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헹엘: 신구약 중간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3. 9. 4.
신구약 중간사 - 마틴 헹엘 지음, 임진수 옮김/살림 |
제1부알렉산더부터 안티오쿠스 3세까지 팔레스타인의 정치.사회적인 역사(B.C. 333~187)
제1장 알렉산더의 원정과 팔레스타인(B.C. 333/331)
제2장 알렉산더 후계자들의 권력투쟁과 팔레스타인(B.C. 323~301)
제3장 안티오쿠스 3세의 등장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팔레스타인(B.C. 301~223)
제4장안티오쿠스 3세의 팔레스타인 정복 과정(B.C. 223~ 200)
제5장 안티오쿠스 3세의 죽음까지 셀류커스 왕조의 지배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B.C. 200~187)
제2부 유대교의 ‘헬라화’ 과정
제6장 초기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화’ 문제
제7장그리스인, 야만인, 유대인: 정치.사회적 지위를 위한 투쟁
제8장 문학, 철학, 언어, 종교문제로서의 ‘헬라화’
제3부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흩어진 유대인과 조국의 유대인
제9장 그리스어 환경의 유대인들: 용병, 노예, 농부, 수공업자, 상인
제10장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유대인들과 그들의 그리스식 교육
제11장 이집트 밖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헬라화
제12장 마카비 시대까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
제6장 초기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화’ 문제
92 유대교의 헬라화에 대한 설명 혹은 다른 말로 유대교와 헬레니즘적인 문화의 대립적인 침략이라는 입장은 마카비 이전 시대에 해당한다. 그 시기는 B.C. 333년과 175년에 해당하는 약 160년간의 시간이다. 이 시기에 대해 설명하려면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들은 이 시기에 해당하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관한 파편적이며 흩어진 보고들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비유대교적인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유대교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나마 정보를 제공하는 것들도 아주 일부만이 유대인들의 헬레니즘 문화의 수용을 언급할 뿐이다. 또한 고대의 비문이나 고문서들, 그리고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그 가치가 희박하고 해석해 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대교의 문헌도 종종 가설로만 날짜를 정할 수 있을 뿐이어서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혹은 저항)를 설명할 때 간접적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유대교 문헌들이 헬레니즘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논쟁과 변증적인 성격을 가진 문서는 편파적인 입장에서 그런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시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대교 문헌은 거의 모두가 종교 · 민족적으로 치우친 '경향문헌'들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들만을 가지고는 당시 상황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히려 그런 문헌들로부터 개별적인 상황들과 발전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시도를 할 뿐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유대교'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 개념은 팔레스타인을 조국으로 하고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구성원들이 영위해가는 종교와 삶의 방식과, 그들로부터 파생된 문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확한 개념과 반대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헬레니즘' 내지 '헬라화'라는 개념은 명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 개념들은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종종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선은 헬라화 혹은 헬레니즘이라는 개념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헬레니즘'이란 개념이 단지 알렉산더 원정(B.C. 334)과 악티움(Actium) 해전(B.C. 31) 사이의 역사적인 시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헬레니즘이라는 개념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문화에 대한 명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헬레니즘이라는 문화는 팽창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고대의 유대교를 자신의 문화에 통합하고자 하였다. 헬레니즘 연구사를 보면, 구스타프 드로이센은 헬레니즘을 알렉산더에 의해 동방으로 '침략해 들어간' '세계문화'라고 정의한다.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학자였고, 그래서 그리스 문화를 고대 동방의 대립명제로 여겼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헬레니즘'은 기독교에서 완성을 이루는 종합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고대세계, 특히 플루타크의 문헌에서 나타난다. 플루타크는 그의 저술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운명 혹은 덕에 관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그는 알렉산더를 세계의 정복자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교육을 받은 세계의 교육자이며 '세계의 중재자 로 소개한다. 특히 그는 알렉산더가 "야만적인 왕들을 문명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야만인들 가운데 그리스식의 도시들을 세워주었으며" 또한 "무법자와도 같은 미개한 민족들에게 법과 평화를 가르쳐 주었다"라고 말한다.
