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코르뱅: 역사 속의 기독교

 

역사 속의 기독교 - 10점
알랭 코르뱅 지음, 주명철 옮김/길(도서출판)

옮긴이의 말 5
책머리에 부치는 글 13

제1부 태초에 : 기독교 역사의 시작(1~5세기)
제1장 기독교의 출현 19
제2장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기독교도로 살기(『디오녜트에게』 쓰는 편지) 48
제3장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믿을 때 66
제4장 신앙을 규정하기 81
제5장 기독교 뼈대 세우기 97
제6장 믿음을 다지는 기독교 지성인 : 교부들 123
제7장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설교하다 142

제2부 중세 : 검은 전설도 아니고 황금 전설도 아닌……(5~15세기)
제1장 굳히기와 넓히기 165
제2장 긍정, 이의, 그리고 주교의 대답 202
제3장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하다 244

제3부 근대 : 다원주의의 체험(16~18세기)
제1장 개혁의 여러 길 294
제2장 경쟁 관계와 싸움 315
제3장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그리고 세상을 둘러싸기 346
제4장 감수성의 새로운 지평 371

제4부 현대 세계에 적응기(19~21세기)
제1장 성경 해석과 여러 형태의 신앙의 발전 401
제2장 현대 세계의 기독교 교리 431
제3장 전 세계 모든 차원의 기독교 453

 


제1장 기독교의 출현

17 초기 기독교도는 그들이 살던 세계의 실제 조건 속에서 종교를 믿고 믿음을 실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소식과 그 밖에 신약성경의 글은 어떤 경우 아람어, 히브리어,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그리스어로 씌었다 (이미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 성경』도 존재하던 구약과 신약) 성경은 라틴어, 고트어, 시리아어,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슬라보니아어로 번역되었다. 또 초기 신앙의 공식적 문구도 그리스어로 개념화하고 형식을 갖추었다. 초기 기독교도는 유대인의 사고방식, 그리스사상의 철학적 범주, 그리스와 라틴 수사학의 기법을 이용해서 신학의 형식을 조금씩 세련되게 다듬어 나갔다. 그 일을 한 사람들―공의회에 모인 주교, 호교론자, 교부들—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고 확신했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기대했듯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는 일이 절박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신자들은 공동체를 조직하고, 체계를 갖추어나가면서, 같은 믿음에 바탕을 둔 관계를 맺었다. 영적인 면에서 교회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또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를 팔다리로 생각했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교회는 믿음과 중요한 의식(세례와 성찬식)을 공유하는 지방 교회들의 연합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단과 정통 교리라는 개념을 다듬어 나간 덕택에, 교리가 결정되었고, 그 결과 교리와 맞지 않는 흐름을 가장 자리로 밀어내면서 "위대한교회"를 건설해 나갔다.

기독교도들은 초기 유대 권력기관의 박해를 받았듯이, 일단 기독교도의 본모습을 갖춘 뒤에도 로마 권력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 로마 권력은 기독교도들이 모든 이가 함께 받드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벌을 주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국가와 권력에 종속하고, 국가를 위해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네 믿음과 가치 체계, 생활 방식을 지키면서 자신을 차별화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사는 듯 동시대인들과 함께 살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민중의 미움과 교양인의 멸시를 샀다. 박해를 받던 시기의 남녀 교도들이 믿음을 중명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기독교도로서 참모습을 당당히 지켜나갈 때 기독교도 지식인들은 모든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였다. 순교자들은 존경을 받는 본보기가 되었지만, 사제들은 믿음이 약해지고 무너진 사람들에게 일정 기간 적절히 참회를 하게 하여 교회로 되돌아오게 했다. 박해가 끝나면서, 순교 대신 고행이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체가 됨으로써 신성성을 얻는 수단으로 나타났다.

박해가 실패하고, (312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이 율리아누스를 제외하고 차례로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게 되자, 근본적으로 새로운 조건이 생겼다. 이제 황제가 기독교도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 뒤로, 공간과 시간이 확실히 기독교화 할 수 있었다. 또 황제는 신앙을 규정하는 일을 포함해서 교회의 모든 일에 끼어들기도 했다. 이로 인해 4세기에 여러 차례 갈등이 일어났다. 황제는 전통 신앙을 조금씩 탄압하고, 4세기 말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전통 신앙을 모두 금지하였다. 기독교 신학이 정치권력과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발전하였다. 기독교도들은 군주가 기독교도로서,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로마제국이 하느님의 섭리를 실현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했지만, 로마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어떤 국가도, 그것이 비록 기독교 국가라 할지라도, 교회의 운명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도들은 스스로를 "하늘나라의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영원히 존재할 왕국을 바라게 되었다.


