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 희랍에서 서구 사유의 탄생

 

정신의 발견 - 10점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김남우 옮김/그린비

서문 7

제1장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 21
제2장 올륌포스 신앙 61
제3장 헤시오도스: 신의 세계 89
제4장 초기 희랍 서정시에서 개성의 자각 111
제5장 핀다로스의 제우스 찬가 163
제6장 희랍비극에서 신화와 현실 189
제7장 아리스토파네스와 미학 219
제8장 인간적 지식과 신적 지식 249
제9장 역사의식의 탄생 271
제10장 덕의 권고: 희랍 윤리 사상 293
제11장 비유, 직유, 은유, 유추: 신화적 사유에서 논리적 사유로 339
제12장 희랍의 자연과학 개념 형성 383
제13장 길의 상징 407
제14장 인간성의 발견 431
제15장 칼리마코스의 유희 455
제16장 아르카디아: 정신적 전원(田園)의 발견 477
제17장 이론과 실천 511

저자 후기_1974년 525
역자 후기 541
옮긴이 참고문헌 544

 


서문

7 유럽 사유방식은 희랍인에게서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이후 그것은 유럽인들에게는 유일한 사유형식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 유럽인은 희랍적 사유형식에 매여 있는 바, 철학과 과학에 있어 모든 역사적 제약에서 해방된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를 목표로 하며, 단순히 목표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파악하려 한다. 하지만 희랍적 사유자체는 역사적 산물이며,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유럽인은 희랍적 사유를 자신과 불가분이라 믿는데 익숙해져, 당연한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사유방식을 전혀 이질적인 사유에도 그대로 침투시켰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환기 이래 점차 대두한 역사적 이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신'이라는 합리주의적 관념을 극복했지만 우리는 초기 희랍문화의 증언들을 지나치게 우리의 근대적 상상에 따라 평가함으로써 여전히 희랍적 사유의 발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모든 희랍적인 것의 시작인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아직도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고 또 우리에게 강력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 유럽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희랍적 사유가 모든 면에서 호메로스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해 버린다.

유럽 사유방식에 이르는 과정을 초기 희랍문명 가운데서 추적하기 위해서는 희랍인에게서 사유의 '발단'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희랍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사고의 도움을 받아서 다만 새로운 대상(과학과 철학 따위)을 획득하고 또 오래된 방법(예를 들어 일종의 논리적 추론)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고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창출했다. 희랍인은 능동적이고, 탐구하고 연구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정신을 발견했던 바,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인간 이해라 하겠다. 정신의 발견이라고 할 이 과정을 우리는 호메로스로부터 시작된 희랍문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인 서사문학, 서정문학, 극문학 등은 이 과정의 여러 단계다.

정신의 '발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아메리카는 발견되기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유럽정신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생겨났다. 정신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발견하다'라는 말을 정당한 것으로 사용한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기능을 증진하기 위해서 도구를 고안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발명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제멋대로 고안되고 혹은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진 발명품이 아니다. 정신운 그것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어떤 의미에서 사실상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정신으로서가 아닌 다른 형식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용어상의 난점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철학적 문제다. 즉 희랍인들이 정신을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또 정신은 발견됨으로 처음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할 경우에(문법적으로 '정신'은 피동 목적어이면서 동시에 유발의 목적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말은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진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은유이며, 우리 생각에 대한 언어상의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는 은유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정신에 대하여 논할 수 없다.

우리가 문제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다른 표현들도 같은 난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인간의 자기파악이나 혹은 자기인식이라고 말할 때, '파악하다', '인식하다'라는 말은 어떤 문제를 파악한다거나 혹은 타인을 인식한다고 말하는 경우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사용되는 자기파악과 자기인식이란 말의 경우, 오로지 파악행위에서만, 또 인식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한다. 정신이 '자신을 드러내다'라고 말하는 경우, 우리는 이를 인간의 측면에서 그의 행위 결과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사태로 간주한다. '정신이 자신을 드러내다'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다', 즉 그가 은폐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경우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은폐물에서 나오기 이전에도 그 후와 같은 인간이지만, 반면 정신은 자신을 드러내는 한에서만, 그것도 개인과 결부되어 드러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드러남'이라는 말을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신의 드러남은 신이 나타나기 전에도, 또 나타나지 않고서도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정신은 모습을 드러냄에 의해서 처음으로 생기게 됨으로써(자신을 결과해 내면서), 즉 역사의 과정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단지 역사 속에서만 정신은 나타나는 바, 역사와 인간 밖 정신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은 한 번의 행위를 통해서 전체를 나타내지만, 정신은 그때마다 한정적으로, 오로지 인간을 통해, 오로지 그때그때의 인간 개성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기독교에서 신을 정신이라고 하고 이로써 신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둥의 생각들은 희랍인들에게서 처음으로 획득된 정신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정신의 자기개시 혹은 발견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어느 특정한 형이상학적 기본태도에 개입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또 역사의 외부에 있는 혹은 역사 이전의 부동한 정신에 대해서 말할 의도도 전혀 없다. 여기서 정신의 '자기개시'와 '발견'이란 본질에서 서로 별개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인식이 신화적이나 혹은 시적 직관의 형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초기 시대에 대해 먼저 '자기개시'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다. 하지만 철학자와 자연 과학적 사상가의 경우에는 오히려 '발견'이란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결국 여기서 엄밀한 경계를 그을 수 없다. 역사적 고찰을 행하는 이 책의 경우에 두 가지 이유에서 '발견'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된 것의 전달 가능성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자산이 될 가능성인바, 많은 것들이 일단 발견되고 나서 빠르게 우리 일상어에 침투했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물론 반대로 발견된 것들이 쉽게 잊히기도 한다. 특히 정신세계의 발견물들은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이 없다면 지식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중세를 거치면서 많은 것들이 잊혔고, 그래서 다시 새롭게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지만, 고대 전통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발전의 각 단계가 나타내는 바처럼 인간은 단지 고통, 곤궁과 수고를 통해서 정신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는 이유에서 우리는 '자기개시'라는 표현보다 '발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고통을 통한 앎'은 인류에게도 타당하다. 물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서 현명해지는, 새로운 고통 앞에서 용의주도해지는 개인의 경우와 다른 의미에서지만 말이다. 세계는 더욱 현명해질 것이다. 다만 고뇌 앞에서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면 말인데, 가두어 버릴 경우 세계는 필시 한 단계 더 현명해지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 계몽 정신과 종교적 개명, 계몽과 회심을 극단적으로 분리하여 '정신의 발견'을 다만 철학적, 과학적 사상의 발견과 발전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랍인들이 발견한 유럽식 사유방식의 근본적인 것들이, 후에 밝혀지게 되겠지만, 통상적으로 정신사적 측면에서보다는 종교적 영역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한결 친숙한 형식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전회의 경고, 즉 본래적이고 본

