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수: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 10점
이지수 지음/여래

1. 서론
2. 아비달마 불교
3. 중관학파
4. 유가행파
5. 불교논리학
6. 기타

 


서론

Ⅳ. 불교의 특성
불교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서울'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서울이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건물과 도로가 증대되면서 지금도 변화하고 있듯이, 불교도 시간적으로 2천 5백 년의 긴 세월을 통해 공간적으로 남쪽으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둥지로, 북으로는 중앙아시아, 티벳, 네팔, 부탄, 중국, 몽고, 만주로, 동으로 한국, 일본으로, 그리고 오늘날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세계로 확산되면서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발전하고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변형되어 왔다. 

그러므로 불교란 어떤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들의 집합이다. 거기엔 남방에서 신봉되는 상좌부 불교가 있고, 북방의 대승불교가 있으며, 대승불교 가운데서도 티벳불교와 중국의 선불교는 독특한 성격 때문에 다른 대승불교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상은 지역에 따른 분류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세 개의 동심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제일 가운데 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가리키고, 그 다음 원은 그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해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발달한 불교를 가리키며, 원은 불교가 들어간 마지막 지역의 문화가 동화되어 덧붙여진 부분이다. 가운데 원이 초기불교라면, 중간의 원은 부파, 대승불교이고, 마지막 덧붙여진 것들은 우리나라의 경우엔 산신이나 칠성신앙 같은 민간신앙이 그 예이고, 티벳은 본교라는 샤마니즘, 중국의 경우는 도교나 유교, 일본의 경우는 신도가 그 예다.

이렇게 다양한 교파들을 모두 볼교’ 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모두 석존께서 깨달음에 의해 무명을 소멸하여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믿고, 가르침(法, 다르마)과 그것을 통해 범부중생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각양각색의 불교에 통일성을 주는 근거다.

불교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깨우친 자(覺者, Buddha)의 가르침(dharma)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法)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전 가운데서 역사적 붓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상좌부의 팔리어 경전이나 한역의 아함(阿含)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2~3백 년간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다가 B.C. 1세기경에 문자화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변형이나 첨삭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가르침인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러므로 부파에서 전해진 여러 경전들을 비교, 검토하여 공통되거나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교설은 원래의 가르침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종래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이나 차이점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데, 차이점과 동시에 공통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철학체계나 종교는 힌두교이든지 자이나교이든지 불교이든지 모두 업에 따른 인과응보와 윤회계의 고성(苦性) 그리고 윤회의 원인인 실재에 대한 무지, 혹은 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해탈 이런 기본적인 개념과 사고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나 아닌 것(非我)을 나와 그릇되게 동일화시키는 나에 대한 착각이 무지와 그로 인한 고(苦)의 원인이라 보고, 참 나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도 종교의 기본적이고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실재를 보는 방식,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설명과 해석방식, 그리고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도 사실이다. 더욱이 사막의 종교인 셈족의 유일신적, 권위주의적, 도그마적 종교들(유대교, 회교, 기독교)에 비하면 대조되는 점이 적지 않다.

① 불교는 다양성을 수용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문화의 특성은 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 역시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단일한 철학과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의 집합이다.

남방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 현교와 밀교, 자력교와 타력교, 티벳불교, 선불교, 기타 중관, 유식,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등 수많은 교파와 종파들을 모두 합하여 '불교'라고 부른다. 이렇게 다양하지만 모두가 삼법인(三法印)을 믿고, 삼보에 귀의 한다는 점에서 불교라는 통일성을 갖는다.

② 도그마(독단)의 초월: 붓다의 가르침엔 정해진 법이 없으며(無有定法), 불법은 도그마나 독단적 교설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수준과 성향에 따라 설해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며, 환자의 병에 따라 처방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며, 방편시설(方便施說) 이다. 유치원생에 대한 가르침과 대학원생에 대한 가르침이 같을 수 없으며, 감기환자에게 주는 약과 배탈환자에게 주는 약이 같아선 안 된다. 그러므로 불교 교리 가운데는 근시안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가르침도 적지 않다. 궁극적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고, 말로 표현된 진리는 가시설(假施說)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교설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할 일종의 번뇌, 즉 병으로 본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에 비유되기도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넌 후엔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듯 이 교설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언어분별의 일종이다.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으며 불교의 여러 종파나 교설은 그러한 방법이다.

③ 불교는 유화와 관용의 종교다: 다양함의 인정, 그리고 비도그마적인 특성과 관련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유화와 관용의 정신이다. 이것은 이미 인도 문화 일반의 특성으로서 앞에서 논의하였지만 불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는 긴 역사를 흘러오면서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되어 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종교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위로부터의 권위나 바깥으로부터의 강요를 원치 않는 불교는 자율성과 자발성을 중시해 왔으므로 타종교의 신자를 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교세의 확장을 위해 티종교와 갈등하고 마찰하지 않는다. 터종교나 심지어는 토속적인 민간신앙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포섭하고 동화시켜 불교의 가슴 안에 껴안아 왔다. 그러므로 티벳에선 본(Bon)이라는 무속신앙을 포용했고 중국에선 도교나 유교를 포용했으며, 한국에선 산신이나 칠성신앙을 포용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흑과 백으로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므로 다른 종교도 낮은 단계의 부분적 진리성을 가진 것으로 인 정한다. 성문, 독각, 보살의 3승이 마침내는 모두 일불승에 돌아간다는 회심귀일(會三歸一)의 원리는 티종교나 사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④ 불교는 인본주의다: 서양의 사상사에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의 선언과 더불어 신(神)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자아의 문제로 전환한 이래 인간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룸비니에서 태어난 직후 사방을 7보씩 걸으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는 선언으로써 처음부터 인본주의(휴머니즘)로 출발했다.