나자렛의 예수 : 유대인 예언자인가, 하느님의 아들인가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의 삶을 어떻게 아는가
19 예수는 말은 했지만, 글은 쓰지 않았다. 그의 손으로 쓴 문서는 우리에게 하나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용하는 문서는 모두 간접 자료이다. 그러나 그 자료는 많다. 가장 오래된 문서는 50년에서 58년 사이 사도 바오로가 쓴 편지다. 그것은 나자렛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었으며, 그가 부활했음을 믿는다는 보고서이다. 더욱이, 바오로는 "주님의 말씀"을 모은 문서를 알았고, (가끔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논증에 이용했다. 오래된 순서대로 볼 때, 그 다음에는 복음서가 있었다. 마르코복음서는 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간전승을 이용해서 65년쯤에 쓴 것이다.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를 보충해서 70년부터 80년 사이에 쓴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90~95년에 나왔다. 이들은 역사적 연대기가 아니다. 이들은 나자렛 예수의 삶을 보고하지만, 그 삶과 관련된 사실과 함께 저자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학적 해석을 보여준다. 그보다 늦게 나왔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실리지 않은 복음서, 말하자면 경외복음서(외전)은 앞서 나온 4복음서에서 싣지 않은 전승을 가끔 전해준다. 특히 베드로의 복음서 (120-150), 야곱의 원복음서 (150-170), 토마의 콥트어 복음서(150년경)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
20 예수의 삶을 복원하려면 문헌을 세심하게 조사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의 여느 인물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확신할 만한 문헌 자료는 별로 많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 확신하면서 몇 가지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예수는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아마 기원전 4년(헤로데 왕이 죽기 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요단강에서 세레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가, 나중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동아리를 만들었다.

요한을 본받아, 그도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오시기를 절박하게 기다렸다. 그도 구원을 받으려면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반드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서른 살이 되었을 즈음, 예수는 갈릴리 지방에서 설교자로 성공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는 그 시대 (율법학자인) 랍비들보다 더 단순한 말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가까이 있고 상냥한 하느님의 놀라운 모습을 청중에게 친근한 삶의 틀(농촌, 호수, 포도원)에 비유해서 전해주었다. 이미 다른 랍비들이 먼저 했던 것처럼, 그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는 길을 단순화해서 가르쳤다. 그가 병을 고쳐준 수많은 사례를 담은 보고서는 그가 유능한 치료사로서 존경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지지자의 무리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 집단은 발길이 머무는 마을에서 먹고 잤다. 가깝게 지내는 갈릴리 사람 열두 명의 동아리와 함께 남자와 여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일상적인 가르침을 공유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파국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전에서 격렬하게 행동했다. 그것은 예언자의 행동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 집단의 미움을 샀다. 그는 제사용 동물 장사치들의 가게를 뒤집어엎었다. 아마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수많은 의식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 있던 데 항의하려는 행위였던 것 같다. 사두가이파의 부추김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가 대중을 선동했다는 죄로 총독 폰티우스 빌라도에게 고발하기로 했다. 예수는 자신이 미움을 받아 잡혀가리라 예감하고, 마지막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했다. 그 자리는 그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의식이 생기는 자리였다. 빵을 나누고, 모두가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행위는 앞으로 올 그의 죽음을 상징했고, 그의 기억을 되살려줄 것이었다. 제자 유다 때문에 쉽게 잡혀간 예수는 총독 앞에 소환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로마 병사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단 몇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았을뿐이다. 빌라도는 그것을 보고 놀랐다. 나자렛 사람은 연약한 체질의 인간이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고나서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아, 제자들이 그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았고, 하느님이 그를 데려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스라엘의개 혁자

22 나자렛의 예수에게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계획이 없었다. 그의 야심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를 따르는 열두 제자의 동아리가 그의 야심을 상징했다. 이들은 예수가 꿈꾸던 새로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상징적으로 대표했다. 그는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왜?

예수는 하느님을 강하게 경험한 신비 체험자였다. 그가 보기에 하느님은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다. 아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기도하려면 단지 '아버지'(papa, 아르메니아어로 '아바'abba)라고만 해도 충분했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억누를 수 없는 절박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부름을 받으면, 가장 굳센 연대감마저 깨뜨려야 했다. 이제 자기 가족들과 헤어지거나 아버지에게 장례식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루카복음 제9장 59-62절). 이처럼 장례식과 가족의 의무를 침해한 것이 전적으로 불손하다는 판결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긴급한 징후가 또 있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임을 급히 알려야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은 돈 주머니나 신도 없이 길을 떠나 그 사실을 증명하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루카복음 제10장 4절).

예수가 안식일의 휴식을 위반한 일도 충격을 주었다. 예수는 여러 번이나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했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정당하다고 주장했다(마르코복음 제3장 4절). 예수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모은 토라(Torah: 율법, 모세의 5서)를 입에 올릴 때, 다른 이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다른 가르침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리는 번제조차 먼저 적과 서로 화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했다(마태오복음 제5장 23~24절). 간단히 말해서, 토라를 읽는 일 못지 않게, 치료는 하느님이 곧 오신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알리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이 조금 있으면 오신다고 확신했다 하느님은 심판을 내려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그 주변에 지인들을 모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개종에 호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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