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여는 말
성서의 시각적 읽기, 그리고 신상으로 살아가기
성서의 시각적 읽기
신상으로 살아가기
인간됨과 창조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새뮤얼 박의 《전쟁 때의 창조》
새뮤얼 박의 《베레쉬트 바라》
믿음의 손
하갈의 불운한 운명과 동정 어린 시선
불행과 동정을 넘어서는 믿음의 어머니의 손
꽉 막힌 현실, 위를 가리키는 손
믿음을 점검하는 손
소망의 발걸음
머문 별을 보다
권리를 찾는 과부
아리마태아 요셉은 무엇을 찾았는가
차마 못하는 마음과 정의
정의로운 요셉의 차마 못하는 마음
위로의 아들, 요셉
포도원 주인의 정의와 차마 못하는 마음
기적의 내면
‘기적’이 놓인 오늘날의 자리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속
내가 아는 한 가지
기억의 윤리
호세아의 가족 기억하기
크리스마스와 거절된 위로
이 여인을 기억하는가?
사랑의 힘
합당한 예절로 뵈뵈를 영접하라
필레몬의 쓸모없는 종을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기
기만의 비극
디나는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반복되는가?
빌라도의 씻어낼 수 없는 손
측은지심의 보행 - 길 위의 예수 -
나가는 말

 


신상으로 살아가기

26 기원전 63년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징악할 때 유대인들도 그에 굴복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유대를 정복하고는 예루살렘 신전에 갔다. 유별난 종교의 신전이니 그곳을 둘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경악하는지도 모른 채 그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는 지성소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다른 종교의 신전에는 신의 형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예루살렘 신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솔로몬이 만든 신전에는 야훼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신상을 대신했지만, 이른바 제2신전(헤롯 신전)에는 법궤조차 없었다. 지성소를 나오면서 폼페이우스가 한 말이 "별것 없네"인지 "아무것도 없잖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이곳에서 특별한 감명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당대 사람들의 상식으로 선상도 없는 곳을 신전으로 부르며 예루살렘 함락 직전에도 열심히 제사를 하던 유대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7 기원후 66~70년 사이에 유대는 반로마항쟁을 일으켰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신전을 파괴하여 그들의 종교를 없애서 민족의 구심점을 부수려 하였다. 예루살렘 신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야훼의 신전을 세우지 못하였다. 통곡의 벽은 전쟁을 견딘 유적으로 과거 신전이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계획과는 달리 유대교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신전 없는 종교를 발전시켰다. 신전에서 희생제사가 불가능해지자 율법 공부를 제사에 해당하는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는 식으로 말이다. 자기 집이 없는 신을 우주의 참 신으로 모시는 이 종교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별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신전 없는 종교는 이미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한 때부터 유대인들에게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종교가 '신전 없는 종교'보다 더 독특한 '신상 없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상은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선상이 없는 신이란 동시대 사람들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야훼의 신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다. 신상 없는 종교는 본질상 신상을 둘 선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신전 파괴는 도리어 구약 성서 신앙의 핵심으로 되돌아가게 한 셈이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고 거기에 신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왕의 옹립이다. '야훼 하느님이 왕인데, 왜 인간왕이 필요한가'라는 사무엘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한 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해서 인간 왕을 요구했다. 이는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야훼의 능력과 신실함에 대한 불신 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 사무엘은 야훼에 대한 불신과 배반으로 탄생한 인간 왕이, 그것을 요구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경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녕 알지 못했다. 야훼가 세우라는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그는 하느님과 민중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성서에 따르면 사무엘은 야훼 하느님의 또 다른 명령을 받아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 야훼 하느님은 다윗의 가문을 통해 그분의 통치를 계속하리라는 언약, 이른바 '다윗 언약'을 맺었다. 야훼는 직접 왕이 되는 대신 인간을 통한 대리 통치로 마음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다윗은 물론 그 이후 다윗 왕가의 사람들이 저지른 실정과 폭정은 야훼의 뜻인가? 적지 않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대로, 다윗 언약은 다윗 왕가의 사가史家들이 야훼의 뜻을 그들 편에서 해석하며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구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신전 역시 야훼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이 왜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머물러야 하는가? 왜 야훼는 자신을 예루살렘이라는 작고 거친 땅, 나아가 인간이 지은 누추한 곳에 자신을 한정하고, 하필 그곳에서 자신의 현현을 뚜렷이 나타내야 하는가? 만물을 사랑으로 내고, 그것을 길러내며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우주를 만끽할 수 있는 분이 왜 소나 양 같은 제물을 탐내며, 그 기름을 태운 냄새를 '향기로운 제물'로 보아주어야 하는가?

