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보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 역사와 정치와 구원

 

해방신학 - 10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지음, 성염 옮김/분도출판사

서론
제1부 신학과 해방
제1장: 신학: 비판적 사색
제2장: 해방과 개발

제2부 문제제기
제3장: 문제제기의 과정
제4장: 제시된 해답
제5장: 교회와 세계를 양분한 데서 초래된 위기

제3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당면과제
제6장: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운동
제7장: 해방운동과 교회
제8장: 교회의 당면 과제

제4부 해방의 신학
전편:신앙과 신인간
제9장: 구원과 해방
제10장: 역사의 하느님
제11장: 종말론과 정치

후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새로운 사회
제12장: 교회: 역사의 성사
제13장: 가난과 인간의 연대성

 


제1장: 신학: 비판적 사색

결론

32 신학은 말씀의 빛을 받아서 그리스도교 신앙 실천에 관한 비판적 고찰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신학의 이 비판적 기능이 "예지"와 "합리적 지식"으로서의 기능을 대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도 이 두 기능을 전제로 삼고 또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신학의 세 가지 기능이 상호 병립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신학의 비판적 기능은 필연적으로 다른 두 기능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된다. 그래서 예지 및 합리적 지식으로서의 신학도 교회의 신앙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고 또 그 노선을 따라야 된다. 성서에 기반을 둔 영적 성장에 관한 이해가 발달해야 한다는 것도 이 신앙 실천과 관련시켜서이며, 신앙이 인간 이성이 제기한 문제와 대면하는 것도 이 신앙 실천을 통해서이다. 본 저서의 주제가 그렇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세분된 신학의 기능 가운데 이 비판적 기능을 특히 부각시키는 입장이 된다 그러자면 자연히 교회의 실천생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성령께 충동을 받고 또 다른 인간들과 공동유대를 만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 투신하는 문제를 각별히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문제점의 하나인 해방운동에 관해 주로 고찰할 것이다. 해방운동은 소위 제3세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문제이다. 

특수한 문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이러한 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보는 신학"을 수립하는 데 견고하고─건전하면서도─영구성있는 토대를 제공하리라고 본다." 라틴아메리카의 입장에서 보는 신학"이란 사람들이 염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 라틴아메리카에다 초점을 맞춘 신학이 대두된 까닭은 그저 무슨 독창물을 만들어보자는 교활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신학의 역사적 효율의 근본 의미를 모색해 보는 것이요─구태여 숨길 필요가 있겠는가?─또 세계교회의 신앙 실천과 사상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기여를 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우리의 사상 소재를 얻듯이. 

우리의 연구도 보편성을 유지하겠다는 염원을 당초부터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염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자면 국지적이고 배타적인 경향들을 극복하고 그 대신에 유일무이한 무엇,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며 따라서 결실 풍부한 내용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비 콕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학이 장래에도 존속하려면 미래의 신학이 되는 길밖에 없다." 미래의 신학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신앙 실천을 비판적으로 감정하고, 우리가 앞서 대강 묘사한 역사적 과업을 비판·평가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 몰트만은 신학이 "현실의 뒤를 절뚝거리며 따라가는 처지가 되어서는 안되고 ··· 현실의 미래를 펼쳐보임으로써 현실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해방운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우리의 연구는 절뚝거리며 현실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해방운동에 있어서 현재는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무릇 희망이라는 것은 역사에 대한 현재의 투신에서 오는 결과 내지 그 투신의 고유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현재 속에 기존하는 이 미래를 창안하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희망의 자세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신학의 기능은 그보다 훨씬 온건한 것이다. 신학은 현재 속에서 미래를 창안하고, 모든 것이 좌절되어도 희망을 걸고 일어서는 것이 역사의 주춧돌이 된다고 해설하는 학문일 따름이다. 전향적 행동을 심사숙고한다고 해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재에 편승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을 투시하고 역사의 동향을 알아내며, 미래를 향하여 역사를 추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찰한다. 자유화 혹은 해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고찰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앙하고 인간이 소망하는 미래의 빛을 받아 현재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一현재를 변혁하는 것은 행동이다─의 관점에서 반성한다. 그러나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이런 사색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순간 역사의 맥박이 뛰는 심저에까지 뿌리를 뻗어내림을 뜻하며, 역사의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역사를 밝혀보임을 뜻한다. 역사의 주님은 인류의 현재 순간에 전적으로 개입하셨으며, 그 역사를 완성을 향해 몰고가신다. 

그러므로 해방의 신학은 새로운 주제들을 내놓는다기 보다는 신학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보겠다. 역사적 시행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신학은 역사를 해방시키는 신학이다. 즉 인류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변혁의 신학이다 — 따라서 교회에 모여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인류의 역사를 변혁시키는 신학이다. 이것은 세계를 반성·고찰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신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 신학이다. 유린당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항의하고, 국민 대다수가 당하는 착취에 대해서 투쟁하며, 사랑을 자유로이 해방시키고, 정의와 우애가 군림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신학이다. 

