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다른 것이 아닌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 10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지음, 조규홍 옮김/나남출판

옮긴이 머리말

1. “다른 것이 아닌 것”이란?
2. “다른 것이 아닌 것”과 신의 이름
3. 존재 및 인식의 원리로서 “다른 것이 아닌 것”
4. “다른 것이 아닌 것”과 “초월적 존재”
5. “다른 것이 아닌 것”과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
6. 다른 것 안에 자리하는 “다른 것이 아닌 것”
7. 모든 존재의 전제(前提)로서 “다른 것이 아닌 것”
8. “다른 것이 아닌 것”과 본질(무엇임)
9. “다른 것이 아닌 것”과 우주 삼라만상
10. “다른 것이 아닌 것”에의 참여(나눔)
11. 실체와 우유(偶有),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닌 것”
12. 물질과 “다른 것이 아닌 것”
13. 지금까지의 중간요약
14. 디오니시우스의 다섯 작품들에서 발췌한 그의 사상 요약
15. 그 해석 1: ‘알파’(앞섬)로서의 신
16. 그 해석 2: ‘순간’으로서의 신
17. 그 해석 3: “초실체적 한 분(하나)”으로서의 신
18. 아리스토텔레스의《실체에 대한 가르침》비판 1: 그 결함
19. 아리스토텔레스의《논리학》비판 2: 그 한계
20. 플라톤과 “다른 것이 아닌 것”
21. 플라톤의《신비신학》
22. 신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
23. “알아보시는 분”으로서의 신
24. ‘영’(靈)으로서의 신

부 록
옮긴이 해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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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것이 아닌 것"이란?

요한: 〔니콜라우스 추기경님!〕 당신도 알다시피, 저희 세 사람은 일찍이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전념해왔습니다. 그런 우리를 당신은 당신과 토론하도록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프로클로스의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주석서》를 살펴보았고, 베드로는 프로클로스의 《플라톤의 신학》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페르디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탐구했습니다. 한편 당신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신학자 아레오파기타의 디오니시우스에 몰두하였습니다. 이제 앞서 언급된 사상가들이 다루는 중심사상에 다가서는 데 있어 당신이 보다 간결하고도 분명한 방식을 제시해 주신다면, 저희는 즐겨 듣겠습니다.


니콜라우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두루 심오한 신비를 찾는 데 몰두해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가 그런 신비를 우리가 정독해온 작품들을 저술한 사상가들보다 더욱 간단하고 쉽게 표현해낼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찾고 있는 것에로 우리를 가까이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 그것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 그 점이 밝혀지길 저희는 희망합니다.

페르디난도: 저희 모두가 진리에 열정을 갖는 만큼, 저희 정신의 눈앞에 진리를 분간해낼 수 있게끔 진리를 올바르게 되새겨 주는 스승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고령의 춘추(春秋)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지치지 않는 힘을 발휘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진리에 대해 논할 때에는 젊은이 같은 열정을 보이십니다. 이제 당신이 저희보다 앞서 몸소 통찰하신 바를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니콜라우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페르디난도! 단 자네가 내게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가볍게 폐기할 요량으로 업신여기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 말일세. 

페르디난도: 저의 스승들인 철학자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니콜라우스: 그러면 먼저 자네에게 묻겠네. 우리로 하여금 제일 먼저 알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페르디난도: 정의 (定義) 입니다.

니콜라우스: 올바로 대답했네. 왜냐하면 정의란 〔앎을 위한〕 언어형식인 동시에 합리적 판단이기 때문이지. 그러면 정의는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페르디난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것이 〔이후〕 모든 것들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우스: 매우 현명한 대답일세. 그러면 그것이 모든 것들을 정의한다면, 결국 그 자신을 정의하는 일 역시 그에게 달렸다고해야겠지?

페르디난도: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니콜라우스: 그렇다면 자네는 모든 것을 정의하는 정의란 〔곧〕 "정의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는가?

페르디난도: 예, 압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동시에〕 정의되는 〔의미로서의〕 정의여야 하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찌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니콜라우스: 나는 자네에게 그 점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었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찾는 것을 성급히 포착하려는 중에 간과함으로써 소홀히 다룬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네.

페르디난도: 언제 당신이 나에게 그 점을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까?

니콜라우스: 물론 그 점은 내가 모든 것을 정의하는 정의가 "정의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한 것을 가리키네.

페르디난도: 저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니콜라우스: 내가 앞서 말한 몇 마디 표현은 쉽게 확인될 수 있으니, 자네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상기하게나. 여기서 만일 자네가 자네의 예리한 관찰력을 온통 집중하여 "다른 것이 아닌 것"을 탐색한다면, 자네 역시 나와 함께 그 정의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정의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일세. 

페르디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확언하시는 바가 너무 포괄적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니콜라우스: 그렇다면 나에게 대답해보겠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다른 것이 아닌 것"과는 "다른 것"인가?

페르디난도: 아닙니다. 결코 "다른 것"일 수는 없겠죠.

니콜라우스: 그래, 그것은 〔말 그대로〕 "다른 것이 아닌 것"이지.