97 알렉산더의 후계자들과 이후 헬레니즘의 왕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동방에 대한 그리스 문화의 확장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권력의 확보와 확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동방사람들과 구별함으로써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뒤섞이게 됨으로써 약해졌다. 그리고 그리스인들과 마케도니아인들은 군대와 행정적인 이점을 위해 긴밀한 밀착관계로 발전해나갔다. 그것은 왕의 통치가 마케도니아식의 밀집방어진과 그리스의 용병들 그리고 대신들과 기술자들에게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의 통치에는 조직에 재능을 가지면서 양심의 가책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동역자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왕들은 이와 같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들이 정복한 '식민지들' 안에 수많은 도시들을 건설하였고 군사적인 이주지역을 건설하였다. 이처럼 보다 새롭고 위대한 '헬라주의적'인 세계문화의 '통일'에 대한 전망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상호간의 분리(와 정탐이라는), 융통성 없는 상업 위주의 정책을 자주 강행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알렉산더의 죽음으로부터 로마의 최종적인 승리까지 자살과 같은 전쟁을 계속하다가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유산이 로마의 귄력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 로마의 권력은 매우 강한 강제적인 평화를 이루었고, 동방에서는 민족적인 방식의 통치들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파르티아(북부 이란의 종족) 제국의 등장은 주목을 끌만하다. 또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하층민들에게 파고들어 갔던 헬라화'가 로마의 보호를 받게되자 비로소 완전히 실현되기에 이른다. 바로 이 과정에서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상속자인 동시에 '구원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동방에서 유프라테스 지역에까지 이르는 헬레니즘의 과정을 도우는 역할을 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헬레니즘의 시대'는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비로소 본질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다.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전쟁과 해적들의 난동을 종결하고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민족들'의 평정을 칭송하면서 그의 공적을 열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필로가 야만인들에 대한 '헬라화' 과정을 부각시킨 것은 아주 독자적인 것이다. 필로는 타동사의 의미를 가진 탈 헬라화라는 단어를 가지고 헬라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언어 사용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다 "헬라(고대 그리스)는 새로운 그리스에 의해 확장되었으며, 점차 야만인의 세계를 헬라화하였다. 그리고 평화의 감시자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지역을 할당해 주었다. 이러한 타동사 헬라화의 사용은 그의 책 『리바노스』에서 다시 나온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알렉산더에 의해 일어났던 일들이 플루타크의 알렉산더 문서에서도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이 '헬라화'의 문화 프로그램은 로마 시대에서야 비로소 인정받는 보편적인 유산이 된 것이다.
제7장그리스인, 야만인, 유대인: 정치.사회적 지위를 위한 투쟁
115 특히 2세기부터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에서는 이전의 소아시아와 흑해의 북부 해안지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어 갔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화 된 이집트인들' 혹은 '그리스화 된 시리아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혈통에서 유래하지도 않았고 오래되고 긍지가 넘치는 식민지 도시들의 시민권을 소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어나 문화에 있어 '야만적인'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었다. 이 새로운 계층은 교육과 행동에 의해 '헬라인들'로 여겨지곤 했다는 사실은, 스트라보가 에포로스를 비판한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에포로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16개의 민족들 중에 세 그룹의 그리스 민족을 나머지 야만인들과 구별하였다. 하지만 이 나머지 야만인들은 몇몇의 민족들이 "혼합되었다"는 언급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스트라보는 이에 반대하여 "우리들이 '혼합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령 그들 스스로 혼합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지배적인 요소가 그들을 그리스인으로 만들거나 혹은 야만인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 3의 혼합된 민족을 알지 못한다"고 논증한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이라는 집합 개념이 항상 인종주의적으로 분명하게 확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분명해진다. 애톨인, 아카란인, 에피롯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인들'의 공동체로 나타났고, 또한 헬라화된 소아시아인들을 위해서도 적용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로마인들은 B.C. 229년 고대 일리리아 해안에서 해적에게 승리한 후 헬레니즘의 고린도 공동체 경기의 참여를 승인받았다. 이것은 타 민족들을 무조건적으로 야만인으로는 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폴리비오스는 비록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 간의 오랜 대립과 그에 수반되는 편견에 친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한 폴리비오스는 그리스 사신들을 그렇게 말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으며, 로마인들을 더 이상 야만인들로 표시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그들을 '그리스인들'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혼합된' 헌법의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극대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그들의 민족적인 독자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 사이에서 새롭고 독자적이며 특별한 위치를 얻어갔다. 그에 상응해서 키케로는 세계를 3등분하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그리스, 모든 야만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그러한 구분을 할 수 있었다. 유대인, 그리스인, 야만인. 동방의 페니키아식 도시에서는 수세기 전부터 그리스인들과의 다양한 접촉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문자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3세기부터 페니키아인들은 독자적으로 '그리스식' 경기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시돈의 '도시 왕' 필로클레스는 레세피아톤-아폴로도로의 아들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첫 왕조 때에 능력 있는 제독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B.C. 286년 이후 이 왕조를 위하여 지중해 동부에서 바다의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그러면서 페니키아인들은 외적으로는 매우 급속하게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 이후 그리스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언급하였던 스트라보의 인용은 '헬라화'가 계속해서 한 민족의 지도충의 태도와 결부되었다고 확증한다. 그래서 스트라보 자신은 전통적인 인종구분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 당시에 살았던 그는 '그리스인들'이라는 명칭이 상류계층의 문화적인 상태에 따라 좌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8장 문학, 철학, 언어, 종교문제로서의 ‘헬라화’
133 '헬라화'를 위한 최초의 가장중요한 진보는 개인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언어를 배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같은 예로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라피아의 전투를 앞두고 통역관을 통해 이집트의 밀집방어진 군사들을 위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프롤레마이오스의 통치자들 가운데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처음으로 이집트어를 정복해야만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B.C. 2세기 어떤 그리스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이 이집트어를 배움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의사에게 일자리를 찾는 행운을 바랐다는 것은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가 된다.