 

제9장: 구원과 해방

해방자 그리스도

204 여기서 우리는 죄라는 문제에 관해 일찍이 없던 새로운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불의한 상황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요 운명의 소산도 아니다. 죄의 배후에는 인간의 책임이 있다. 예언자들이 극구 강조한 것도 이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말뜻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메델린 회의"가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일컬어 "죄악의 상황"이라 하고, "주님께 대한 배역"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비난은 사회계층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만행을 지탄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모든 책략과 정책을 힐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를 포함하는 기존 체제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 역사 발전에 죄악이 끼친 세력을 부인하는 따위의 천진한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아리치아 초안」이 받은 비난이 바로 이것이었다. 초안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을 자주 내세우고 인간의 진보에 호의를 표하는 신학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온 죄를 개인 내면에만 해당하는 사사로운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영성적" 구원에 필요한—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세 질서와 시비할 필요는 없는─전제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죄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며, 인간들간의 사랑과 형제애의 부재요, 하느님 및 타인들과의 친교를 단절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균열이다. 죄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죄악의 집단적 차원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서의 죄의 개념이며, 곤잘레즈 루이즈는 이것을 "hamartiosphere"(죄악의 상황)라고 명명했다: "인류 역사 자체의 진전을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구조 또는 매개 변수"라는 것이다. 죄론이란 무슨 부연 같은 것이 아니다. 자기 나름의 신학을 다 서술하고나서 정통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 또 남의 비난을 사지 않기 위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육체를 무시하는 영성주의로 도피하라는 구실도 아니다. 압제적 구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 또 사회계급 사이의 지배와 노예제도 속에 죄는 엄연히 현존한다. 그러므로 죄는 근본적 인간 소외이며, 불의와 착취라는 상충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죄가 그 자체로 포착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구체적 순간에 특정한 소외에서 포착된다. 그리고 죄의 구체적 노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같은 현상의 근저를 파악하려면 죄의 구체적인 노정을 체험해야 한다는 역도 성립한다. 죄는 결국 근본적인 해방을 요구하며 이 해방은 필히 정치적 해방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해방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침여하는 사람만이, 개개의 부분적 인간 소외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소외와 이탈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무결한 해방은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스도는 죄와 죄의 모든 결과에서 인간을 구원하셨다. 앞서도 인용한 메델린 문헌의 사상이 바로 이것이었다: "같은 그 하느님은 때가 되자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자는 죄가 인간을 굴복시킨 '모든' 예속 상태에서 만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 예속이란 기아와 비참, 압제와 무지, 불의와 증오 등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근원을 두고 있다." 크리스천 생활을 일컬어 파스카, 곧 "넘어감"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크리스천 생활은 실로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비인간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전이이다. 그리스도는 당신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과의 친교와 타인들과의 친교로 진입시키셨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 친교로 진입시키고 끊임없이 그 친교의 완성을 추구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은—사랑의 거절인─죄와 죄의 모든 결과를 정복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2장에서 해방의 개념을 논하면서 해방의 의미를 세 가지 단계로 보았다: 정치적 해방 역사를 통해서 달성되는 인간의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과 친교의 개시이다. 본장의 사상에 비추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해야겠다. 세 가지 단계의 해방은 상호 영향을 끼치지만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둘이 없으면 나머지 하나의 해방도 있을 수 없으나, 구분은 있다. 셋 다 만유를 포괄하는 구원의 부분들이지만 그 정도가 각기 다르다. 그리스도 왕국의 성장을 현세적 진보로 환원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신앙으로 받아들인 말씀에 비추어볼 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죄가 사회불의와 비참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의 성장이 품고 있는 의미가 곧 사회정의와 새로운 인간의 궁극적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인간적 기대를 일체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해방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인간만이 사회불의의 궁극적 원인과 사회정의의 전제조건을 해득할 수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건대 역사 한가운데서—역사는 오직 하나, 구원의 역사밖에 없다고 거듭 말했거니와—착취와 인간 소외에 대항하여 전개하는 투쟁과 노력은 결국 이기심과 사랑의 거부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체의 노력을 곧 해방의 노력이라고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노력은 본원적인 인간 소외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유효적절한 충격과 영향을 준다. 그 노력이 전체적 구원을 가져오지 못함은 물론이지만 그 자체가 구원활동임도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적 활동인 이상,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적" 활동보다는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그 모호함이 이 활동의 기본 방향과 객관적 결과를 약화시키거나 왜곡하지는 않는다.

207 구원 과정의 총체성과 철저성으로 미루어 양자의 이 같은 관계는 필히 요구된다. 구원 과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활동의 성령의 선물이 표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 인간 역사의 단일성이 드러난다 구원사업을 단지 "종교적" 영역에다만 국한시키고 그 보편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원을 유야무야로 환원시키고 격하시키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질서에 대해 간접적이고 함축적으로밖에 연관되지 않으며, 사회의 근본 구조와 핵심에는 연관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구원의 내용을 순수하게 수호하려면, 인간과 사회계급이 다른 인간과 인간과 사회계급을 착취하고 노예화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을 벌이는 인간 역사에서 구원을 따로 격리시켜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모든 형태의 착취와 모든 형태의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업적을 "보전"한다고 하면서 실은 그것을 "상실"하는 자들이다. 

만유를 총괄하는 해방운동의 완전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우리가 앞서 지적한 해방의 세 가지 차원을 다 포괄한다. 선교에 관한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다음 텍스트는 우리의 논지를 적확하게 요약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주와 인간 역사의 동력, 정의와 인간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비참과 무지와 굶주림 등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우리 대륙에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인간 존엄성에 대한 각성(「사목헌장」 22항) 등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서 유래하고 변혁되며 완성에 도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은 바로 인간 역사 한가운데 현재화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인간행동이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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