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호모 루덴스 - 10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옮긴이의 말
들어가는 말

제1장 놀이는 문화적 현상이다: 그 본질과 의미
제2장 언어에서 발견되는 놀이 개념
제3장 놀이와 경기는 어떻게 문화의 기능을 발휘하나
제4장 놀이와 법률
제5장 놀이와 전쟁
제6장 인식(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제7장 놀이와 시
제8장 신화 창조의 요소들
제9장 철학에서 발견되는 놀이 형태
제10장 예술에서 발견되는 놀이 형태
제11장 놀이의 관점으로 살펴본 서양 문명
제12장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 요소

작품 해설
개정판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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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우리의 시대보다 더 행복했던 시대에 인류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감히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합리주의와 순수 낙관론을 숭상했던 18 세기 사람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물건을 만들어내는 인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faber(물건을 만들어내는)라는 말이 sapiens(생각하는)라는 말보다는 한결 명확하지만, 많은 동물들도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 역시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 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 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모든 인간의 행위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고대의 지혜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결론(놀이는 천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으리라. 하지만 놀이 개념은 이 세상의 생활과 행위에서 뚜렷하면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문명이 놀이 속에서(in play), 그리고 놀이로서(as play) 생겨나고 또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혀 왔다. 그리하여 1933년 레이던 대학 연례 강연에서 이것을 주제로 강연했고, 취리히, 빈, 런던 대학 등에서도 같은 주제로 강연했다. 특히 런던 대학에서는 강연 제목이 "문화의 놀이(The Play Element of Culture)"였다. 주최측은 강연 때마다 of Culture(문화의)를 in Culture(문화 속의)로 바꾸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거부하면서 of Culture를고집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나의 목적은 여러 문화 현상들 중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지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의 놀이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탐구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 『호모 루덴스』를 펴내는 목적은 놀이 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통합시키려는데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사용된 놀이라는 용어는 생물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책은 놀이에 대해서 과학적인 접근 방법보다는 역사적 접근 방법을 취한다. 독자들은 또한 아무리 중요한 개념일지라도 심리적 해석이 이 책에서 거의 원용되지 않았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지학적 사실들을 인용하는 곳에서도 인류학 용어나 이론은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다. 독자는 마나(Mana : 태평양 제도의 미개인들 사이에 믿어 왔던 초자연적 힘)나 주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인류학 및 그 관련 학문과 관련하여 다소 유감의 뜻을 갖고 있는데, 이들 학문이 놀이 개념을 홀대하면서 놀이 요소가 문명에 끼친 영향을 거의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구사된 용어들에 대하여 자세한 참고문헌을 기대하지 말기 바란다. 문화의 일반적 문제들을 다루다보니 그 방면의 전문가조차도 아직 충분히 탐구하지 못한 여러 분야를 약탈자처럼 침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약탈로 인한 지식의 부족분을 모두 채워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당장 글을 써나가느냐, 아니면 그만두느냐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1938년 6월
레이던 대학에서
하위징아

 



80 먼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놀이 개념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영어 단어 play에 상응하는 현대 유럽 언어들의 단어를 살펴보면서 놀이의 일반적 정의를 찾아본다. 그 결과 놀이 개념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을 듯하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을 수반한다.

이렇게 정의하면 동물, 어린아이, 어른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놀이 개념을 포섭할 수 있다. 즉 힘과 기량을 겨루는 게임, 발명하는 게임, 추측하는 게임, 사행성 게임,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모두 망라하는 것이다. 우리는 '놀이' 범주가 생활의 가장 중요한 범주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놀이 범주가 각나라 언어들에서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의 일반적 단어로 표현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놀이를 하며, 그 놀이 방식은 유사하다. 그러나 놀이 개념을 표현하는 어휘는 아주 다르다. 유럽 언어들처럼 뚜렷하고 폭넓게 놀이의 사상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반 개념의 타당성은 있을 수 없고, 각 인간 집단의 '놀이' 개념은 그 단어 (혹은 단어들) 속에 표현된 그 사상만을 포함한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높은 포괄성을 발휘하여, 놀이의 여러 측면들을 단 하나의 단어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실제 사정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떤 문화는 다른 문화에 비해 놀이의 일반적 개념을 아주 이른 시기에 아주 포괄적으로 추상하여 아주 우수한 놀이 관련 어휘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그 문화는 다양한 놀이 형태에 대하여 서로 다른 단어들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용어의 다양성 때문에 놀이의 전반적 특성을 단 하나의 단어로 포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런 잘 알려진 사례가 생각난다. 어떤 원시언어는 유의 하부 단위인 종을 가리키는 단어는 있으나 막상 그 유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다. 가령 뱀장어와 창꼬치라는 개별 단어는 있으나 물고기라는 단어는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할 수 있다. 놀이-기능 그 자체가 더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놀이 개념의 추상화는 비교적 뒤늦게 발달한 부차적인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알고 있는 여러 신화들에서는 놀이가 신성한 인물 혹은 반신반인의 존재로 구체화된 적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반면에 신들은 종종 놀이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인도-유럽 언어에 놀이를 지칭하는 공통적인 단어가 없다는 사실은 일반적 ·포괄적 놀이 개념이 후대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준다.


