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 오독 ━ 문학 비평의 실험

 

오독 - 10점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홍성사


ⅰ 소수와 다수
ⅱ 잘못된 특징 규정
ⅲ 소수와 다수가 그림과 음악을 대하는 방식
ⅳ 비문학적인 사람들의 독서
ⅴ 신화에 대하여
ⅵ ‘환상’의 의미
ⅶ 리얼리즘에 대하여
ⅷ 문학적 독자들의 오독
ⅸ 개관
ⅹ 시
ⅺ 실험

맺음말
부록: 오이디푸스에 대한 주

옮긴이의 말

 


소수와 다수

7 이 책에서 저는 실험을 하나 제안하려 합니다. 전통적으로 문학비평은 책을 판단하는 일을 했습니다. 문학 비평이 사람들의 책 읽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그 책을 판단하고서 내놓는 이야기입니다. 나쁜 취향은 정의를 내린다면, '나쁜 책'을 좋아하는 취향입니다. 저는 이 판단의 순서를 뒤집으면 어떤 그림을 얻게 될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먼저 독자들, 또는 독서 유형을 둘로 구분해 봅시다. 그러면 책의 구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게 되는 책'으로, 나쁜 책을 '저런 방식으로 읽게 되는 책'으로 정의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한번 알아보기로 합시다.

저는 이것이 해볼 만한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볼 때 책을 먼저 판단하는 경우 대개 잘못된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A는 여성지를 좋아하고(또는 여성지가 취향에 맞고) B는 단테를 좋아한다(또는 단테가 취향에 맞다)고 말할 때, 두 대상에 적용되는 '좋아하다'와 '취향'의 의미가 동일한 것처럼 들립니다. 동일한 행위가 다른 대상에 적용된 것처럼 들리지요. 그러나 저는 관찰을 토대로 이것이 대개는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우리 중 일부는 좋은 문학 작품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수에 해당하는 이들은 학교에서는 <캡틴>을, 집에서는 순회도서관에서 빌려온, 당시에 반짝 유행하던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아이들이 소수가 책을 '좋아하던' 방식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가 눈에 훤히 보입니다.

우선, 그 다수는 어떤 책도 절대 두 번 읽지 않습니다. 문학적이지 않은 독자의 확실한 증표는 '전에 읽었다'라는 말이 그 책을 읽지 않을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주위에 그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읽은 소설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도서관에서 삼십 분 동안 서서 계속 훑어본 다음에야 한 번 읽은 책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읽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그 책을 당장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그 책은 타버린 성냥처럼, 써버린 열차표처럼, 어제 일자 신문처럼 쓸모가 없습니다. 이미 한번 사용했으니까요. 그러나 위대한 작품들을 읽는 이들은 같은 작품을 평생에 걸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씩 읽습니다.

둘째, 다수의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기는 하지만 읽는 행위를 중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책을 찾습니다. 다른 소일거리가 등장하는 순간 민첩하게 책을 내팽개칩니다. 책은 기차 여행을 할 때나,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을 때, 달리 할 일이 없이 혼자 있어야 할 때 또는 소위 참을 청하기 위한 용도로' 씁니다. 때로 그들은 산만한 대화를 나누면서, 종종 라디오를 들으면서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사람들은 책을 읽되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여가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늘 찾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을 며칠이라도 갖지 못하면 빈곤해졌다고 느낍니다.

셋째, 문학적인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종종 사랑, 종교, 사별의 경험에 비길 만큼 너무나 의미심장한 일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의식 전체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그 작품을 읽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조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야기나 소설을 읽고 나서도 그들에게는 별다른 일이 벌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읽기에서 나타나는 두 부류의 다른 행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소수의 경우 읽은 내용이 즉시 머릿속에서 두드러지게 자리를 잡지만, 다수의 독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수의 독자들은 혼자 있을 때도 좋아하는 구절과 시행을 읊조립니다. 책에 나오는 장면들과 등장인물들은 읽는 이의 경험을 해석하거나 요약해 줄 모종의 도상이 됩니다. 그들은 서로 책 이야기를 하는데, 자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다수의 경우는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시큰둥하게나마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엉뚱한 책을 좋아한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책을 가지고 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나무랄 것입니다. 책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이 말이지요. 소수에게는 책이 행복의 중심 요소이지만 다수에게는 주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다수는 이것을 좋아하고 소수는 저것을 좋아한다고만 말해 버리면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다시피 하는 처사가 됩니다. 다수가 책을 대하는 모습에 '좋아한다'는 단어를 쓰는 것이 옳다면 책에 대한 소수의 반응에는 뭔가 다른 단어를 찾아내야 합니다. 반대로, 소수가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다수에 대해서는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소수가 '좋은 취향'을 갖고 있다면, '나쁜 취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가 책에 대해 갖고 있는 성향은 '나쁜 취향'이 아닙니다. 취향이라는 단어를 한가지 의미로만 쓴다면 그것을 취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거의 문학만 다루겠지만, 위의 사례와 똑같은 차이가 다른 예술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음악을 들을 때 곡조를 허밍하고, 그에 맞춰 발을 구르고, 이야기하고 먹으면서 그 곡을 즐깁니다. 그리고 유행이 지나면 그 곡을 더 이상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흐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림이 없으니 벽이 너무 행하기' 때문에 그림을 사서 들여놓고, 한 주만 지나면 그 그림이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뛰어난 그림을 몇 년 동안 질리지 않고 즐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 말하자면, 다수는 '근사한 경치를 누구 못지않게 좋아합니다.' 그들은 좋은 경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휴가 장소를 선택할 때 경치를 정말 중요한 요소로 삼는 것―경치를 화려한 호텔, 훌륭한 골프코스, 화창한 날씨와 같은 수준으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一은 그들에게 잘난 체하는 가식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워즈워스처럼 경치에 대해 '계속 말하는 것'은 허튼수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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