질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는 요구의 목소리가 새로움에로의 촉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잠든 자들, 표면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의 외침은 특수한종류의 인식, 특히 정신적 차원의 새로운 깊이를 시사하고 있어 거의 예언적 모습을 띠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고대사를 통해서 추적 가능한 의식화의 연속적인 과정에 관계되는 한에서만 언급될 것이다.

13 만일 이 책에서 호메로스적 인간들이 어떠한 정신이나 영혼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또한, 다른 많은 사항도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호메로스적 인간들이 기뻐하는 것 혹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아직 할 수 없었다는 것 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단지 그것은 기쁨이나 사고 등의 사항이 결코 정신이나 영혼의 활동 작용으로써 해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 정신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것은 초기에 개인의 '성격'에 대한 의식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호메로스 서사시의 위대한 영웅들이 명확한 윤곽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웅들의 웅대하고 전형적인 반응의 방식은 아직 의지적, 정신적 단위인 '성격'으로, 즉 개인의 정신, 개인의 영혼으로 명시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도 나중에 희랍인들에게 정신 혹은 영혼으로 파악되는 '어떤 것'이 존재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호메로스의 희랍인들도 정신과 영혼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히 그들에게도 정신과 영혼이 존재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정확한 표현법이다. 왜냐하면 정신, 영혼 등은 오로지 자의식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있어 용어상의 엄밀성은 일반적으로 문헌학적 설명에서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 경우에 엄청난 혼란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가는 경험이 보여주는 바이다.

유럽 고유의 것을 희랍적 사유의 발전에서 제시하고자 할 경우에, 이것은 오리엔탈적인 것을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다. 희랍인들이 동방의 오래된 문화에서 많은 관념과 동기를 빌린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 바로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사항들은 분명 동방과는 관계없다. 호메로스서사시는 침묵으로부터도 감히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줄 만큼 실로 자세한 서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로부터 우리는 유럽 초기의 사유세계를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근대적 사고에서 바로 기대할 만할 사항이 호메로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 호메로스는 이런 사항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이같은 여러 가지의 '부재들이 내적으로 연관 관계가 있고, 또 그 부재들이 서로 결부되어 하나의 체계적 통일을 이루어 다시 우리에게 기묘하게 보이는 더 많은 것들과 대립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 걸음 한 걸음 희랍적 사유가 발전하는 가운데 질서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나중에 정신과 영혼에 대한 유럽적 이해, 즉 유럽의 철학, 과학, 도덕 그리고 후에 종교로 발전하게 될 것들이 차츰 모습을 나타냈다.

이 책에서 희랍정신의 의의는 고전주의가 걸어왔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추구된다. 비역사적인 완성된 인간성이 아니라, 희랍인들이 성취한 성과의 역사성이야말로 우리가 탐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적 고찰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상대화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가 이 세계에 초래한 것이 위대한 것인지, 아니면 보잘것없는 것인지, 심연에 도달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피상적인 것이었는지, 미래에 대해 의의가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영향력이 미미한 것이었는지 등 이 모두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결코 무한히 변화하며 끊임없이 요동치지 않는 바, 인간정신의 가능성은 한정되어 있으며,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자연과학자와 고전문헌학자는 차분한 관찰 가운데서 새로운 인식을 얻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바,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희랍인들의 여러 발견은 경험이 형상화된 것이라 하겠다. 이 발견에서 분출된 격정은 임의의 개인적인 형식을 취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은 정신이 도달한 새로운 자의식의 역사적 분출에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형식을 취한다. 특정한 정신적 근원 현상이 끊임없는 형태 변화 가운데 의식에 다가가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앎에 그때마다 다르게 각인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의 역사성과 체계성이 이 책에서 의도된 정신사 가운데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기술상의 여러 곤란한 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의 체계성과, 체계를 구성하는 특정 계기들의 역사성을 동시에 더듬어 가는 두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전자에, 때로는 후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짧은 논문 형식이 가장 적당한 서술 형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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