그리스어는 형식상 아테네식의 보통(Koine) 그리스어를 말한다. 이제 그 언어는 개별적인 군주들의 경계를 넘어 박트리엔에서 마살리아까지 모든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띠를 형성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므로 '헬레니즘 문화'를 위한 최후의 토대는 갈라지고 서로 투쟁해야 했던 정치권력이 아니라 공통의 언어였다. 따라서 그리스어는 '야만족이었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이 헬레니즘 군주체제에 대한 승리 이후에 그 종말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유지되었고 로마 평화(pax Romana)의 보호를 받으며 그 완성을 보았다. 이소크라테는 "누구든지 우리들의 교육에 참여하는 자는 공통의 혈통을 가졌다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는 그리스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선 '교육(paideia)'으로 아테네 그리스어를 정복했다는 것을 말하며, "아테네의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인들"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헬라화를 심층적으로 설명하려면 이런 외적인 것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는 헬레니즘 문화의 공통적인 과업이나 교육에 의한 민족들의 융합이라는 사상을 전체적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었다.
143 이처럼 우리는 로마 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소수의 유대인들에 대한 불신과 그들을 구속하려 했던 기준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직접적인 추방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의 유대인 증오와 이후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입장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존재한다. 아무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사회적인 근거들을 바탕으로 언어와 생활형식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낯선 문명에 스스로 동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이방인들과 동일한 평등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얼마 후에 출현하게 되는 기독교인들처럼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 사이에서 신정정치를 표방하는 제3의 민족이자 이방으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이 제3의 민족은 당시의 국가제도보다 더 고상한 법(토라)에서 자신들의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이것은 고대 유대교가 그리스-로마세계에서 발전해 가는 내적인 능력에 대한 뿌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고대시대의 반 유대주의의 뿌리가 되었으며 소름끼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제12장 마카비 시대까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
218 헬레니즘 문명과 그들의 언어, 그들의 문헌들과 그들의 사고에 대한 수용, 그리고 고대 유대교가 그런 사상을 통해서 고대세계와 투쟁했다는 사실은 매우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다. 헬레니즘 문명의 수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조국과 디아스포라 유대교에서 살았던 모든 계층들과 그룹들을 관통해 갔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은 정치 · 경제뿐만 아니라 지성과 종교의 영역에서도 잦은 접촉을 하게 했다. 그래서 개별적안 주민계층들과 집단들의 반응도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귀족정치는 새로운 생활형식과 그들의 교육을 위하여 스스로를 가장 강력하게 개방하였다. 그래서 그 귀족정치 역시 동화의 위협을 더욱 받았다. 그러나 또한 현자, 하시딤의 묵시사상가, 유대교-헬레니즘의 '변증론자' 같은 반대편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이렇게 정치적이고 지성적인 싸움이 일어나던 현장에서 새로운 시대의 사고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윤 결코 아니었다. 고대의 유대교는 낯선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유대교는 그것을 통하여 낯설고 유혹적인 문명에 항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교는 스스로 낯선 언어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사상과 표현형식을 통해서 유대교에 위임된 자신들의 종교적인 유산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하여 유대교는 역사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유지하는 내적인 능력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존재했던 팔레스타인 조국의 유대교도 '헬레니즘 유대교'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조국에 존재하고 있던 헬레니즘과 초기 로마의 고대 유대교의 역사를 참된 '복음의 준비'라는 입장에서 고찰해야만 한다 최초의 교회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팔레스타인 유대교로부터 유래하는 다수의 유대교-헬레니즘 단편들을 그의 역사에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런 유대교를 가리켜 '복음의 준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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