불교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다. 불교는 붓다, 즉 깨친 분의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이 그 내면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함으로써 가장 진화되고 완성된 인간인 붓다가 되기를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불교는 궁극적 가치와 종교적 진리(실재)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바로 인간의 삶과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금을 함장하고 있는 광석처럼 여래장(如來藏), 즉 여래를 품고 있는 모태다. 또, 『열반경』에선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미혹에 사로잡힌 범부들이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은 실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5온으로서, 5온은 가아(假我)이고 비아(非我), 혹은 무아(無我)다. 그러나 참 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존재의 심연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이 곧 여래이고 진여이고 열반이고 불성이다. 초기불교가 생멸하는 5온이 무상이고 무아(無我)이고 고(苦)인데 대해 열반은 불생불멸 즉, 적정(寂靜, santi)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한 데 반하여, 대승불교에선 열반은 상(常)이고 낙(樂)이고 아(我)이고 정(淨)이라고 긍정적,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열반=여래=진여=불성이 곧 참 나(眞我, 아뜨만)이고 대아(大我, 마하트만)이다.

⑤ 불교는 비권위주의적인 자각의 종교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이다. 믿음이나 신앙은 초기 단계에서 요구되는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어떤 교설이든 권위 때문에 받이들이고 맹종해선 안 되며, 자신이 스스로 검토하고 실험하고 검증하여 바르다고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믿고 따르라'가 아니라 너 스스로 '와서 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불법의 특성이다. 이 점은 경직된 도그마를 거부하는 불교의 특징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⑥ 불교는 심리학적이고 분석적인 종교다: 인본주의적이고 자각의 종교라는 불교의 특성과 연관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교가 세계의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분석의 종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본질이 마음에 있고, 궁극적 진리도 마음속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음 혹은 의식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인 복합체이고 또 다양한 차원의 깊이가 있으며, 불교는 그러한 의식의 구성과 변형의 메커니즘에 대해 치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초기불교의 5온 · 12처 · 18계설, 12 연기설, 그리고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중국에선 구사종), 대승의 유식설(중국에선 법상종) 모두 미혹과 번뇌의 마음에 대한 정밀한 검토를 통해 초월적 의식 혹은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실천적 심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양에서는 현대에 와서야 인정된 프로이드의 개인무의식, 칼 융의 집단무의식의 존재가 불교에선 이미 천여 년 이전인 A.D. 4~5세기경에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으로 유식학파의 중심이론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서양에선 칼 융이나 에이브러햄 마술로우의 제3세력의 심리학, 더 나아가 초개아 심리학에서 동양의 명상이나 신비체험에서 드러나는 초월적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동양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과학적 심리학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요가나 선불교, 유식불교에 대한 심리학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⑦ 불교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엔 사문이라고 불리는 많온 자유사상가 내지는 구도자들이 활동했으며, 우빠니샤드의 흐름에 속하는 사상가들과 더불어 갖가지 이론과 견해들이 난무하면서 서로 시비를 따지고 논쟁하기를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 62견, 363견, 혹은 육사외도라 불리는 이론들이 나타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의 견해나 주장만이 옳다는 고집을 견착으로서 아집과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특히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지적 만족을 위한 이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불교의 목적은 생사윤회의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열반의 언덕으로 건네주는 것이며,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을 위한 이론, 이기기 위한 논쟁을 거부했다.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끝이 있는가? 신체와 정신은 하나인가,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소멸하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침묵(無記)을 지켰다. 침묵의 이유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이 아예 문제로서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 공리공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고 또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모습을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했다.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당장 독을 제거하고 치료를 받는 대신, 이 화살을 만든 재료가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고, 또 그것을 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고 신분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을 떠난 요원한 이상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상을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여설지견이다. 범부들은 사물을 자기의 욕망이나 과거의 업력에 의해 왜곡된 의식으로 보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라 자기의 주관이 투사한 영상을 볼 뿐이다. 불교는 바른 지견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계 · 정 · 혜의 삼학을 제시한다.

⑧ 불교는 근본적으로 수행의 종교다: 불교는 타종교처럼 절대지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종교가 아니라 ━ 대승불교에서 이런 요소가 도입되긴 했지만 ━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물과 자기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요가 수행, 혹은 선정수행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수행의 종교다. 그러므로 출가한 스님은 다론 종교의 사제나 성직자처럼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면서 남들도 이끌어 주는 수행공동체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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