265 다시 한 번 놀이의 적절한 특성들을 열거해 보자.
첫째,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갖고 있는 활동이다.
둘째,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에 입각하여 명확한 질서를 확립한다.
셋째 일상적 필요 혹은 물질적 실용성의 영역 밖에서 지속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놀이 분위기는 황홀과 열정의 분위기이고, 목적에 따라 성스러운 혹은 축제적인 분위기가 된다. 놀이의 행동 뒤에는 고양과 긴장의 감정이 뒤따르고 이어 환희와 이완이 수반된다.

이러한 특징은 시적 창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우리가 금방 놀이에 부여했던 정의는 시의 정의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언어의 리드미컬하고 대칭적인 배열 각운과 유사운으로 의미의 핵심을 찌르는 것, 의미의 고의적인 가장, 어구의 인공적이고 예술적인 구성 등 이 모든 것이 놀이 정신의 다양한 표현이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듯 시를 가리켜 말을 가지고 노는 행위라고 하는 것은 결코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객관적 사실이다.

시와 놀이의 유사성은 외부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며, 내부적인 것, 그러니까 시가 갖고 있는 창조적 상상력의 구조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시구의 전환 모티프의 발전, 분위기의 표현 둥 항상 놀이 요소가 작동한다. 신화든 서정시이든, 희곡이든 서사시이든, 아주 먼 과거의 전설이든 현대 소설이든 작가의 목적은 의식·무의식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긴장을 만들어내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적 글쓰기의 밑바탕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긴장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인간적 감정적 상황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 우리 주변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대체로 보아 그러한 상황들은 갈등 혹은 사랑, 혹은 이 둘의 종합으로부터 유래한다.

 

410 인간의 마음은 궁극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릴 때 놀이라는 마법의 동그라미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 논리적 사고방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상한 정신과 장엄한 업적을 모두 살펴보아도, 진지한 판단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문제적인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언명이 절대적으로 확정적인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의 판단이 이처럼 동요할 때, 이 세상은 진지한 어떤 것이라는 믿음 또한 동요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예전의 격언 대신에, "모든 것이 놀이다"라는 더 긍정적인 결론이 우리를 압박해 온다.

물론 이것은 값싼 은유이고 무능한 정신의 소치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인간은 하느님의 놀이를 놀아주는 자"라고 말했을 때 이런 지혜(모든 것이 놀이)에 도달했다. 이런 독특한 이미지는 『구약성경』 「잠언」에서도 발견된다.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나는 그 분이 세상을 지을 때 그 옆에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줄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play).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놀이란 무엇인가? 진지함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우리의 복잡한 머리가 현기증을 느낄 때, 우리는 윤리의 영역에서 다시 한 번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점을 발견한다(논리로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책의 앞에서 놀이가 도덕의 바깥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가 의지를 발동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 진지한 의무인가 아니면 합당한 놀이인가, 하는 난처한 질문에 답변을 하려고 할 때, 도덕적 양심이 다시 한번 시금석을 제공한다.

진리와 정의, 동정과 용서 등이 우리의 행동에 결정적 동인이 될 때, 그 난처한 질문은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일말의 동정이라도 가미되면 우리의 행동은 그런 지적 구분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정의와 신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긴 하지만, 양심 혹은 도덕적 의식은, 끝까지 대답하기 난처한 그 질문을 제압하여 영원히 침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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