페르디난도: 예, 확실합니다.

니콜라우스: 그러면 이제 "다른 것이 아닌 것"을 정의해볼 수 있겠나!

페르디난도: 저로서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아무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니콜라우스: 자네는 참(진리)을 말했네. 〔하지만〕 자네는 지금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정의될 수 없음을 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정의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페르디난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그것이 모든 것을 정의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니콜라우스: 그보다 더 쉽게 알 수 있는 경우는 없을걸세. 만일 누군가가 자네에게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자네는 무어라 답하겠는가?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답하는 일 외에 달리 자네는 무어라 말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것은 하늘과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페르디난도: 그러면 제가 정의하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과연 진지하게 그렇듯 답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니콜라우스: 물론 "다른 것이 아닌 것"이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정의하는 이 방식을 따라 가장 정확하고 참되게 말할 수 있으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기에, 저 "다른 것이 아닌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그 주변에 머무르면서 인간적 앎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 보는 일 외에 따로 할 일이 없다고 보네.

페르디난도: 당신은 놀랍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상가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를 표현했었다면, 〔그에 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니콜라우스: 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 같은 가르침을 읽은 적은 없으나, 다만 디오니시우스가 다른 어떤 이들보다 그에 가까운 가르침을 소개하였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그가 여러 가지로 표현한 모든 작품들 속에서 "다른 것이 아닌 것" 자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네. 실제로 그는 《신비신학》 말미에 가서 "창조주는 명명할 수 없거니와 존재하는 것 (피조물)으로서 다른 (어떤) 것도 아니시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네. 물론 그는 거기서 더욱 의미심장한 어떤 것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식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그럼에도 관심있는 사람을 위하여 여러 곳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하여 "다른 것이 아닌 것"의 신비를 밝히려고 하였네. 

 

2 "다른 것이 아닌 것"과 신의 이름

페르디난도: 모든 이가 신을 '제일원리'(第一原理)라고 부르는 데 반해, 당신은 "다른 것이 아닌 것(분)"으로 표현하시려는 듯 여겨집니다. 물론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신을〕 '첫째'라고 공언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것 다음의 모든 존재와 전적으로 구별되며 철저히 그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면 결코 정의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그로부터 생겨난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한,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첫째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합리적 근거 혹은 정의로서의 제일원리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할 것입니다. 

니콜라우스: 나를 잘 이해하고 있네, 페르디난도! 과연 저 제일원리에 여러 가지 이름이 속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 밖의〕 다른 모든 이름들과 사물들의 원리라는 점에서 〔그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원리로 삼지 않고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존재하기에, 그러한 숱한 이름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요, 그런 만큼 정신의 예리한 눈으로 그 밖의 다른 것들보다 유독 한 가지 표현방식을 통하여 보다 정확하게 밝혀질 것일세.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아직도 첫째에 대해 인간의 시야를 보다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합당한 표현을 정작 발견하지 못하였네. 왜냐하면 모든 표현된 것은 〔표현하려는〕 어떤 것과는 다른 것으로 혹은 다름 자체로 한정(限定, 개념화)되었고, 그런 방식으로 모든 것들은 저 "다른 것이 아닌 것"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만큼, 결국 그런 표현들을 통해서는 제일원리에로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없겠기 때문이네. 

페르디난도: 이제 당신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되새겨 본다면〕 알아봄이 도달하는 끝(한계) 인 "다른 것"은 알아보는 행위의 원리일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다른 것"이 "다른 것"으로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기서 "다른 것이 아닌 것" 없이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결국 그것은 앞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을 반드시 전제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표현할 때마다 그 표현 속에 이미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자리하고 있으니, 결국 그것을 여하튼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을 이제 확연히 알 것 같습니다. 

니콜라우스: 아주 훌륭하네! 그런데 우리는 말마디를 따라서가 아니라면 직관한 바를 겉으로 드러낼 수 없다고 볼 경우, 나는 저 "다른 것이 아닌 것"보다 더 정확한 다른 표현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보네. 마치 어떤 도시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아직 그 도시의 이름(도시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설령 그것이 신의 이름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숱한〕 이름들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보네. 

페르디난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또한 저는 신이 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분이요, 다른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며, '무'(無)는 무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요, '비존재자'는 비존재자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이며,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저는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 전제되고, "다른 것이 아닌 것"이 선재하는 까닭에, 모든 것들을 정의하고 나아가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함을 알겠기에 말입니다. 

니콜라우스: 자네의 그 논리정연하고 활기 넘친 통찰력이 만족스럽네. 자네는 과연 내가 의도했던 바를 아주 잘, 그리고 재빨리 파악하고 있네. 이제 자네는 "다른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앞서 표현하였던 바에 근거하여서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네만,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닌 것"은 단지 '원리'에로 안내하는 이정표로서만이 아니라, 신의 명명불가한 이름을 보다 설득력 있게 밝히는 데 있어서도 도움을 줄 것이네. 〔예컨대〕 그것을 통하여 〔신〕을 찾는 이들에게 마치 신의 모습이 청명한 거울 안에 비춰지듯 밝혀줄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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