야훼의 신전과 그곳에서 올리는 제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코 야훼를 위해서는 아니다. 다윗이 권력을 잡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을 자신의 도시로 심아 대대손손 권력의 이양을 원했다면 예루살렘은 야훼가 머무는 곳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그곳의 지배자에게 신적 정당성이 부여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 내린 야훼의 명령이라며 신전을 짓고 그곳에 법궤를 가져다 놓아 이집트에서 노예를 해방한 야훼 하느님을, 왕 제도에 진노한 하느님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하였다. 분명 하느님은 그 선전에 머무실 것이다. 다른 모든 곳에 머무시는 하느님이니 그곳이라고 특별히 마다치 않으실 것이다. 다만, 그의 이름이 그의 뜻과는 다르게 오용될 때 하느님은 그곳에 진노를 퍼붓는다. 예언자들은 그렇게 예루살렘 신전을 바라보았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강조해서 부르고, 루가 복음서는 예수가 어렸을 때 예루살렘 신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면서 요셉 가족이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이탈한 것으로 그린다. 예수는 '다윗 언약'에 숨은 왕권 이데올로기나, 신전에 덕지덕지 붙은 탐욕을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 거기에 편승한 것인가. 시작할 때는 누군가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민중은 누군가의 못된 욕심의 껍데기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한다. 마태오 복음서가 증언하는 "다윗의 후손" 예수는 다윗처럼 싸움꾼이 아니라 치유하는 지도자였다. 민중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메시아 기대에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담았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다윗의 자손은 고름 나는 생채기에 입 맞추는 메시아다. 한편 신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 배후에는 절박함이 있다. 신전은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도 함부로 전용하거나 오용할 수 없는 보편의 하느님, 동시에 '내 아버지'인 그분의 집이다. 그곳에서 민중은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 겁박하며 내리누르는 사나운 눈길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너그러이 보아주는 분의 집, 우렁차게 명령하는 목소리를 내는 지배자의 집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한숨을 기도로 받아주는 마음과 귀를 가진 분의 집이다. 예수는 이런 곳마저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고발하며 그렇게 한 사람들의 죄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공생애를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요한의 세례는 선전 제의의 전면적 거절을 상징한다. 건물의 크기가 제자들마저 주눅들게 하자 예수는 앞으로 이 거대한 '강도의 소굴'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전이 없어졌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을 만날 장소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예루살렘 신전은 무너져야 하지만, 예수는 그것을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세울 것이다. 그 신전은 돌로 된 건축물이 아니라 그의 몸이다(요한 2:21).

예수는 하느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냄새 맡는 공간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예수 몸-신전은 "(예루샬렘) 신전보다 크다"(마태 12:6). 물리적 크기가 헤롯 신전보다 크다는 뜻이 아니다. '크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 공간과 관련이 있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며 만나는 곳에는 '임마누엘'의 신전 사건이 일어난다. 하느님이 거기에 계시며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루살렘 신전에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예수는 이것을 그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했다. 그가 죽을 때 신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마르 15:33~41, 루가 23:44~49, 요한 19:28~30) 이제 그 기능이 다했다는 상징적 사건이 일어났다.

바울은 예루살렘 신전이 버젓이 서 있으며 위용을 자랑할 때 이미 그 신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음을 알았다. 바울은 고린토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전이며,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신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전입니다. (1고린 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신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2고린 6:16)

하느님은 그의 영을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두고 그 모임을 신전으로 만든다. 바울의 선언은 이미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상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었다. 고대인들의 신과 신의 신상 사이의 관계를 배경으로 놓고 이해하면, 인간이 바로 야훼 하느님의 신상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신상을 직접 만들어, 그가 만든 세상에 둔다. 그러니 그가 만든 세상은 실상 신전 자체이고,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인간은 바로 신의 대리인이 되는 셈이다. 신의 대리인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모든 인간이 신의 현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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