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알버츠 :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10. 23.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 칼 알버츠 지음, 이강서 옮김/아카넷 |
옮긴이의 말
들어가는 말
제1장 아폴론 / 제2장 이데아 / 제3장 헨
제4장 아나바시스 / 제5장 에로스 / 제6장 타우마제인
제7장 아타나시아 / 제8장 미스테리온 / 제9장 디오니소스
맺는 말
인명 색인
옮긴이의 말
7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는 플라톤 철학을 9개의 열쇠 개념을 통해 추적한다. 이 9 개의 열쇠 개념은 Apollon, idea, to hen, anabasis, eros, thaumazein, athanasia, mysterion, Dionysos이다. 고찰의 첫 개념이 아폴론이요 마지막 개념이 디오니소스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알버트는 니체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개념 쌍을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 적용한다. 또 '이데아'에 이어서 곧바로 '일자'를 검토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9개의 고찰 앞에는 '앞에 놓이는 말'(Prolog, 들어가는 말)이, 9 개의고찰 뒤에는 '뒤에 놓이는 말'(Epilog, 맺는 말)이 붙어서 이 책은 모두 11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버트가 보기에 플라톤 철학은 헬라스 종교의 연장, 곧 신과의 유대를 복구하는 일의 연장으로 드러난다. 플라톤 철학의 이런 종교적 특징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학문적 성격에 가려 있었다. 알버트는 이 책의 맺는 말에서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을 크게 세가지로 구별한다. 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고 스콜라철학과 칸트로 이어지는 학문적 형이상학이다. 또 하나는 플라톤으로 대표되며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고 데카르트와 현대의 루이 라벨에게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종교적 형이상학이다. 세 번째 것은 헤겔로 대표되며 현대에는 뢰비트에게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형이상학이다. 알버트는 플라톤이 대표하는 종교적 방향의 형이상학의 특징이 무엇이며 이 형이상학이 철학사에서 어떻게 계승되어왔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1880년대에 니체는 "모든 철학의 목적은 신비적 직관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알버트가 이해하는 플라톤 철학의 성격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고 할 것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대표적인 중기 대화편들인 『파이돈』, 『심포시온』 그리고 『국가』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계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종교적 계기는 '이데아 이론'과 '일자 이론', 대화편들과 문자로 정착되지 않은 구두의 가르침, exoterika 와 esoterika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와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이 둘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성 그리고 연관성을 밝히는 일은 어렵지만 매력적인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이의 중층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자면 먼저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사이의 관계를 깊이 있게 고찰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어가는 말
27 신화가 신들과 영웅들이 존재를 부여하는 행동들을 보고할 때, 신화는 이 행위들의 반복에도 신적이고 성스럽다는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반복들은 아르카이아 시기(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아르카이아 시기', '고전 시기', '헬레니즘시기'로 구분된다)의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의 원시민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듯) 본래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신들과 조상들이 행한 모든 것, 곧 신화들이 그들의 창조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성스러운 영역에 속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에 관여한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신화적인 원형, 따라서 성스러운 원형과 관계가 맺어짐으로써 비로소 그 현상이나 사건은 아르카이아 사유에서 한편으로는 재의적인 것의 성격을 (원래 의미 있는 모든 행위는 제의적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실재성의 성격, 존재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신화적이요 성스러운 것과 존재론적인 것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아르카이아의 종교성은 기본적인 존재 갈증에 의해 지탱되고, 그에 상응해서 존재론 같은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성스러운 것은 본래적이요 심층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것만이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영향력 있게 행위하며, 사물들에 지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상황이나 행위가 신화와 연관을 맺음으로써 실재성을 획득하게 될 뿐만 아니라 비로소 이해된다. 그 상황이나 행위가 신화적인 모범과 연관될 수 있다면 말이다. 스넬은 핀다로스의 『에피니키아』에 담긴 선화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우리는 핀다로스의 승리의 노래들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화들은 경합(agon)의 장소나 종류를 표적으로 삼든지 아니면 승자의 조상이나 고향을 표적으로 삼는다. 또 신화들은 지금·여기의 반대 상을 묘사하는데, 이 반대 상을 통해서 현재적인 것이 밝혀진다. 그런데 어떤 본(本), 그러니까 윤리적 파라데이그마타(paradeigmata)가 일으켜 세워지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핀다로스는 칭송의 대상이 되는 특별한 상황을 신화적이고 지나간 것, 보다 고차적인 것, 타당한 것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상황이 포착되고 파악되는 방식으로도 그렇게 한다."
