을 나타내고, "정열"과 "형식주의"는 또 다른 긴장을 나타낸다. 이 시대는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 혼란을 일으킨 열정에 반대하는 반동 속에서 시작되었다. 문명화된 인간은 조용하고 합리적으로 그의 믿음을 붙들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다음과 같은 교황의 유명한 구절은 이 시대의 기본적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신앙의 형태를 위해서는 은혜 없는 열심당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라." '정열'은 광신과 같이 취급되었고, 모든 곳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열정은 항상 모든 곳에서 억제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성의 시대의 세련된 표면 아래에 아직도 열정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련의 운동들을 보게 된다. 프랑스의 얀센주의자들은 고위직에서 지배적인 예수회 신학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정적주의는 과도하게 지적으로 신적인 것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신비주의적 저항이었다. 영국에서 근엄한 고전주의적인 영국 성공회는 처음에 후기 청교도의 쇠퇴해 가는 열심에 부딪쳤고, 그 다음 초기 감리교의 신선한 열정과 충돌하였다. 독일에서 경건주의의 정신은 루터교 정통주의의 경직성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시대를 단조롭고 지루한 기독교 시대로 취급하는 것은 명확히 잘못된 평가이다. 이 시대의 분명한 결점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개혁이 긴급하게 필요하였으나, 개혁하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하였다. 변화를 추진할 힘이 부족하였다. 영국 성공회는 그 조직의 약점 때문에 선교를 수행할 수 없었다. 왕정 복고의 시대에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거칠게 파괴해 버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고, 심지어 변화에 대해 이야기만 해도 반역처럼 생각되었다. 하노버 시대가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기존 체계를 변화시킬 필요를 일깨웠을 때, 정치가들은 어떤 종류의 변화도 추진하기를 거부하였다. 교회의 삶은 정치 구조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체제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체제 안에서 체제의 결점들은 편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곤경에 대해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대혁명이 유럽을 붕괴시켰을 때, 개혁이란 말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급한 정치적 재정적 변화는 이해 관계와 무기력에 의해 차단되었다. 국가가 국가 자신을 구할 수 없을 때, 붕괴하는 체제와 연결된 교회가 변화의 요구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직 독재자가 계몽된 절대주의는 개혁을 전제한다고 생각했을 때만 교회의 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요셉 2세가 오스트리아에서 추진한 계획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의 예였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변화가 왜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는지 잘 설명해 준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부터 프랑스 대혁명까지의 기간은 영웅의 시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천재적 자질을 인정받을 수 있는 많은 인물들을 갖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근대 기독교의 많은 중요한 운동들이 발생했고, 근대의 특징적인 많은 문제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본래의 형태로 나타났다. 바로 여기에 지금까지 일어났던 많은 일들, 지금도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문제들에 대한 열쇠가 있다.
현대교회사
서문
291 본서에서 다루어지는 역사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Age of Revolution) 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이 시대는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은 혁명으로 묘사되는 대부분의 사건보다 훨씬 더 획기적인 일이었고, 그것 자체가 몇 가지 후속적 혁명들을 일으켰다. 거의 같은 시기에, 철학 분야에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도 프랑스 혁명 못지 않게 사상계에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다. 또한 19세기에 자연 과학과 기계 과학, 사회학, 역사학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의 연구는 특히 성경 안의 역사 연구에도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당연한 말이지만, 20 세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혁명적인 변화들은 계속되었다.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과 문명의 모든 국면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되었고 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광의의 의미에서, 20 세기도 역시 혁명의 시대였다.
교회는 모든 기독교 제도들의 복합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교회는 거의 혁명에 이르는 내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비록 교회가 대부분 그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이 있고 또 모든 “지나간 시대의 예찬자"를 규합하는 주요한 근거로 생각될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교회의 모든 현장을 망라하거나 이에 대한 정확한 백과사전적 설명을 나열할 수 없다. 나의 작업은 사건들의 과정과 사상의 국면과 주장과 논쟁과 도처에서 출현한 운동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아마도 그 시기에 교회에 대해서 혹은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 공정하고 묘사적인 인상을 주는 데 기여할 것이다. 나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다른 저자가 사료들을 선택한다면, 그는 동일하게 계몽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필경 다른 방식을 취할 것이다. 나는 나의 실수로 생략된 것 때문에 가해지는 어떤 비판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교구와 회중들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또 이것이 없으면 교회의 역사를 언급할 가치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에 대하여 좀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역사가들은 그의 네트웍을 통해 일정하지 않고 반복되지 않고 좀더 공적 검열에 개방되어 있는 것을 잡으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일상적 삶은 주요 머리 기사가 되지도 못하고, 역사가들의 손에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나는 이러한 한계 안에서 본서에서 고려할 주제들을 신중하게 제한적으로 선택하였다. 본서는 유럽의 교회사를 저술한 책이다. 특히 영국에 시선을 많이 두고 동방 정교회와 미국 기독교를 약간 개관하면서, 유럽의 교회사를 다루었다. 다른 대륙의 선교적 확장과 "신생 교회"(Younger Churches)의 출현은 다루지 않았고 다만 "오래된 교회"(Older Churches)의 역사의 일부를 형성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신생 교회들은 너무 다양하고 흥미로워서 별도의 다른 책이나 시리즈로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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