31 이처럼 신화에서 철학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데, 특히 무엇보다도 존재 전체의 근원에 대한 물음의 영역에서 그러하고, 일상적 인식에 주어진 것의 배후에 놓이는 보다 고차적인 실재에 초점을 맞출 때 그러하다. 그런데 신화는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대로 제의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제의도 철학으로 이행하며,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에서 제의의 정신적 내용이 계속 살아남는다는 점은 거의 항상 간과되었다. 다시 말해서 해석가들은 대부분 신화적 사고에서 학문적 사고로의 발전, '미토스로부터 로고스로'의 발전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에는 결코 학문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계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계기는 철학적 사고의 제의와 연관된 배경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제의의 본질은 우리가 제의를 '모든 신화들 중의 신화'라고 할 '신과 인간의 결별에 대한 신화'와 연관시킬 때 가장 잘 파악된다. 모든 제의의 토대가 되는 이 신화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은 처음에 공동생활을 했다. "불사의 존재인 신들과 죽어야 하는 존재인 인간들에게는 식사도 공동의 것이었고, 자리도 공동의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분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대부분 인간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 분리는 선들이 인간들에게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인간들이 신들에 의해 추방되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인간의 현재 처지가 설명된다. 그런데 제의에서 신과 인간의 원래의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다. 제의 안에서 "인간이 선적인 상태로 승화되어 신의 동료가 된다."
제의의 형태는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양하며 흔히 서로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어떤 경우에라도 똑같다. 즉 제의의 의미는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제물을 바치는 인간과 신의 공동 식사인 것이다. 물론 신은 일반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 공동 식사에 참여한다고 생각되었다.
34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적 표현 방식이 철학의 영역으로 전이한다"는 점이다. 샤데발트는 파르메니데스가 서곡에서 묘사하는 것을 파울루스의 체험(「고린도후서」 12, 1-4)에 비교하고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든다. 그 첫 번째 근거는 "사유로서의 사유가 보다 강렬하게 자기 자신에게 향한다"는 정황이다. "이 과정은 냉철하고 조용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황홀경에서 발생한다." 두 번째 근거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돌려지는 인식, 곧 "존재라고 밖에는 달리 쓸 수 없고 그 자신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인식"은 황홀한 체험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제의의 외면적 형태들은 여기에서 전적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렇지만 제의가 이루려고 하는 것, 곧 보다 고차적인 현실성, 일상의 저편에 놓인 현실성과의 결합을 이루어내는 일은 파르메니데스에게 매우 분명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일(一, das Eine) 과 다(多, <las Viele)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나에게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 기울여라.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일은 지혜롭다."(B 50). 또 그가 보기에는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나오며 하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B 10). 대립되는 것들도 신 안에서 통일된다. "신은 낮이자 밤이요, 겨울이자 여름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배부름이자 배고픔이다. 기름이 향과 혼합되었을 때 각각의 향내에 따라 이름이 붙는 것처럼 신은 그때마다 변화한다."(B 67).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에게 전승된 자료들이 이 문제를 두고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모순이 벌써 이 문제의 핵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자(一者, das Eine)가 다음과 같이 제의의 최고의 신과 결합된다. "오직 일자만이 지혜로운데, 그것은 좋든 싫든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B 32). 헤라클레이토스가 각각의 제의 행위들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도 결정하기 어렵다. 그는 한편으로는 비교 제의의 풍습들을 치료제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 제의로의 입문 의식을 경건하지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B 14). 또 그는 아주 깨끗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회생 제물에 대해서도 물질적인 제물과 그와는 다른 제물로 구분한다(B 69). 어쨌든 분명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여러 가지 제의들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일자 이론이 어떤 의미로는 혼에서의 로고스 개념과 결합되기 때문에 개별적 인간의 로고스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로고스 사이의 결합을 이루어 낸다는 제의의 근본 사상이 여기에서도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모든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혼의 경계를 찾아낼 수 없다. 혼의 로고스는 그만큼 깊다."(B 45). 왜냐하면 개별적 혼의 로고스는,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통일성을 말하는 로고스이기도 하기 때문이요, 또 이 로고스는 그 현존이 아니고서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말할 수 없고 그 자체가 통일성이기 때문이다(B 50 참조). 사유하는 자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이 세계의 로고스를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물었다"(B 101)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바로 이러한 되돌아감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프랭켈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인도의 '만유 통일성 이론'(All-Einheits-Lehre)을 끌어들인다. "인도 사람들이나 헤라클레이토스나 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근원과 내 자아의 핵심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 로고스가 우리의 기초이자 우주의 기초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명된 자기 관찰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주의 심층에 접근하는 길을 갖는 셈이다." 그리스 민족종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과 신의 결합을 다시 이루어내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인간의 로고스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인) 초인간적 로고스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고대 종교는 외형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적 내용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도 마찬가지로 그리스 사람들의 고대 종교와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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